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해독제
(99/118)
99. 해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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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해독제
2023.04.09.
“얼른 소백주부터 내놔봐라.”
로미가 무사히 돌아온 게 반가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집이 홀랑 타 머물 곳이 사라졌는데도 깊은 산을 떠나지도 못하고 발발 떨며 기다린 이유.
바로 소백주 때문이다.
귀한 술 마실 생각에 입이 귀에 걸린 백 노인 앞에 그녀가 얼른 등에 메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얼씨구나! 이히히!”
신이 난 그가 냉큼 달려들어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그 안엔 로미가 떠나기 전 약속했던 수면초와 온갖 천계의 귀한 보물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어디 보자! 일국의 붉은 사슴 똥이랑 설국의 백목화, 월국의 푸른 이슬초! 뿌리까지 아주 제대로 캐왔구나? 장하다! 장해!”
“수면초도 세 뿌리 더 캐왔어요.”
“으잉? 그럼 합이 열세 뿌리냐?”
“네!”
“어이구, 이 복덩이가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누!”
헬리콥터의 날개처럼 꼬리를 흔드는 로미의 양 뺨을 마구 문지르던 백 노인이 수북이 쌓인 것들을 옆으로 밀며 술 단지를 찾기 시작했다.
자고로 이 모든 것의 정점이 바로 소백주 아니겠나!
그런데,
“허허. 요 소백주가 어디에 그리 꼭꼭 숨었을꼬?”
아무리 뒤져도 술병처럼 생긴 물건이 보이질 않았다.
슬슬 초조함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소백주는 어디 있느냐?”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신나게 꼬리를 흔들어대던 로미가 귀를 뒤로 잔뜩 눕힌 채 슬그머니 눈을 피한다.
더러운 불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 왜 말이 없어? 소백주 어디 있냐니까?”
“하부지.”
“그래, 어디에 숨겨뒀느냐! 늙은이 애 그만 태우고 어서 줘라!”
“그게…… 구해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긴 했는데, 너무 귀한 거라 못 구했어요. 죄송해요.”
“……뭐라?”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하부지도 술을 한번 끊어보시는 게 어때요? 맛도 없고 쓴 거 몸에도 백해무익이잖아요.”
백 노인의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이 모조리 걷혔다.
그의 눈치를 살살 살피던 로미는 분위기를 전환해보고자 냅다 머리통부터 들이밀었다.
“그래도 하부지. 제가 살아 돌아와서 기쁘죠?”
“…….”
“그러니까 노여움 푸세용. 히히.”
배를 까뒤집고 애교를 부리는 그녀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던 백 노인이 근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근처에 쓸 만한 게…….”
“하부지? 뭐 찾으세요?”
“응. 이게 좋겠네.”
“그게 뭔데요?”
“뭐긴 뭐여.”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든 그가 살벌하게 눈을 홉뜨며 말을 이었다.
“너 후드려 깔 몽둥이지.”
“……농담이시죠?”
“농담인지, 아닌지 한번 처맞아봐. 정신이 번쩍 들 테니께.”
으아악!
.
.
.
도망치듯 산을 벗어난 로미는 빠르게 밤하늘을 달렸다.
화국의 소백주를 구하진 못했지만, 나머지 것들을 현지도 아닌 우국에서 구하느라 굉장히 애를 먹었었다.
게다가 소백주를 못 구한 게 미안해 험한 절벽 끝에서만 피는 수면초를 목숨 걸고 세 뿌리나 더 캐왔건만, 저런 반응이라니!
“살아 돌아와 반갑다는 게 내가 아니라 술이었단 말이야? 이 뻥쟁이 노인네!”
백 노인의 반응이 못내 서운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단은 그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는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상책이었다.
로미는 쉬지 않고 달려 강의 집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미리 열려 있던 발코니 창으로 들어가 거실을 서성이던 강과 재회했다.
“언니!”
그녀의 외침에 강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곧 팔을 벌렸다.
“로미야!”
로미가 있는 힘껏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무게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간 강을 재빨리 제 폭신한 꼬리로 받친 뒤, 마구 그녀의 품에 머리를 비벼댔다.
강은 몸이 뒤로 넘어가든 말든 로미의 커다란 머리를 끌어안은 채 감격했다.
“잘 왔어. 정말 잘 왔어…… 산이가 가기 전까지 널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에이, 그건 당연히 알죠. 근데 언니도 나 걱정했어요?”
그녀가 되묻는 말에 강이 눈가가 그렁그렁해져서 외쳤다.
“그걸 질문이라고 해? 당연히 걱정했지!”
물기가 그득 고인 눈을 마주한 로미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사실 산이 아닌 강이 저를 이만큼이나 걱정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늦게 로미의 눈에 난 상처를 본 그녀가 놀라서 외쳤다.
“너……! 눈이 왜 이래? 다친 거야?”
“그래도 이 정도면 싸게 치른 거예요. 사실 갈비도 여섯 대나 부러졌었고, 다른 뼈도 여러 번 부러졌다 붙었…….”
그녀는 채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충격에 빠진 듯한 강의 눈에 급속도로 차오른 눈물방울이 유리구슬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이 언니는 이 와중에도 화보를 찍고 있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로미가 이내 웃는 얼굴로 강의 턱 밑에 제 머리를 비비적대며 말했다.
“아이, 뭘 울고 그래요. 짐승 감동 먹게.”
그에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로미의 머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은 채 숨죽여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운 뒤에야 앞으로는 다치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라며 연신 자신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어주었다.
로미는 본의 아니게 강을 걱정시킨 것 같아 미안했지만, 저를 위하는 그녀의 마음이 생각보다 큰 것 같아 기뻤다.
머지않아 설성도 로미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다.
“수장님!”
“그래, 고생 많았구나.”
그녀의 턱과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던 설성이 이마를 맞댄 채 웃었다.
“다시 만나 정말 반갑다.”
저를 격하게 반겨주는 두 여인에게 양껏 귀여움을 받던 로미는 이내 강에게 산이 우국의 수장과 함께 무사히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국 수장님이랑 가셨다고요?”
“응.”
“아아…….”
강은 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탄식과도 같은 답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부디 별 탈 없이 무사히 돌아와야 할 텐데.
기다림의 시간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밤이었다.
.
.
.
한편.
해미의 안내를 따라 산이 도착한 곳은 일국이 아닌 월국이었다.
천계의 총수장인 월국의 수장 ‘태천’을 먼저 만나 뵙고 가라는 해미의 일방적 안내 때문이었다.
월국(月國)은 인간의 탄생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월국을 상징하는 보름달이 천공에 커다랗게 띄워져 월국의 만물을 아름답고 고요하게 비추고 있었다.
금빛 수가 놓인 흰색의 제복을 입고 양옆으로 늘어서 있던 천인들 가운데 검은 슈트를 입고 선 산의 모습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태천의 수하인 월국의 천인들도 대놓고 수군대지는 않았지만, 다들 그를 흘깃거렸다.
소문으로만 듣던 천인과 몽마의 전무후무한 혼혈을 실제로 본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총수장인 태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백발에 흰 수염을 달고 있는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구부러진 곳 하나 없는 자세와 탄탄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어마어마했다.
해미가 왼쪽 팔을 앞으로 굽혀 내민 채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그래. 자네가 고생이 많네.”
“아닙니다.”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린 태천이 산의 앞에 섰다.
“내 얼굴을 기억하겠나?”
그가 묻는 말에 산이 대답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잊겠습니까.”
언뜻 보기에 웃고는 있었지만, 반가워 웃는 건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서 천인들은 제 몸에 흐르는 피를 부정하고, 저를 죽이려던 것도 모자라, 저를 이용해 제 부모의 혼의 조각까지 노리려는 자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잊고 싶어도 한번 봤던 이들의 얼굴은 단 한 명도 잊은 얼굴이 없었다.
“열여섯에 너를 인간 세상에 돌려보내고 쭉 너를 지켜봐 왔다.”
“살생이라도 할까 봐요?”
“그것도 너를 지켜본 이유 중 하나긴 했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었으니까.”
“…….”
“어머니를 욕보이지 말거라. 모아는 네 어미이기 이전에 천인이었으니까.”
그가 말했듯 제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분명 천인의 피였다. 하지만 천인들은 그 사실을 바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지켜본다는 명목의 감시를 택했다.
어미를 욕보이지 말라는 태천의 말은 곧 자신들의 명성에 흠을 남기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그는 산의 한쪽 어깨에 묵직한 손을 얹으며 경고하듯 말했다.
“융합혼이 온전히 천계로 인도되기 전까지는 긴장을 놓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천인들이 항상 널 지켜보고 있으니, 혹시라도 다른 마음 품지 말라는 얘기다.”
“…….”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니?”
태천의 말에 산은 영혼 없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내 곁에서 못마땅한 듯 지켜보던 해미가 혀를 차며 말했다.
“뭐하러 이런 귀찮은 일을 벌이십니까? 그냥 그때 깔끔히 죽여버렸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요.”
그의 말에 산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해미가 저를 못 죽여 아쉬워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랬다.
“이만 순우에게 데려다주게.”
슬쩍 상체를 구부려 묵례한 해미가 산의 곁을 지나가며 짓씹듯 말을 뱉었다.
“따라와라.”
그는 말없이 태천에게 고개를 한번 숙인 뒤, 해미를 따라 뒤를 돌았다.
그런데 멀어지려는 그의 뒤에 대고 태천이 말했다.
“이름이 산이라고 했나?”
산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이름을 지어준 어미가 죽는 순간까지 자네에게 무엇을 바랐을지 잘 생각해 보게.”
“글쎄요.”
“…….”
“제 어머니는 아마도 제 행복을 가장 크게 바라시지 않았을까요?”
조용히 미소 짓던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 제가 무슨 선택을 하든 존중해주실 겁니다.”
“…….”
“그게 저의 행복이라면요.”
뜻 모를 산의 말에 태천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만. 어미를 아주 많이 닮았어.”
그에 산은 더 이상 대꾸하기를 그만둔 채,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해미를 따라 도착한 일국(日國)은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저번에 순우를 만난 곳은 천계의 입구였기 때문에, 산도 이곳에 직접 온 건 처음이었다.
일국의 천인들은 순우의 지휘 아래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마치 군대를 보고 있는 것같이 딱딱하고 위엄 있는 월국의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는 곳이라고 해서 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일국의 수장이 지내는 건물은 인간 세상의 연구소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국은 인간 세상의 모든 죽음을 관리하고 죽은 이의 영혼을 천계로 인도하는 일이 주 업무였지만, 기술과 학문이 발달해 천계와 지하는 물론 인간 세상의 많은 일을 연구하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똑같은 흰 제복을 입고 있는 순우의 수하들은 용병보다는 연구원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순우가 모습을 드러내자, 해미가 말했다.
“자네는 매번 바쁘구만.”
“그렇죠. 뭐. 하하.”
사람 좋은 얼굴로 어수룩한 웃음을 짓던 그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산에게 인사했다.
“이렇게 또 만나는군요.”
얼마 전에 봤던 터라, 처음에 비해 오고 가는 인사가 명료했다.
“수면초를 먹었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해독제부터 먼저 드시죠.”
순우의 수하 하나가 작은 유리병 하나를 들고 왔다.
“천계 밖으로는 반출이 안 되는 약이라, 번거롭게 됐네요. 그렇죠?”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나마 천인의 수장치고는 제게 깍듯하고, 호의적인 편이라 산도 그에게는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어쨌든 수면초를 먹고도 목숨을 건졌으니, 면역이 생겨 같은 독에 두 번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지금 마신 해독제가 앞으로 수면초가 가진 특유의 향을 기민하게 구별해내는 데 도움을 줄 거라고 했다.
순우는 수하가 가지고 온 붉은 쿠션 위의 작은 약병을 집어 들었다.
오묘한 색의 약물이 병 안에서 찰랑거렸다.
그는 입구를 열어 곧장 산에게 내밀었다.
“자, 그럼.”
“…….”
“드시죠.”
안경 너머의 서글서글한 눈매가 부드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