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진짜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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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진짜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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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진짜 목적
2023.03.26.
“아. 어떤 눈치 없는 인간이.”
산이 일그러진 얼굴을 덮으며 탄식했다.
한참 분위기 좋았는데, 눈치 없는 휴대폰이 산통을 깨버린 탓이다.
“그러게. 어떤 눈치 없는 인간일까?”
강은 유연하게 그를 달래며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문자를 던진 장본인은 다름 아닌 황 대표였다.
하지만 텍스트에 담긴 소식만큼은 무척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누군데 그래?”
산이 묻자 그녀가 스프링처럼 상체를 세우며 외쳤다.
“삼영 오빠 퇴원했대!”
반가운 마음에 금세 얼굴이 밝아진 강은 곧장 침대를 벗어나 외출 준비를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은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가.”
“나와도 돼?”
“너 혼자 보낼 순 없으니까.”
“…….”
“대신 나는 따로 움직일 거야. 삼영이 형이 혹시 물어보면 나는 집에 있다고 이야기해.”
셔츠에 주섬주섬 팔을 끼워 넣으며 하는 말에 강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왜?”
그에 산은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그냥.”
“…….”
“확인하고 싶은 게 좀 있어서.”
지금은 그렇게 대답하는 게 최선이었다.
제가 하고 있는 온갖 의심과 걱정을 그대로 털어놔봤자, 그녀의 고민만 깊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강은 그런 그의 말과 행동이 어딘가 의미심장하다고 느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건 산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걸 테니까.
상념은 나중이고, 우선은 삼영을 만나는 게 우선이었다.
“로미 붙여줄 테니까, 데리고 가. 나는 멀리서 따라갈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녀의 곁을 비워둬선 안 됐다.
강이 순순히 끄덕였고,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서늘하게 날아든 바람이 산의 머리카락과 셔츠를 훑으며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가 휘파람을 불어 로미를 호출했다.
휘이이-
“…….”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
감각을 기민하게 세워 로미의 기척을 느껴보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길함을 느낀 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곁에 있던 강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채고는 서둘러 다가왔다.
“왜 그래? 로미한테 무슨 일 생긴 거야?”
그리고 그 순간.
우우우웅-
손에 쥐고 있던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황 대표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물끄러미 액정을 바라보던 강이 산과 짧게 눈을 맞추고는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 어, 강아. 너 지금 삼영이한테 가려던 중이지?
순간 이 인간이 어디 CCTV라도 달아났나 싶었지만, 삼영의 퇴원 소식을 듣고 그녀가 바로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황 대표 역시 둘의 돈독한 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 안 그래도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에요.”
목소리를 가다듬고 건넨 말에 그가 단호히 말했다.
- 혼자는 안 돼.
“괜찮아요. 먼 거리도 아니고, 오토바이 타고 금방 다녀오면 돼요.”
산과 로미가 함께 갈 거라는 얘기는 할 수 없어서, 강은 대충 둘러댔다.
하지만 그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요란을 떨어댔다.
- 얘가 큰일 날 소리! 오토바이가 얼마나 위험한데! 너 요즘에도 오토바이 타고 다녀?
황 대표는 그녀가 무어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서둘러 말을 이었다.
- 그러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내가 사람 하나 보냈거든? 아마 곧 도착할 거야.
“사람 누구요?”
- 있어. 이번에 새로 뽑은 매니저인데, 당분간은 삼영이 대신 너랑 같이 움직일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저 오빠 낫기 전까지는……!”
그때였다.
딩동- 딩동-
초인종이 울렸고, 산과 강의 고개가 동시에 현관으로 향했다.
- 이야. 벌써 갔나 보다. 아무튼 당분간만 좀 친하게 지내. 응?
“아니…….”
- 인상이 좀 세긴 한데, 사람은 좋아 보이더라. 원래 나처럼 인상 더러운 사람들이 알고 보면 속은 순두부인 거 너도 알지? 사람 겉만 보고 판단하면 못 써요.
순두부는 무슨. 취두부겠지.
게다가 뭐? 사람은 좋아 보인다고?
황 대표의 입에서 좀처럼 나올 것 같지 않은 말에 그녀는 귀를 의심했다.
웬일이지?
인건비 나가는 거 아까워서 어지간해선 직원들 새로 안 들이는 게 황 대표인 데다가, 새로 뽑는 매니저의 얼굴을 일일이 들여다보고 확인할 만큼 인사에 관심이 있는 이도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새로 들어온 직원이 얼마나 뼈를 갈아 일할 준비가 되었으며, 얼마나 싼 값에 고용하느냐 뿐이었다.
그사이. 전화는 끊겨 있었고, 산은 강의 손을 잡고 함께 월패드로 다가갔다.
여러모로 낯선 이의 등장은 반갑지 않은 시기라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그런데 액정에 비친 익숙한 인물을 확인한 순간.
“어?”
“…….”
강과 산의 눈이 동시에 크게 뜨였다.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설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천인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굳이 초인종까지 누르고 등장할 이유가 무엇일까.
약 3초 정도 굳어 있던 강은 방금 황 대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있어. 이번에 새로 뽑은 매니저인데, 당분간은 삼영이 대신 너랑 같이 움직일 거야.
……설마?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금빛 수가 놓인 흰 제복이 아니라 청바지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그리고 혹시나 했던 예상은,
“맞아. 내가 네 새 매니저야.”
그대로 적중했다.
상상도 못 했던 설성의 등장에 산도 제법 놀란 눈치였지만, 그는 곧 특유의 여유로움을 되찾은 얼굴로 물었다.
“황 대표는 어떻게 설득하셨어요?”
산이 턱을 괸 채 중지로 제 입술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설마 천인들도 최면 같은 거 쓰나?”
그에 설성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몽마가 할 수 있는 건 천인들도 대부분 해.”
“오. 그래요?”
“그럼. 가령 결계를 친다든지, 약간의 호감을 얻기 위한 최면술을 쓴다든지, 꿈에 관여한다든지 하는, 뭐 그런 거?”
산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꽤 거창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의 재치있는 반응이 나쁘지 않아 그도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따지면 몽마와 천인은 정말 한 끗 차이네요.”
“…….”
“어쩌면 뿌리가 같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이 농담을 해미가 들었다면 노발대발하며 당장이라도 산을 죽이려 들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설성은 상냥히 웃어주었다.
그가 하는 이야기들이 꽤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는 게 좋겠구나.”
그녀는 이만 이동하자며 먼저 움직였다.
“내 얼굴은 이미 몽마들에게도 알려졌으니, 내가 네 곁에 있는 한 함부로 접근하려 들진 않을 게다.”
그렇게 말한 설성의 시선이 산에게 향했다.
“그러니 너도 안심하거라. 네 빈자리는 내가 든든히 메우고 있으마.”
그러자 그가 바로 반문했다.
“수장님은 오늘 자정에 저랑 천계에 가시기로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인간 세상에 내려와 있는 둘 중 하나는 너를 인도하고, 하나는 이 아이를 보호해야 할 텐데.”
“…….”
“우국의 수장님은 여러모로 인간 행세를 하기가 쉽지 않아 보여 역할을 바꾸기로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산의 얼굴이 눈에 띌 만큼 희게 질렸다.
“그 말씀은…….”
“오늘 밤 너와 천계에 동행할 인도자는 해미 님이 될 것이야.”
“싫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일갈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싫다니?”
“싫습니다. 그분이랑은 눈도 마주치기도 싫고, 옷깃도 스치기 싫습니다.”
“네가 지금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닐 것인데?”
“찬밥도 찬밥 나름이죠.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먹었다가 크게 탈 난 적이 있어서 싫습니다.”
해미와 연관된 건 떠올리기만 해도 싫다는 듯 진저리를 치는 그를 보며 설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내가 너와 동행하고, 해미님께 이 아이를 맡겨도 되겠느냐?”
그녀가 강을 가리키며 한 말에 산은 얼굴은 이제 굳다 못해 서늘해져 버렸다.
“강이 옆엔 로미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제 동행은 애초에 말씀하신 대로 수장님이 해주시죠.”
그의 입에서 로미 이야기가 나오자, 설성이 한쪽 눈매를 살짝 찌푸렸다.
그러더니 난감하다는 듯 혀를 차며 혼잣말했다.
허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이를 어쩔꼬……?
그녀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그를 이상하게 여긴 산이 바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 녀석이 네게 인사도 없이 떠났나 보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곁에 있던 강도 설성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끼어들었다.
“수장님은 혹시 뭔가 알고 계신 게 있으신가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산의 말에 로미를 걱정하고 있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설성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조용히 로미의 소식을 전했다.
“그 애는 지금 무간에 있어.”
“…….”
“살아 있든, 죽어 시체가 되었든 우국에 있거나 이계의 틈에 있겠지.”
산의 얼굴에 표정이 점점 사라져갔다.
“로미가 왜 거기에 있습니까?”
“왜 있겠느냐.”
“…….”
“너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지려고 갔겠지.”
설성은 이따금씩 수인이나 몽마들이 일부러 이계의 틈을 벌리고 들어가 그곳에서 수련을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시도 때도 없이 벌어졌다 닫히는 무간에 떨어졌다가 다시 우국으로 튀어나오길 반복하며, 인간 세상의 시간으로 하루.
그리고 무간과 무간이 열리는 우국 일부 지역의 시간으로 3년의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거라는 소식도 함께.
그 말뜻은 로미가 살아 있든, 죽었든 지금 그녀가 체감하고 있는 시간은 이미 1년에서 2년 사이 정도가 되었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 애의 충성심이야 네가 더 잘 알 것이니, 왜 그 애가 네게 인사도 없이 떠난 건지도 역시 잘 알 것이다.”
당연히 안다.
로미는,
“…….”
반드시 돌아오기 위해 떠났을 것이다.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건, 그에 대한 그녀 나름의 결심이었을 거라는 것도.
“그러니 너 역시 동행자가 누구인지를 따질 때가 아니다.”
“…….”
“네가 해야 할 일은 한시라도 빨리 해독을 하고 돌아와 그 애의 생사를 확인하는 거야.”
.
.
.
강은 설성이 모는 차를 타고 삼영의 집으로 향했다.
서둘러 나오기는 했지만, 그녀는 내내 산의 마지막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로미가 걱정되는 건 강도 마찬가지였다.
새삼 그녀에게 살갑게 대해주지 못했던 첫 만남과 내내 거리를 두었던 게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하아…….”
강은 두 손을 모으며 이마를 묻었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로미를 보호해달라고.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차는 빠르게 달려 삼영이 사는 동네의 입구에 도착했다.
“차 세울 만한 곳을 찾아볼 테니, 만나고 오거라.”
“네.”
“근처에서 쭉 지켜보고 있을 테니, 염려 말고.”
“…….”
설성의 말에 강은 내리려다 말고,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강이 잠잠한 목소리를 흘렸다.
“수장님.”
“음?”
“여쭤볼 게 있어요.”
“뭐지?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천인들의 목적은.”
“…….”
“사실 융합혼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