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 인 앤 아웃 (98/118)


#98. 인 앤 아웃
2023.04.06.



 
먹는다고 먹었는데도 음식이 반이나 남아버렸다.


“배불러. 더는 못 먹겠어.”

강이 나오지도 않은 배를 쓰다듬으며 하는 말에 산이 조용히 웃었다.


“소화 좀 시켜. 내가 뒷정리할게.”

“아니야. 움직여야 소화되지.”

그녀가 일어서는 그를 따라 움직였다.

정리를 마쳤을 때, 창밖의 해는 서녘으로 기울어 하늘을 오묘한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강은 물끄러미 그 풍경을 바라보며 새삼 달라진 자신을 마주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던 제 과거가 얼마나 팍팍했는지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산은 늘 땅만 보고 걷던 제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고 알려준 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의 행복 지수는 지금이 정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보고 있어?”

마른하늘에 무지개라도 떴나 싶어 그가 다가와 물었다.

강은 제 허리를 감아오는 두 손을 잡은 뒤, 마음 편히 산의 가슴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그냥. 하늘이 너무 예뻐서.”

“…….”

“일상의 모든 순간이 아름답고, 슬픈 기분이야.”

“왜 슬픈데?”

“음. 너무 빨리 지나가는 거 같아서?”

고개를 돌린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조금 웃었다.

산은 그런 강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내려 살짝 입 맞추었다.

촉.

달콤한 소리가 번졌다.

고요히 눈을 감았다 뜬 그녀가 말했다.


“나 목욕할 건데.”

“…….”

“같이할래?”

그러자 그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들어가면 나오기 싫어질 거 같은데.”

“그럼 안 할 거야?”

“아니.”

이마를 맞댄 산이 조이듯 강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뭐 그런 서운한 얘기를 해.”

스칠 듯 가까이 있던 입술이 맞닿았다.

손을 뻗은 그가 결계를 펼쳤다.

이 순간만큼은 천인이든 몽마든,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은 입욕제를 챙겨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목욕하는 걸 좋아해 특별히 신경 쓴 곳이 바로 욕실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고도 넉넉한 크기의 조적 욕조는 그녀가 가장 아끼는 공간 중 하나였다.

따뜻한 물에 입욕제를 풀자 금세 풍성한 거품이 생겨났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물이 넘칠 듯 차올랐다.

창밖의 풍경은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강은 산에게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부드럽고 미끄러운 피부의 감촉과 기분 좋은 향에 심신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향기 너무 좋지?”

그녀가 묻자 그가 목덜미에 코를 묻으며 대답했다.


“어. 맛있는 냄새 나.”

못 말려. 그놈의 맛있는 냄새.

간지러움에 어깨를 움츠린 강이 키들거렸다.


 
같이 웃던 산이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지분대며 속삭였다.


“긴장 풀어. 마사지해줄게.”

그러고는 한 팔로 그녀를 끌어안은 채 종아리부터 주무르기 시작했다.

적당히 조였다 풀어지는 압에 절로 탄성이 흘렀다.


“아, 너무 좋다.”

“졸리면 얘기해. 침대로 옮겨줄 테니까.”

“으응.”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몸이 풀어지니 자꾸만 눈이 감겼다.

무릎이 꺾이는 부분을 지나 허벅지 뒤쪽을 가볍게 주무르던 그가 까무룩 잠들기 직전인 강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번쩍 눈을 떴다.

산이 조금 웃으며 물었다.


“나갈래?”

“아니……. 조금만 더 있다가.”

강은 아쉬운 마음에 그렇게 대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을 나와야 했다.

그의 손길에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묘한 흥분감에 긴장감마저 맴돈 상태로, 두 사람은 침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부드럽게 풀어진 근육과 매끄러워진 살갗이 달콤했다.

둘은 살에 남아 있는 입욕제의 잔향까지 모조리 먹어 치울 것처럼 오래도록 집요하게 서로를 탐했다.

붉게 물든 노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까마득한 밤이 올 때까지.

두 사람은 몇 번이나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격정 끝에 서로가 아니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절정을 맞이했다.

이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
.
.

기절하듯 잠이 든 강의 몸에서 희미한 보랏빛의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한쪽 팔을 세워 턱을 괸 채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희미해졌군.’

일정하진 않았지만 근래 이따금씩 그녀의 악몽이 흐려지는 밤이 있었다.

그것은 곧 강의 행복 지수와도 연결이 됐다.

악몽을 꾸더라도 잠이 드는 순간이 그만큼 편안해졌다는 뜻이었고, 반대로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의 크기가 현저히 줄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기운이 흐린 건 악몽이 시작될 때쯤의 찰나에 불과했고, 요즘 강의 악몽은 절정에 달할 만큼 강한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산이 느른하게 고개를 꺾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저렇게들 달려들지.”

어제보다 더 많은 양의 몽마들이 검은 구름처럼 몰려들어 하늘을 새까맣게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처치하는 것은 여전히 천인들의 몫이었다.

빠르게 진을 치고 나타난 해미가 허공에서 고개를 기울였다.


“거참. 기분 묘하네.”

어제까지만 해도 간만에 몽마들을 마음껏 사냥하는 기분이었는데, 오늘은 그저 성을 지키는 보초병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힐끔 고개를 내려 환히 열린 발코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침실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우연인지 뭔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바지 하나만 걸친 채 걸어 나오는 산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그가 묘하게 웃고 있는 것만 같은 것도 기분 탓일까?

미간이 일그러진 해미를 잠시 바라보던 산이 곧 발코니 문을 닫고 들어간 뒤, 커튼을 쳐버렸다.

애초에 둘 사이가 어느 정도 가까워질 거라는 건 천계에서도 이미 예측한 일이었다.

그런데 가까워지는 걸 넘어 마치 연애라도 하고 있는 듯한 놈의 행태를 보니 괜히 배알이 꼴렸다.

보초병 신세가 된 것도 짜증이 나는데, 하필 저런 놈을 지켜야 한다니.

마지막으로 본 산의 표정이 ‘나는 마음껏 뒹굴 테니, 너는 열심히 집이나 지켜라.’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아 더욱 짜증이 났다.


“왜 그러십니까? 수장님.”

곁에 있던 심복 하나가 눈이 찢어져라 아래만 노려보고 있는 그를 향해 물었다.

해미는 가까스로 시선을 거두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전방에 집중해라.”

“예.”

살짝 고개를 기울이던 그가 이내 전방을 주시했다.

만일을 대비해 어제보다 많은 병력이 투입됐다.

헌병대로 이루어진 우국의 천인들과 함께 설국의 천인들이 일부 합세했다.

그들은 전쟁 시 전투를 위한 토벌대였는데, 우국의 헌병대와는 늘 쌍벽을 이룰 정도로 훌륭한 전투 기술의 소유자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수가 엄청 나네요.”

부재(不在)중인 설국의 수장을 대신해 나타난 설국의 부수장 형설이 해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흥, 그래봐야 조무래기들이지.”

“…….”

“기분도 뭐 같은데, 거하게 한판 놀아봅시다.”

해미가 낫을 꺼내 들며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시작으로 우국의 헌병대와 설국의 토벌대도 무기를 해방해 동서남북으로 대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안에서는 산이 한창 강의 꿈을 흡수하는 중이었다.

꿈의 질이 너무 월등히 뛰어나다 보니, 한동안 잠잠하던 살의가 폭주하듯 내면에서 날뛰어댔다.

지금처럼 몸이 약할 때는 그걸 누르는 게 정말 곤욕이었다.

그녀와 입을 맞추고, 교감을 나누기 시작하면 악몽의 양은 비약적으로 넘쳐흘렀고, 그는 더 빠르게 악몽을 흡수할 수 있었다.

가녀린 목덜미와 턱을 한꺼번에 움켜쥔 손끝에서 생생하게 뛰고 있는 그녀의 맥박이 느껴졌다.

산은 날뛰는 가학성을 억누르며 갈증과 허기에 오랫동안 허덕이던 짐승처럼 강의 꿈을 삼키고 공포를 마셨다.

그녀의 영혼을 먹어 치우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쿠다탕!

간신히 강에게서 떨어져 나간 그가 그대로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산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리며, 격한 숨결을 토해냈다.

이내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힘을 느낀 그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후에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나른하게 고개를 꺾었다.

괴롭다고 느낄 만큼 황홀한 경험이었다.


“하아…….”

탁한 숨을 내뱉던 산이 다시 고개를 내려 강을 바라보았다.

젖은 입술을 혀로 훑던 그가 허리를 숙여 신음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핥았다.

그러고는 이내 엄지로 강의 이마를 문질러 악몽의 기억을 지워냈다.


“잘 먹었어.”

만족스러운 식사에 감동한 그가 애정을 담아 인사했다.

그녀가 잠에서 막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산은 떠날 채비를 마친 뒤였다.


“……자정이야?”

“응.”

커프스링크를 채우며 다가온 그가 강의 곁에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마지막 당부를 건넸다.


“숫자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으니, 너무 놀라지 않도록 조심해. 자제력이 약한 몽마들은 그 반응에 동요해서 불나방처럼 달려들 테니까.”

“알겠어.”

“숫자가 낮을수록 강한 몽마라는 뜻이니까, 알아두고.”

그들의 진짜 이름과 힘은 바로 그 숫자에 숨겨져 있다고 덧붙였다.


“걱정 마. 너 다녀오는 동안 절대 다치지 않을게.”

강은 그렇게 산을 위로하곤, 그를 떠나보낼 준비를 마쳤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밤이 찾아왔고, 검게 물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둥근 보름달이 떠올랐다.

산을 인도하기 위해 해미가 찾아왔고, 그의 곁엔 설성도 함께였다.

해미를 처음 본 강은 그의 비주얼에 적잖은 충격을 먹은 듯 제대로 인사도 건네지 못하다가 뒤늦게 겨우 눈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해미는 받아주는 법 없이 곧장 산에게 고갯짓만 까닥일 뿐이었다.

틱, 틱, 틱.

시계의 초침이 일정하게 흘렀다.

마침내 자정이 된 순간.

설성이 양팔을 뻗어 결계를 쳤다.

까마득한 허공에는 천계의 문이 열리고, 산과 해미가 발을 내딛는 동시에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각.

깊은 산속에서는 좁아지다 거의 소멸하기 직전이었던 이계의 틈에서 로미가 튕기듯 쏟아져 나왔다.

우당탕탕!


“끄아!”

땅 위를 요란하게 구르던 그녀가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사, 살았다……!”

인간 세상의 시간으로는 고작 하루였지만, 그녀가 이계의 틈에서 버틴 시간은 3년이었다.

그 지옥 같던 시간을 버티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게 로미 자신도 믿기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익숙한 흙과 풀내음을 맡은 그녀는 신이 나 방방 뛰었다.


“와아! 해냈다! 해냈어! 내가 해냈다고!”

아오오오오!

로미의 하울링을 들은 백 노인이 근처에서 졸고 있다가 냅다 튀어나왔다.


“아이고, 이놈아! 네가 정말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하부지!”

그녀가 반가움에 냅다 달려 몸을 던지듯이 백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으악!”

그 무게와 속도를 견디지 못한 그가 로미를 부둥켜안은 채 데굴데굴 굴렀다.


“아이구! 허리! 내 허리!”

“앗! 하부지! 괜찮아요?!”

“야 이놈아……! 아이고, 썩을 놈……!”

무릎이며 허리를 불이 나도록 비벼대던 백 노인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로미의 복슬복슬한 양 뺨을 붙들었다.


“어디 보자! 다친 데 없……!”

묻기가 무섭게 그는 그녀의 왼쪽 눈에 선명히 새겨진 흉터를 발견했다.

날카로운 흉기로 그어 내린 듯 새겨진 상처는 눈썹을 시작으로 눈꺼풀을 지나, 눈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이고, 이놈아…… 살아 돌아온 게 천만다행이긴 하다만…… 여자애 얼굴이 이리되어 어쩔꼬?”

백 노인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며 굳은살이 박인 엄지로 로미의 눈가를 문질러댔다.

그러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지옥 훈련 다녀왔는데, 이 정도 훈장은 있어야죠! 멋지지 않아요? 저 이제 쌍칼이라고 불러줘요, 하부지.”

“염병. 계집애가 쌍칼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밉지 않게 로미를 타박하던 백 노인이 애정 어린 잔소리를 퍼부었다.

재회의 감동은 짧았다.

로미의 무사 귀환을 환영하던 그는 이내 누런 이를 만개하며 웃었다.


“자, 그럼 이제.”

“……?”

“잔금 정산을 시작해볼까?”

술을 끊으니 금단현상에 손발이 덜덜 떨리던 참이었다.

백 노인은 고대하고 고대하던 그것을 기대하며 손을 내밀었다.


“얼른 소백주부터 내놔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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