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 모든 걸 알게 되더라도 (97/118)


#97. 모든 걸 알게 되더라도
2023.04.02.



 


“무간으로 향하는 문은 어디에 만들어두셨습니까?”

산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백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왜, 이놈아. 가서 잡아 오기라도 하게?”

“데리고 와야죠.”

“아서라. 죽었으면 벌써 죽었을 게다.”

“…….”

그저 추측일 텐데, 하필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게 백 노인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의 성격상 분명 공짜로 이계의 틈을 열어주진 않았을 테고, 로미가 가진 것 중에 백 노인이 탐낼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그라면 분명, 석간이나 우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오는 대가로 이계의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애초에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녀석을 들여보내주진 않았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백 노인이 저리도 쉽게 로미의 죽음을 언급한 상황이니, 이걸 어떻게 흘려들을 수가 있나.

산은 발끝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씀이긴.”

“로미의 안부에 관해 뭔가를…… 알고 계십니까?”

침묵이 길어지는 만큼 산의 심장도 빠르게 격동하기 시작했다.


“어서 대답해요!”

“이, 이눔이?!”

흥분한 그의 모습이 꽤 위협적이었던 탓에 백 노인은 안 그래도 좁은 어깨를 잔뜩 옹송그렸다.

하지만 목청만큼은 기차를 삶아 먹은 것처럼 컸다.


“그만큼 살아 돌아오기 힘든 곳이니까 그러지! 겪어본 놈이 그것도 몰라? 몰랐다 쳐도, 내가 그 쪼그만 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뭔 수로 알아?! 미쳤다고 내가 무간에 들어가서 확인이라도 하고 오랴?”

나 같은 쭈구렁방탱이는 괴수가 휘두르는 발톱 한 번에 나가떨어질 게 분명하다며, 그가 역정을 냈다.

뒤늦게 그게 백 노인의 기우였다는 걸 안 산이 다리가 풀린 듯 휘청였다.

그걸 본 그가 쯧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떠났는데, 네가 그 애 마음을 이리도 몰라줘서야 되겠냐?”

“아직 어린 수인입니다. 영감님이라도 말려주셨어야죠.”

“말린다고 들을 놈이긴 하고?”

“…….”

“쯧쯧. 나한테 이래봤자 소용없으니까, 지랄 그만 떨고 집에 가서 얌전히 기다려라.”

비록 어린 수인이었지만, 기백만 봐서는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무간은 그만큼 무서운 곳이었고, 믿음과 신뢰는 어쨌든 둘 사이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낯선 기척을 느낀 백 노인의 귀가 쫑긋거렸다.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검은 숲을 향해 눈을 흘기던 그는 곧 짜증스럽다는 듯 혼잣말을 이었다.


“귀찮게스리…… 올 거면 혼자 올 것이지. 뭘 또 주렁주렁 달고 왔어?”

“……?”

“너 때문에 또 이사 가게 생겼잖아!”

버럭 소리를 지른 백 노인이 후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다 쓰러져가는 집에 들어가 냉큼 보자기 하나만 챙겨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영감님! 잠시만요! 영감님!”

“부르지 마, 이놈아!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저런 걸 달고 와?!”

산의 부름에도 그는 알 수 없는 말만 남긴 채 집도 내던지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버린 후였다.

뒤늦게 수상한 기척을 느낀 산이 뒤를 돌았다.

붉고 푸르게 빛나기 시작한 안광이 어둑하게 우거진 나무 사이 어딘가를 향했다.

기척이 읽혔다는 걸 순순히 받아들인 상대방이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

정체를 확인한 산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구부정한 등과 어깨를 하고도 산이 올려다봐야 할 만큼 키가 큰 남자.

검은 생머리와 하얀 제복 때문에 영락없는 처녀 귀신처럼 보이는 이의 정체는 바로 해미였다.


“자주 보는구먼.”

“…….”

“언짢게도.”

언제나 그랬듯 시큰둥한 눈빛과 말투로 그가 말했다.


“언제부터 미행했습니까?”

산이 묻자 해미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미행은 무슨. 대놓고 따라붙는데도 네가 기척 하나 눈치채지 못한 게지.”

“…….”

“그래서 싸움은 고사하고, 목숨이나 연명하겠나?”

그가 비아냥대는 말에 산의 한쪽 눈매가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자주 부딪쳐 언짢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때에 그의 심기를 거슬러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백 노인이 아무리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봤자,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테고, 여차하면 그를 붙잡아다가 억지로 이계의 틈을 벌린 죄를 캐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문을 없애라 명이라도 하는 날엔 로미는 꼼짝없이 그곳에 갇히고 말 것이다.

산은 절대적으로 그녀가 살아 있음을 믿었다. 아니, 믿어야 했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해미의 관심을 돌려,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천계에 다녀오는 일뿐이었다.


“이만 가시죠.”

산이 먼저 앞장서 자리를 떠버렸고, 해미는 건방진 놈이라며 욕을 지껄이고는 거슬리던 백 노인의 낡은 집을 감흥 없이 쳐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쏘아진 금빛 번개가 순식간에 집을 불살라버렸다.

멀리서 그 광경을 훔쳐보던 백 노인이 소리 없이 기함했다.


‘아이고 내 집!’

급하게 나오느라 못 챙겨 나온 게 한 바구니였는데!


‘저 썩을 놈! 우라질 놈! 똥물에 튀겨 죽일 노오옴!’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어대던 그가 타 틀어가는 집을 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
.
.

산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최대한의 속도로 백 노인이 사는 산을 벗어나고 있었다.

해미와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의 집에 거의 다 와 갈 때쯤.


「산아!」

제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름의 문이 발동하자 산은 곧장 근처에 있던 그림자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의 몸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렇게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때, 강은 그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처럼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온 산을 보고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산아!”

그러더니 달려가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말도 없이 어디 갔었어…… 연락도 안 되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산이 강의 머리를 감싸며 사과했다.


“영감님 좀 만나고 왔어.”

더 말하지 않아도 그가 로미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더 묻지 않았다.

홀로 돌아온 산의 곁 어디에도 로미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잘못된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강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로미 꼭 돌아올 거야.”

“…….”

“그러니까 믿고 기다려보자.”

할 수 있는 게 그뿐이라 그랬다.


“형은 잘 만나고 왔어? 좀 어때?”

“눈 밑이 퀭하긴 한데, 아주 나쁜 정도는 아니야.”

“그래?”

“응.”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혹시 삼영에 관해 더 할 말은 없는지 물으려다 말을 삼켰다.

지금 상황에서 쉽게 물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자신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야기였다면 아마 산이 먼저 말해줬을 거라고 믿었다.

강은 뒤늦게 주린 배를 움켜쥐며 말을 돌렸다.


“배고프다. 밥 먹을래?”

물론 그의 허기는 인간의 음식으로 채워질 게 아니었지만, 이러다간 주변 사람을 챙기기도 전에 제가 먼저 쓰러질 판이었다.


“근처에 파스타랑 스테이크 배달해주는 곳 생겼거든. 맛집이래.”

나부터 든든히 잘 먹어야지.

그냥 그런 마음이었다.

텅 빈 냉장고를 괜히 열었다 닫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산이 대답했다.


“그래. 같이 밥 먹자.”

“응. 내가 시킬게.”

강은 곧바로 배달 앱을 켜 평소라면 절대 시키지 않았을 양의 음식을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음식이 식탁 위에 푸짐하게 차려졌다.

그런데 막상 차려진 음식들을 보니, 마지막 만찬 풍경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쓸데없는 상념을 밀어낸 그녀는 아까 오는 길에 보았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있잖아.”

강은 산의 접시에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덜어주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오는 길에 교통사고 난 현장을 봤는데, 들것에 실려 가던 사람 팔에서 불씨가 붙은 숫자를 봤어.”

“뭐?”

인간의 눈에 보일 리가 없는 거라, 그도 꽤 놀란 듯 되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것 아닌 걸 얘기하듯 말을 이었다.


“설성님이 그러는데, 아마 혼의 융합이 가까워졌다는 증거일 거래.”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리는.

나쁘게 말하면 악몽. 좋게 말해 꿈같은 현실.


“어쨌든 좋은 거 아닐까?”

“…….”

“너도 내내 기다려왔던 일이잖아.”

강이 눈을 맞춘 채 미소 지었다.

이제까지 들은 바로는 제 몸 안에서 융합을 마친 혼을 산이 천계로 인도하면, 천계에서는 그 혼을 천계의 만물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니 그날이 올 때까지 천인들은 융합혼의 안전한 인도를 위해, 산을 보호하고, 인간이자 ‘그릇’인 저를 보호해줄 것이다.


“천인들이 네게 줬던 일을 완수하고 나면, 너도 조금은 편안해지는 거지?”

여전히 몽마와는 척을 진 채 살겠지만, 협상을 마친 천인들은 그의 아군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해 물은 말이었다.

하지만 산은 선뜻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질문 하나를 던질 뿐이었다.


“너는 어때?”

“뭐가?”

“융합혼이 네 몸에서 빠져나가면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고 살아갈 거고, 나는 더 이상 너한테서 악몽을 취할 수 없게 될 텐데. 그래도 좋아?”

“음…….”

말끝을 늘이던 강이 곧 대답했다.


“너한테 좋은 꿈을 줄 수 없게 된 건 조금 아쉽지만, 그거 말고는 좋아.”

“조금?”

“아. 너한텐 조금이 아닌가?”

“네 꿈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면, 너도 내 심정 이해할걸.”

“어머나, 그거 유감이네.”

그렇다고 달리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겠냐며 웃는 그녀를 보고 산이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게 다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강은 결국 속내를 실토했다.


“실은.”

그녀는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얹은 채 푸념하듯 말을 이었다.


“나도 네가 다른 꿈 먹으러 찾아다니는 거 별로야.”

“…….”

“예쁜 여자 꿈이라도 먹는 날엔 괜히 질투할 거 같거든.”

위험한 것만 빼면 지금이 가장 행복한 걸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강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웃는 그녀의 모습이 예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인간들은 참 신기해.”

“뭐가?”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일단 너만 보더라도…….”

“…….”

“별것도 아닌 거에 행복을 느끼니까.”

그러자 강이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평범한 게 제일 힘든 거야.”

“…….”

“남한테는 별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나한테는 그 모든 게 너무 특별했거든.”

그렇게 말한 그녀는 다시 즐겁게 식사를 시작했다.

산도 더 이상 그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가는 만큼, 웃을 일이 줄어들 뿐.

그가 잔에 조금 담겨 있던 붉은 와인 한 모금을 삼켰다.

하지만 쌉쌀한 술을 넘겨봐도 목에 걸린 말은 쉽게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강아.

모든 걸 다 알게 돼도…… 너는 날 향해 웃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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