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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반드시 나는 (94/118)


#94. 반드시 나는
2023.03.23.



 
임의로 이계의 틈을 벌려 우국(雨國)으로 가는 길은 무간(無間)을 거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우국까지 도달할 수는 있을까?’

로미는 그런 의문을 잠시 가졌지만, 어차피 발을 들인 이상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무간은 우국의 일부 지역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으로, 시공간이 틀어지며 대기가 불안정할 때 간헐적으로 생기는 이계의 틈 속을 이르는 말이었다.

문이 열리는 지역을 포함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

유일하게 천인이 아닌 다른 존재들이 드나드는 곳.

잘못 갇혔다가는 영영 뒤틀린 시공간에 삼켜져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무서운 곳.

마치 우주의 블랙홀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무간의 문(門)을 임의로 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백 노인.

그는 일리와 모아가 인간 세상에 숨어 살다가 이사오(245)를 피해 우국으로 도망쳐 산을 출산했을 때 길을 터준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종종 극한의 훈련을 통해 강한 힘을 얻고자 하는 수인에게 대가를 받고 그 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10분의 1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백 노인은 물론,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무간으로 연결된 길은 어둡고 고요했다.

이름 대로 오직 적막만이 가득 찬 무(無)의 세계였다.

백 노인이 만들어준 문이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로미는 입구이자 유일한 출구인 문을 등진 채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돌아봤다가는 애써 굳게 먹었던 마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릴까 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반드시 돌아가 산의 곁을 충실히 지켜내야겠다는 생각뿐.

그러려면 적어도 신휘나 제인을 상대로 맞설 수 있을 만큼은 힘을 키워야 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그렇게 되뇌던 그녀는 점점 온몸을 누르는 이상 기압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길 반복했다.

늪에 빠진 것처럼 발밑이 질척하게 꺼지는 듯한 기분.

산소가 점점 줄어드는 기분이었고, 환영인지, 환청인지 모를 것들이 보이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끼잉…….”

폐를 압박해오는 어마어마한 기압에 로미의 네 발이 땅에 붙고 몸이 납작 엎드려졌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무간인가? 내가 지금 무간에 발을 들인 거야?’

신음하며 간신히 한 발을 떼는데.

쿠구구!


“어어어!”

발밑이 그만 훅 꺼지고 말았다.


“꺄아아아아아……!”

로미는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중력을 느끼며 허공에서 마구 발버둥 쳤다.

퍽! 터엉! 쿠당탕탕!


“억! 아악! 끄아!”

가파른 산비탈에서 굴러떨어지듯 이리저리 몸을 부딪친 그녀가 재빨리 일어나 자세를 낮추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하악, 하악……!”

어디를 어떻게 부딪쳤는지 모르겠지만, 긴장감 때문에 고통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기민하게 감각을 세운 로미의 귀가 쫑긋거렸다.

순간 공간이 꿀렁이더니, 이계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석간(石間)으로 추정되는 잿빛의 건물이 보였다.


‘우국이다!’

우국이 이렇게 반가운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로미는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불식간에 열렸다가 닫히는 이계의 틈이 맞붙기 직전, 그 사이로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흐아앗!”

쾅!

간발의 차로 틈을 빠져나온 그녀의 꼬리털 일부가 날카로운 칼에 베인 듯 잘려 나갔다.

아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주, 죽을 뻔했네.”

1초만 늦게 나왔다면 하반신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로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종일 비가 내리는 잿빛의 땅은 그녀가 태어나기도 했던 곳이다.

그러니 고향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곳이었지만,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버려진 혼종이나 온갖 괴수들이 출몰하는 곳.

혼혈 수인으로 태어나 죽지 않기 위해, 먼저 죽여야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어릴 적. 산에게 구조 당하기 전의 끔찍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던 이곳에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3년만 버티자.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나가면 돼.”

나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거니까!

그렇게 되뇐 로미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쿠구궁-

작은 돌멩이들이 진동하는 바닥에서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엄청난 괴성이 온 땅을 뒤흔들었다.


「크아아아아아!」

“아악!”

갑자기 튀어나온 괴수의 공격에 당한 그녀의 작은 몸이 저 멀리 날아가 암벽에 부딪혔다.

쿠당탕!

깨갱! 깨개갱!

옆구리가 관통된 것만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던 로미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흐려진 시야에 고개를 마구 젓다가 다시 눈을 떠보니, 눈앞에 사자의 머리에 양의 뿔을 단 괴수 하나가 서 있었다.

크르르르.

으르렁대는 놈에게 맞서 그녀도 자세를 낮추고 공격할 준비를 취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우국에 오자마자 저를 격하게 환영해주는 괴수가 썩 반갑지는 않았지만, 로미는 최선을 다해 마음을 다잡았다.

눈앞의 괴수는 그녀가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이었다.

로미는 주머니 안쪽에 넣어둔 경단 하나를 꺼내 얼른 삼켰다.


‘열 개뿐이지만, 시작이 반이랬으니까 지금 먹는 게 맞아!’

그런 생각을 하며 거의 씹지도 않은 경단을 꿀꺽 삼켰다.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몸에 좋다고 하니 당연히 입에 쓰겠거니 했는데, 향도, 맛도 너무나 취향 저격인 게 아닌가!


‘조, 존맛탱!’

백 노인에게 들은 경단의 효험이 떠올랐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용기와 힘이 솟아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개들이 죽고 못 산다는 개풀이 사탕 겉에 발라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그녀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돌아가면 백 노인에게 경단을 더 만들어달라고 해 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로미가 잇몸을 드러냈다.

으르르릉!

몸을 낮추고 서로를 탐색하던 둘이 동시에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크아앙!”

짐승의 포효가 우국의 허공을 천둥처럼 갈랐다.

* * *

인간 세상에도 평화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결계가 모두 사라진 인간 세상은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상태였다.

작게 꼼지락대던 강이 반쯤 눈을 뜨며 저를 안고 잠든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척을 느낀 그도 눈을 떴다.


“잘 잤어?”

“응. 넌 좀 어때?”

“다 나은 거 같아.”

“거짓말.”

“정말로.”

산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이마를 맞댔다.

지난밤에 먹어 치운 악몽이 너무 훌륭했던 탓에 정말 몸에 남아있던 독이 모두 빠진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컨디션이 좋았다.

하지만 설성의 말에 의하면 수면초의 독은 해독제를 먹기 전까지는 몽마의 몸을 숙주 삼아 깊이 뿌리를 내린 채 영양분을 흡수한다고 했다.

이 순간에도 독초의 뿌리가 산의 몸에 뿌리를 박고, 열심히 그의 기력을 빨아대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건 곧 언제 갑자기 졸도할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물끄러미 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끔찍한 악몽을 꾼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한 모습이었다.

꿈에 대한 기억을 지운 만큼 당연한 거였지만, 오열하던 그녀의 얼굴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산에게도 아픈 기억이었다.


“나 어제 무슨 꿈 꿨어?”

강이 묻는 말에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그냥.”

“…….”

“지독한 꿈.”

뒤늦게 고르고 고른 대답이었다.

구체적으로 꿈의 내용을 이야기하길 꺼리는 것 같아, 그녀도 더 묻지 않았다.


“맛있었어?”

대신 살짝 돌려 물은 말에 산이 바람 같은 웃음을 흘렸다.


“너는 언제나 맛있어.”

이제는 익숙해진 대답에 강도 따라 웃고 말았다.

어쨌든 그가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고, 그것이 산에게 일말의 도움이라도 됐다면 그만이었다.

강은 그의 허리에 팔을 끼워 넣으며 그의 가슴에 이마를 묻었다.

그러고는 속삭이듯 물었다.


“오늘 일정도 없는데, 종일 이렇게 붙어 있을까?”

그녀의 말에 산이 대답했다.


“기록 세우겠는데?”

“무슨 기록?”

그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강은 살짝 뺨을 붉혔지만, 곧 뻔뻔한 척 대꾸했다.


“기록 한번 세워보지 뭐.”

“오.”

“우리 둘 다 돌도 씹어먹을 나이잖아?”

그렇게 대꾸한 그녀는 문득 내내 궁금했던 걸 물었다.


“있잖아. 나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전부터 궁금했거든?”

“뭐가?”

“몽마도 인간이랑 똑같이 나이를 먹어?”

“아니. 내가 알기론 나만 그래.”

“너만?”

“응. 내가 좀 별종이잖아. 전례 없는 혼혈인데다가 인간 세상에서 자랐으니까.”

몽마는 대게 태어난 순서대로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들의 몸에 숫자가 바로 그들의 진짜 이름이었고, 권력의 크기는 숫자가 작을수록 크다.

현존하는 몽마들 중 가장 작은 수를 가진 몽마는 현왕인 이사오(245)였고, 선대왕은 산의 부친인 이일리(212)였다.

그리고 그중 누군가가 소멸하면 힘의 차이에 따라 다른 몽마가 그 숫자를 부여받기도 한다.

인간과 달리 생김새로 그들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이유였다.

강은 그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며 침대 속에서 늑장을 부렸다.

이런 여유 얼마 만인지.

아니, 이 정도로 여유를 부려본 건 거의 처음일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마지막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파도처럼 강의 뇌리를 급습했지만,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더 궁금한 건 없어?”

궁금한 게 왜 없겠나.

밤새 물어도 부족할 만큼 산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았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녀는 그중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혼자가 된 그가 만만치 않은 인간 세상에서 홀로서기를 할 때쯤의 이야기를.


“인간 세상엔 16살에 내려온 거야? 어떻게 살아왔어?”

강의 물음에 산이 골몰하다 덤덤히 대꾸했다.


“그땐 그냥 사는 게 중요했으니까, 닥치는 대로 악몽만 찾아다녔지.”

“어른이 돼서는?”

“1인 회사를 차렸어.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났으니까, 먹고 살기에 그만한 직업이 없었거든.”

“그때도 아무 악몽이나 먹으면서 연명했던 거야?”

“그땐 의뢰인의 악몽을 주로 먹었지. 그들의 불안은 꽤 좋은 악몽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줬으니까.”

“그럼…….”

그녀는 무언가를 물으려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입술을 한번 물었다 뺀 강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의뢰인 중에 여자도 있었겠네?”

질문의 의도를 바로 파악하지 못한 산이 뒤늦게 대답했다.


“있었지?”

“능력 좋고, 예쁜 여자들도 많았겠다.”

“…….”

아아.

난 또 뭐라고.

산이 뒤늦게 조금 웃었다.

간지러운 바람이 이마에 떨어지자 당황한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고 변명했다.


“아니, 내 말뜻은…….”

“너만큼 능력 좋고 예쁜 여자는 없었어.”

“…….”

“아니. 예쁘다고 생각했던 여자는 그냥 네가 처음이었어.”

“정말?”

“정말. 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무의식까지 완벽하거든.”

그의 대답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던 그녀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들려고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산이 물었다.


“그럼 너는?”

“나, 뭐?”

“연예계 있었잖아. 주변에 잘난 남자들 많지 않았어?”

“날고 기는 애들 정말 많았지. 근데.”

“…….”

입 옆에 손을 가져다 댄 그녀가 비밀이라도 전하듯 그에게 귓속말했다.


“자고 싶은 남자는 네가 처음이었어.”

수면초의 기운 때문에 내내 반쯤 풀려있던 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더니 정확히 3초 후, 웃음이 터졌다.

한참 웃던 그가 턱을 괸 채 강을 내려다봤다.


“지금도 그래?”

“뭐가?”

“지금도 나 보면 그런 생각 드냐고.”

“…….”

“나는 너 볼 때마다 그러거든. 당연히 안 보일 때도 그렇고.”

그 말에 강의 손끝이 그의 척추를 따라 내려가다가 슬쩍 장골에 걸려있던 바지 안, 허리춤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사인을 확실히 해석한 산이 그대로 고개를 내려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그때 강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아. 어떤 눈치 없는 인간이.”

그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일그러졌다.


“그러게. 어떤 눈치 없는 인간일까?”

강이 달래듯 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손을 뻗었다.

베개 주변을 더듬자 휴대폰의 모서리가 손끝에 걸렸다.


“어……?”

흐린 눈으로 액정을 바라보던 그녀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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