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인내는 여기까지 (100/118)


#100. 인내는 여기까지
2023.04.13.



 


“자, 그럼.”

“…….”

“드시죠.”

산은 순우가 내민 유리병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안경 너머에서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그의 눈이 보였다.

발을 들인 순간부터 가지고 있던 경계심에 의심의 무게가 얹어지자, 공기가 더욱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천계의 모든 것들은 믿을 게 못 된다고 생각하는 산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것들도 믿을 수 없었고, 정체도 모를 것을 해독제랍시고 내미는 천인들의 수장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순우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그에 대한 데이터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열여섯의 그날. 천계에 있던 산은 순우를 봤던 걸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해미처럼 적극적으로 나서 자신의 사형에 동조하지도, 그렇다고 제게 호의를 베풀지도 않았다.

먼발치에서 봤던 순우는 그때도 그저 산더미처럼 쌓인 일거리를 밤새 처리하고 온 사람처럼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가장 속내를 읽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괜찮으신가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상념이 잘려 나갔다.

좀처럼 약을 받아들지 않는 산의 태도에 그가 들고 있던 약병을 재차 내밀었다.

표정으로 순우의 의중을 읽는 일이 불가하다고 판단한 산은 담담히 입술을 뗐다.


“수장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네? 어떤 부분이요?”

“천계의 천재 과학자이자 개발자. 뛰어난 의술까지 겸비한 분이라고요.”

“하하, 이거 참…… 민망하네요.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을까요?”

백 노인에게 들었다.

잔재주가 많은 그도 한때는 천인들의 무기를 개발하던 도공이었던 동시에 촉망받던 일국 출신의 연구원이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곁에 있던 해미가 끼어들었다.


“흥! 오자마자 입에 발린 말을 잘도 지껄이는군!”

아쉬운 게 많은 모자란 놈이니, 강자 앞에서 설설 기는 모습이 볼만하다며 그가 마구 비꼬아댔다.

그러더니 이내 볼일이 끝나면 부르든지 하라며, 자리를 떠버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산은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일국의 수장님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천계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

“호기심을 잘 참지 못하시는 분이라고 하시더군요.”

“음. 부정은 못 하겠군요.”

순우가 멋쩍게 웃자, 산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어떤 실험체를 대상으로 삼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데이터를 얻으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

“그것이 때때로 고문에 가까운 실험 과정을 거친다는 것도요.”

산은 어디에든 절대 선(善)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하늘의 일을 돕는다는 천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잠시나마 천계에 머물렀던 열여섯의 산의 기억 속 어디에도 제게 선의를 베푼 천인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장 실험체가 될 처지로 끌려왔다고 의심해도 그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순우는 안경을 추어올리며 잠시 대답을 고르는 듯했다.

그러더니 순순히 일정 부분을 인정했다.


“확실히 천인과 몽마의 혼혈은 연구대상이긴 합니다만.”

“…….”

“별개로 제가 여태껏 해온 일들은 천계의 법도와 개인의 윤리적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문제입니다. 그러니 변명해봤자 불필요한 언쟁만 불러올 것 같군요.”

그는 깔끔히 선을 긋고는, 단번에 의중을 파악했다.


“아무튼 지금 이 해독제를 의심하고 있다. 뭐, 그런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건가요?”

산은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해독제가 아쉬운 입장인 건 맞지만, 정말로 천인들이 나쁜 마음을 먹고 제게 어떤 장치를 심어두기라도 하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순우가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

“그대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산이 어떤 환경에서 나고 자라왔는지는 순우도 익히 보고 들은 게 있어 잘 알았다.

그런 그가 수면초에 어이없이 중독당한 상태에서 천인들이 해독제랍시고 내미는 걸 아무 의심도 없이 덥석 받아먹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 정도의 의심도 없이 백치처럼 살아왔다면, 이 자리에 그는 존재하지 못했을 테니까.

어쨌든 석연치 않았던 부분이 문제라면, 해소해주면 될 일이었다.


“해독제를 개발하게 된 경로와 성분을 좀 알려드리면 믿음이 갈까요?”

“…….”

“따라오시죠.”

그렇게 그는 산을 연구실로 안내했다.

인간 세상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무채색의 건물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순우가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육중한 문이 부드럽게 양옆으로 밀려났다.


“오셨습니까.”

수하 하나가 뛰어와 자신의 수장을 받았다.


“수면초 관련 파일 좀 열어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수하가 두말없이, 연구 자료를 커다란 모니터에 띄웠다.

순우는 화면에 뜬 자료를 한눈에 보기 쉽도록 손끝을 이리저리 밀어 정리했다.


“아시다시피 수면초는 인간에겐 수면제 정도의 약효를 끼치고, 인체에 큰 영향을 남기지 않습니다만, 그걸 먹은 게 천인이나 몽마라면 달라집니다.”

몽마들이 수면초의 숙주가 되고, 자칫 죽음에까지 이룰 수 있는 것에 비하면 그래도 덜한 수준이긴 했지만, 수면초의 독은 천인에게도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일국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수면초 해독에 관한 연구를 마쳤고, 그 결과가 이 약물이었다.


“해독제는 천인들에게만 사용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 탓에 엄격히 반출이 금지된 약입니다.”

순우가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라도 해독제가 몽마들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되니까요.”

그렇게 말을 마친 그는 해독제를 보관 중인 저장고의 문을 열고 들어가 산에게 내밀었던 약병과 똑같이 생긴 해독제의 샘플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 제가 그대에게 드린 것과 같은 약입니다.”

“…….”

“먼저 드린 해독제가 의심되면 이 중에서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드셔도 무방합니다. 그마저도 의심되면 제가 먼저 먹어보도록 하죠.”

그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산은 제게 먼저 주어졌던 해독제를 순우에게 내밀고, 자신이 마실 몫의 해독제는 직접 골랐다.

그리고 순우는 그 해독제를 받아들자마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것을 마셨다.


“저는 중독된 상태가 아니라, 몸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

“빈속에 먹는다고 해가 되는 것도 없고요.”

그걸 본 산이 그제야 제가 직접 고른 해독제를 열며 물었다.


“그럼 천인에게는 해독 작용을 하는 물질이 다른 종족에겐 해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에 그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제가 세운 가설에는 없습니다만.”

“…….”

“전례가 없어 확답은 못 드리겠네요.”

잘못되더라도 네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솔직한 답에 산은 망설임 없이 약을 마셨다.

수를 썼다면 어떻게 쓴다 해도 당할 수밖에 없겠지만, 언제까지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의심은 이쯤에서 거두어야 했다.

이윽고 그는 해독제에 관한 걱정이 기우였다는 걸 금세 깨닫게 되었다.

약의 효능이 바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때요? 이제 좀 안심이 됩니까?”

순우가 싱긋 웃으며 묻자, 산이 대답했다.


“네. 해독제가 아니라 각성제를 먹은 것 같네요.”

“하하. 그럴 리가요. 수면초 때문에 묶여 있던 기운들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는 것뿐입니다.”

정말로 그의 말이 맞았다.

기분 나쁘게 뱃속에서 꿈틀대고 있던 무언가가 단숨에 녹아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지난밤 먹었던 강의 악몽이 폭발하듯 제 안에서 기운을 내뿜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눈이 붉고, 푸르게 아주 선명한 빛으로 빛나다 곧 사그라졌다.

은하계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신비롭고 선명한 산의 푸른 왼쪽 눈을 보며 순우는 모아를 떠올렸다.

명도나 채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푸른 빛을 띠는 눈동자를 가진 천인들 중에서도 그의 모친인 모아는 유독 선명하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천인이었다.

그의 눈은 그런 모친의 눈을 빼다 박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순우의 시선이 살짝 산의 오른쪽 눈동자를 향했다.

크리스털 잔에 담긴 것만 같은 붉은 눈동자는 핏빛을 머금은 와인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 깊고 고요한 눈동자엔 용암이 끓는 것만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저 눈은 필시 부친에게 물려받은 거겠지.

물과 불.

선과 악.

성질이 다른 두 가지의 기운을 동시에 지닌 존재를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는 곧 잡념을 밀어내며 말했다.


“곧 융합혼이 완성될 테니, 그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그 부탁이라 함은 강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인간의 몸속에서 융합을 마친 혼이 밖으로 꺼내질 수 있는 건 오직 그들의 영혼이 유일한 혈육인 산에게만 반응했기 때문이다.

산이 미소를 지으며 순우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오늘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염치불구하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뭐죠?”

“혹시 수인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습니까?”

그의 말에 순우가 꽤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몽마와 천적인 수인이 몽마의 피가 섞인 혼혈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둘의 관계가 아직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과 반려를 생각하는 산의 모습이 꽤 애틋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피곤해서 멍해져 있던 정신 상태가 각성하는 기분이었다.


‘……역시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니까.’

살짝 느슨해져 있던 일상에 불씨가 확 당겨진 느낌이었다.

앞으로 그를 통해 얻어질 연구 결과가 무척 기대되었다.


“종류별로 챙겨드리죠.”

순우가 기꺼이 대답했다.

잠시 후.

약을 받아 연구실을 나오던 산이 맞닥뜨린 건 커다란 낫자루의 날붙이였다.

순식간에 날아든 칼날이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걸어 베어버릴 듯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무기의 주인인 해미가 두 눈에 노기를 가득 담은 채 말했다.


“약이든 독이든 주는 대로 마실 것이지, 감히 천인의 수장을 상대로 의심을 하려 들어?”

노발대발하는 그를 순우가 급히 말려봤지만, 흥분한 해미는 순우를 뿌리치며 당장이라도 산을 죽일 듯한 태세로 몰아붙였다.


“천박한 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수장님! 진정하십시오!”

“말리지 말게! 천한 것들은 잘해주면,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기어오르는 법이야!”

“그를 헤쳐선 안 됩니다!”

어마무시한 힘으로 저를 말리는 순우와 그의 수하들을 떨쳐낸 해미가 다시 낫을 크게 휘둘렀다.

날카로운 날이 당장이라도 산의 새하얀 목에 박힐 듯 겨누어졌다.

찰나의 일이었다.

하지만 산은 해미의 난폭한 태도에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서늘하게 그를 응시했다.

긴박하게 흐르는 분위기 탓에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급격히 낮아진 온도만큼이나 묵직한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저희 어머니는 천계에서도 유명한 평화주의자였습니다. 본디 싸움이란 걸 싫어하셨죠.”

어릴 땐 싸우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떠올리는 게 모친인 모아의 성격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원래 자식은 부모의 유전자로 태어난 생명체니까.

하지만 이 순간 그는 확신했다.

그동안 마찰을 피해온 건,


“그런데 아무래도 저는.”

“…….”

“어머니보단 아버지 성품을 더 많이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나태함의 끝판왕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었다는 걸.

해미에 대한 인내는 여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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