93. 기적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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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기적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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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기적의 열쇠
2023.03.19.
로미는 쉬지 않고 달려, 마침내 깊은 산기슭에 다다랐다.
산이 마지막으로 백 노인을 만났다고 했던 낡은 오두막집이었다.
‘제발 아직 여기에 계셔야 할 텐데.’
간절히 바랐지만, 폐가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던 집은 당장 귀신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음산했다.
‘쪼, 쫄지 말자!’
마당에 발을 디디기 무섭게 꼬랑지를 말았던 로미가 이내 마음을 가다듬곤 목청껏 백 노인을 불렀다.
“할아부지!”
순간 낡은 문짝이 열리며 안에서 무언가가 요란하게 날아왔다.
덩그렁!
한쪽이 찌그러진 양은 그릇이었다.
“아이구! 귀청 떨어지겄네!”
함께 날아온 익숙한 호통에 그녀가 반갑게 귀를 쫑긋 세웠다.
“넌 또 뭐여!”
반쯤 얼굴을 내민 꾀죄죄한 영감이 꽥 소리를 질렀다.
백 노인이었다.
“할아부지이이이!”
“누가 네 할애비여! 잉? 늙은이 좀 가만 내버려 두지 않고, 왜 자꾸 찾아와서 귀찮게들 지럴들이냔 말이여!”
언제나 취해있는 그가 온갖 인상을 쓰며 개똥 보듯 로미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이 순간 그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자세를 낮게 낮춘 채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어대던 로미가 냅다 백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악!”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그녀를 향해 두 팔을 올리던 백 노인은 이내 제 앞에 벌러덩 드러누운 로미를 식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배를 보인 채 누운 로미가 애교 많은 시골 똥개마냥 꼬리를 흔들며 말했다.
“하부지.”
헥헥헥헥헥!
“뭐여……. 너 산이네 수인 아니냐?”
“앗! 저 기억하시는구나!”
“넌 또 여기 왜 기어 왔어. 산이한테 무슨 일 생겼냐?”
들어보지도 않고 내쫓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냉큼 그간의 일을 짧게 전달했다.
수면초를 먹었다는 말에 백 노인이 놀라 펄쩍 뛰었다.
“몽마한테 수면초는 독이여! 얼른 순우부터 찾아가야 한당께!”
“순우가 누군데요?”
“누구긴 누구여! 일국의 수장이지! 천계에서 과학자며 의사 노릇은 그 양반이 다 하는디!”
“아, 설성님이 말씀하셨던 분이 그분이셨구나. 안 그래도 가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그려. 싸게 다녀오라고 혀.”
거기까지 말한 그가 볼일 끝났다는 듯 등을 돌렸다.
놀란 로미가 냉큼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뭐하는 겨! 이 똥개새끼가!”
하마터면 흘러내릴 뻔한 고쟁이를 붙든 채 백 노인이 마구 발버둥을 쳤다.
그러자 로미가 절박하게 외쳤다.
“이제 제 용건도 들어주셔야죠!”
“용건은 무슨 용건!”
“일단 앉아보시라니까요?”
“아, 알았으니께 이거 놓고 말햐!”
엉덩이골이 빼꼼 드러난 백 노인이 질색하며 소리쳤다.
고쟁이를 물어뜯을 기세로 매달리던 그녀가 그를 놓아주곤 얌전히 바닥에 앉았다.
가까스로 옷가지를 추어올린 백 노인이 흐린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용건이 뭔디.”
“그게 뭐냐면요.”
“빨리 말 안 햐?”
성미급한 그의 채근에 로미도 거두절미하고 대답했다.
“저 따움 가르쳐주떼요. 넹?”
“…….”
“히히.”
막무가내로 애교부터 부리고 보는 그녀를 가늘게 흘겨보던 백 노인이 뒷짐을 쥔 채 헛기침했다.
“어디서 또 내 명성을 듣고 찾아왔구만. 하여간 이놈의 인기는 원.”
조용히 살고 싶어도 당최 가만두질 않는다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요! 하부지가 짱이죠!”
이때다 싶어진 로미가 냉큼 백 노인을 치켜세웠지만, 그는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그래서 넌 뭘 가지고 왔는디?”
“네? 뭐를요?”
“산이는 나한테 소백주를 가져와서 부탁했는데, 넌 뭘 가지고 왔냐는 말이여.”
그런 거 없었다.
오기도 바빠 죽겠는데, 뭘 챙길 여유가 있었을 리가.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그대로 쫓겨날 것만 같아 로미는 재빨리 짱구를 굴렸다.
“음…….”
그녀의 대답이 늦어질수록 백 노인의 기대치도 함께 높아졌다.
뭐여. 뭘 가져왔는디 이렇게 뜸을 들여?
그가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채근했다.
“뭐 엄청난 거라도 가져온 게냐?”
“네! 그럼요!”
“뭔데! 얼른 꺼내봐라!”
“바로바로!”
“그려! 그려!”
“제 애교요!”
그녀가 두 발로 선 채 요리조리 엉덩이를 흔들고 재주를 넘으며 재롱을 피웠다.
백 노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내가 뭘 본거지, 하는 표정이기도 했고, 이게 다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은 간절함도 엿보였다.
궁지에 몰린 로미가 얼른 말을 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하부지가 저를 강하게 단련시켜주시면!”
“주시면?”
“제가 큰맘 먹고!”
“먹고!”
“하부지의 손녀가 되어드릴게요!”
“…….”
굳다 못해, 일그러진 백 노인이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응. 꺼져.”
.
.
.
로미가 백 노인의 승낙을 받아낸 건 온갖 잡것들을 다 바치겠다고 약속한 뒤였다.
그런데 그는 구두 계약은 영 못 믿겠다며, 직접 붓으로 계약서를 뚝딱 써왔다.
“지장 찍어라.”
“계약서에 한글이랑 영어랑 한자까지…… 이건 어느 나라 말이에요?”
“헬라어다.”
“헬라어? 그게 뭐야. 이거는요?”
“그건 스페인어잖니.”
“스페인 가본 적도 없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한글로 써주세요!”
댕청한 얼굴로 배부터 까뒤집기에 만만히 봤더니, 의외로 똑 부러진 녀석 아닌가.
“떼잉!”
혀를 찬 백 노인이 팩 고개를 돌리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한글본을 다시 적어 내왔다.
로미는 그것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아마 백 노인의 악명을 익히 들었던 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모르고 지장을 찍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어디 보자. 꼬리털 한 묶음, 수면초 열아홉 뿌리…… 엥? 열아홉? 아깐 열 뿌리랬잖아요!”
“열 뿌리 맞잖냐, 이놈아!”
“0을 왜 애매한 9처럼 적어놓으시는 거예요! 빨리 고쳐주세요!”
“떼잉! 깐깐한 녀석 같으니!”
눈 뜬 사람 코 베어 가는 게 백 노인이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녀의 항의에 그는 콩나물 뿌리처럼 슬쩍 삐져나온 선을 찍찍 그어 지우다가, 다시 써달라는 로미의 요청에 온갖 욕을 하며 그제야 제대로 된 계약서를 내어왔다.
다시 눈에 불을 켠 그녀가 꼼꼼히 계약서를 확인했다.
“근데요, 하부지.”
“또 뭐!”
“소백주는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 못 해요.”
“훔쳐라도 와.”
“그럴 순 없어요. 천계에서 어떻게 도둑질을 해요?”
그녀의 말에 백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몽마를 주인으로 섬기는 수인 주제에 쓸데없이 도덕심이 높다고 생각하니 웃기기도 하고, 다시 보이기도 해서였다.
하지만 속마음을 숨긴 채 슬쩍 떠보듯 말했다.
“별로 간절하지 않은 게로구나?”
그러자 움찔한 로미가 다급히 정정했다.
“가, 가져올게요! 가져오면 되잖아요!”
그녀는 행여 백 노인이 없던 일로 하자고 할까 봐 재빨리 앞발바닥에 먹을 적셨다. 분홍빛의 젤리에 까만 먹이 흠뻑 묻었다.
지장 찍듯 앞발을 누르자, 흰 종이에 개 발자국 하나가 선명히 찍혔다.
그렇게 어려운 계약이 성사되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거라.”
“네.”
“너는 이 길로 곧장 우국으로 가게 될 것이다.”
“우국이요?”
“그래. 정확히는 무간(無間)으로 가는 게지.”
무간은 시공이 뒤틀려 이따금씩 우국의 어딘가에서 불규칙적으로 생겨나는 이계의 틈이었다.
잘못 빠져들면 우주의 미아처럼 평생 나올 수 없었고, 그곳엔 온갖 위험한 혼종들이 도사리고 있어 제 발로 호랑이 소굴을 찾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의 3년은 인간 세상의 하루와 맞먹지. 거기서 3년만 목숨 부지하고 나오거라.”
“단기간에 실력을 키우는 방법이 그거였어요?”
“그럼 뭐 공으로 키워주는 줄 알았냐? 모든 일엔 상응하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무간이라는 말에 로미는 조금 놀란 기색이긴 했지만, 곧 별말 없이 백 노인의 안내를 따라나섰다.
제법 담담한 표정으로 저를 따르는 어린 늑대를 그가 흘끔 바라보았다.
산이 제법 기특한 수인을 곁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살아서 보자꾸나. 나올 때, 수면초랑 소백주 챙기는 거 잊지 말고.”
꼬리털 한 움큼을 선불로 받은 그가 당부했다.
“그거 안 챙겨오면 나오는 문 안 열어주시나요?”
“당연하지.”
지독한 영감 같으니.
“알겠어요.”
“그럼 살아서 보자꾸나.”
“네.”
“그런데 너 산이한테 인사는 했냐?”
“아니요. 주인님 지금 바빠서 그럴 틈이 없었어요.”
산이가 이 사실을 알았으면 안 보냈겠지.
속으로 대꾸한 그가 재차 물었다.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를 텐데, 이대로 떠나도 후회하지 않겠어?”
“어차피 여기 시간으로 하루라면서요. 금방 다녀와서 볼 건데, 마지막 인사를 왜 해요?”
이놈. 배포 보소?
그녀의 씩씩한 대답에 백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녀석. 배짱 한번 좋구나.”
“헤헤.”
“자, 그럼 이거라도 챙겨 가거라.”
그가 낡은 고쟁이 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없이 어린 것을 나락에 보내려니, 마음이 짠해 뭐라도 쥐여 보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백 노인의 마음도 모르고 로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코부터 움켜쥐었다.
“으! 냄새!”
“고약한지고!”
고약한 건 하부지 고쟁이 안이거든요?
코를 막은 채 로미가 속으로 외쳤다.
“기껏 생각해서 챙겨 보내주려고 했더니만! 확 그냥! 안 줄까 보다!”
“아이, 줬다 빼앗기가 어디 있어요!”
그녀가 애교를 부리며 사과하자, 백 노인이 못 이긴 척 주머니를 건넸다.
“근데 이게 뭐예요?”
“경단이다. 화국의 천도(天桃)와 설국의 얼음 계곡물, 우국의 개풀과 일국의 모래, 월국의 새벽이슬로 만든 거지.”
“직접 만드신 거예요?”
“그래. 총 열 개다.”
“이걸 왜?”
“위기에 처했을 때 먹어. 다친 몸이 회복되고, 기력이 곱절로 솟을 테니께.”
“……이런 거 함부로 먹어도 되나.”
바람처럼 흘러나온 그녀의 혼잣말을 귀신같이 알아들은 백 노인이 도로 주머니를 거두었다.
“먹기 싫으면 말어! 어디 도핑테스트 하러 가냐?”
“아! 아니에요!”
로미가 얼른 주머니를 빼앗듯이 받아들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하부지.”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곤 재빨리 받아 든 주머니를 제 목에 두른 수건 안쪽에 넣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넌지시 말했다.
“죽어도 네 운명이야. 그러니 원망도 말고, 미련일랑 두고 떠나거라.”
“네!”
그렇게 로미는 백 노인이 열어준 문을 통해 우국으로 향했다.
“하루 뒤엔 닫히니까, 거기 시간으로 3년을 넘기면 안 된다!”
“네! 걱정 마세요! 저 꼭 강해져서 돌아올게요!”
그렇게 로미는 무간의 블랙홀 안으로 사라졌다.
백 노인은 한동안 자리를 지키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뗐다.
이제껏 자신이 인도했던 이계의 틈에서 살아 돌아온 건 열에 하나 정도였다.
게다가 저렇게 어린 수인을 보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며 연륜을 쌓아온 백 노인은 그녀를 말려봤자, 시간만 지체할 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단단한 아이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사실 로미에게 준 경단은 개풀을 바른 보통 몽마의 눈깔사탕이었다.
기적을 일으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게 바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직접 수인을 훈련시키지 않고 최고의 훈련사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수려한 말솜씨 덕분이었다.
백 노인의 별명이 뻥 노인인 이유였다.
무엇보다 로미에게는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강한 의지와 순수한 믿음이 있지 않은가.
그는 조용히 미소를 덧그리며 그녀의 화려한 귀환을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