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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절반의 피 (101/118)


#101. 절반의 피
2023.04.16.



 


“저희 어머니는 천계에서도 유명한 평화주의자였습니다. 본디 싸움이란 걸 싫어하셨죠.”

까딱했다가는 목이 날아갈 처지였다.

하지만 산의 표정엔 지금의 제 처지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만큼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그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귀찮은 일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현실이,


“그런데 아무래도 저는.”

“…….”

“어머니보단 아버지 성품을 더 많이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극도로 귀찮게 느껴질 뿐.


‘혼종은 죽여 없애는 게 답이지요,’

 
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사형을 외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제 정체가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걸, 확실히 못 박았던 인물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슬렸다.

제가 죽기 전까지는 끈질기게 저를 밟고, 몰아붙일 놈일 것 같아서.

언제든 틈만 생기면 어떤 명목이라도 만들어 저를 죽일 놈인 것만 같아서.

하지만 언제까지고 무시하기엔 우국의 수장은 이미 너무 여러 번 경계를 넘었다.

그리고 산은 알았다.

무시가 언제나 해결책이 되어주진 않는다는 걸.

더 귀찮아질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씩 경고를 해줘야 한다는 걸.

부친인 이일리(212)는 지킬 게 생기기 전까지는 대적할 이가 없던 선대 몽마의 왕이었다.

절대 선이 없듯이, 절대 악이라고 칭할 수도 없는 존재였지만, 그가 살아온 세계 자체가 힘이 곧 권력인 세상이었다.

그건 곧 제 입으로 ‘평화’를 운운하는 순간, 자신의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될 거라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그런 세계에서 왕으로 군림해온 아버지의 피가 제 몸에도 흐르고 있다는 걸, 그는 이미 여러 번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어쨌든 나를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는데.”

산이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유감입니다.”

“닥쳐라! 이 건방진 놈!”

푸르게 빛나는 왼쪽 눈동자를 경멸하듯 노려보던 해미가 이를 아득 물며 말했다.


“더러운 네놈 몸에 나와 같은 천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게 이토록 수치스러울 수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반쪽짜리 천인 흉내나 내고 있는 네 눈알을 파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

“순리를 거스르는 것들은 모두 죽어야 마땅하다. 너 같은 것들은 애초에 태어나질 말았어야 했……!”

그런데 그때였다.

산의 오른손이 제 왼쪽 목을 겨누고 있는 칼날로 향했다.

그러고는 이내 날이 박힌 낫자루를 부드럽게 움켜쥔 채, 그대로 밀어내듯 서서히 제게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 순간에도 두 남자의 시선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닿아있었다.


“이, 이놈이……?”

해미가 낫자루를 쥔 손에 힘을 줬지만, 꼼짝없이 힘에서 밀리기 시작하니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걸 보는 산의 입매가 서서히 길어졌다.

메마른 사막처럼 텅 비어 있던 눈에 이채가 돌고, 무감한 입술 끝에 난폭한 미소가 걸렸다.


“순리라고요.”

어이가 없다는 듯 뇌까리던 그가 잠잠히 물었다.


“대체 그런 순리는 누가 정하는 겁니까?”

“뭐……?”

“당신은 신(神)입니까?”

“…….”

“아니면 신의 역할에 심취해 신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입니까.”

그가 밀어낸 낫은 어느 순간 해미의 목에 닿아 있었다.

제 목을 겨눈 꼴이 된 해미가 낫자루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서슬 퍼런 날을 바라보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째서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가.’

바짝 조여진 동공이 갈 곳을 잃은 채 배회하다가 다시 산에게로 향했다.

눈동자에 어렴풋이 비친 살의가 목을 틀어쥐는 것만 같았다.

해미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열여섯의 유약한 소년의 모습이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끼얹어진 모멸감은 이내 분노로 탈바꿈했다.


“그 입 다물지 못해?!”

흥분한 그가 기압을 폭발적으로 상승시키며 외쳤다.

그 바람에 해미를 말리고 있던 순우의 수하들과 주변에 있던 천인들까지 돌풍에 휘말리듯 나가떨어져 버렸다.


“으악!”

“끄아아!”

비명이 난무하고, 해미는 인정사정없이 낫을 휘둘렀지만, 산은 이미 그가 있던 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위다!’

빠르게 기척을 읽은 해미가 고개를 들어 허공 위에 떠 있는 산을 발견했다.

그는 제자리에서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후우웅!

바람을 가르는 위협적인 소리가 천계를 울렸고, 돌풍이라도 온 듯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만두십시오!”

순우가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급한 대로 그는 연구소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으로 결계를 펼쳐냈다.

콰콰콰콰콰-!

반투명한 금빛의 막이 펼쳐졌고, 우왕좌왕하던 천인들은 수장의 지휘에 따라 빠르게 태세를 가다듬었다.

허공에 두 남자가 마주했다.

순식간에 산의 위치와 동등하게 마주 선 해미가 산의 몸을 두 동강 낼 듯 가로로 낫을 휘둘렀다.

하지만 가뿐히 피한 그의 커다란 손이 빛처럼 빠르게 해미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흘러나온 기압이 검은 연기처럼 산의 손바닥에서 뭉쳐지고 있었다.


“제기랄……!”

해미는 재빨리 자세를 낮춘 뒤, 들고 있던 낫을 거꾸로 쥔 채 자루의 끝으로 급소를 노렸다.

바로 맞았다면 내장이 뚫렸을 만큼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산은 정면으로 날아든 낫자루를 잡아 그대로 당겼다.

속도와 힘을 이기지 못한 해미가 낫자루를 쥔 채 끌려가듯 몸이 앞으로 쏠렸고, 산은 중심을 잃은 그의 등을 구둣발로 찍어 내렸다.

퍼억!


“커허억!”

붉은 피를 토한 해미의 몸이 추락했다.

짧은 신음과 함께 조금 늦게 떨어진 낫자루의 날이 아슬아슬하게 해미의 옆에 박혔다.

콰악!

그가 재빨리 손을 뻗어 바닥에 박혀버린 낫자루를 움켜쥐었지만, 반쯤 박힌 날붙이 위로 검은 구두가 놓였다.

낫자루를 쥐고 엉성하게 무릎을 꿇은 채 굳어있는 해미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기가 무섭게 우악스럽게 턱이 틀어 잡혔다.


“끄윽……!”

피로 얼룩진 그의 코와 입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산의 얼굴엔 생채기 하나 없이 곱기만 했다. 무감한 눈으로 해미를 바라보던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다시는 내 존재 여부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으윽!”

“목숨 걸고 날 낳아주신 내 어머니가 들으시면 슬퍼할 겁니다.”

 

 


“너, 너 이 녀석……!”

그런데 그때.


“포박해!”

순우의 명에 천인들 넷이 붉은 종이가 엮인 금빛 사슬을 동서남북에서 날려 산을 묶었다.

금줄에 포박된 그의 뒤통수로, 순우가 겨눈 칼날이 닿았다.


“천계에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순우의 경고에 산은 여전히 해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한테 하시는 말씀입니까?”

먼저 공격당한 제가 어디까지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 건지 되묻는 거였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순우도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먼저 공격을 한 건 해미였고, 처음 산을 봤을 때부터 도를 넘은 비난을 해온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어떤 이유든 살생은 안 됩니다.”

순우가 단호히 건넨 말에 그가 되물었다.


“그 역시 저한테만 해당하는 말인가요?”

사납게 얼어붙은 시선이 스르륵 제 뒤를 향했다.


“나를 죽일 겁니까?”

천인은 살생해도 되냐고 묻는 말이었다.

그러자 순우가 대답했다.


“싸움이 커져 그런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상황을 바로 볼 필요가 있는 상대는 제가 아니라, 우국의 수장입니다.”

“…….”

“내가 없으면 혼의 인도도 없다는 걸 이분만 모르는 것 같아서요.”

아무도 산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제각기 해방한 무기들을 손에 쥔 채 여차하면 언제라도 달려들 태세를 갖출 뿐이었다.

느릿하게 주변을 훑는 눈이 불처럼 뜨겁게 붉어졌다가, 이내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빛으로 식었다.


“내 몸에 손대는 순간 전부 죽일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대가 살생하는 순간……!”

“아니요.”

“…….”

“타협 같은 건 없습니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더는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었다.

첨예한 대립에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고, 긴장감이 극도로 달한 상태에서 누구 하나 쉽사리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는 포박된 상태로 다시 해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아주 어두운 푸른색을 띠고 있는 그의 두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신이 인간의 형상을 만들 때 입 하나에 귀 두 개를 달아놓으신 건 이유가 있을 겁니다.”

“…….”

“당신은 늘 입이 방정이라, 말을 좀 아낄 필요가 있다는 얘기야.”

묶인 상태였지만, 오히려 기세에 눌린 건 천인들 쪽이었다.

사슬을 쥐고 있는 네 명의 천인들이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그 증거였다.

폭발 직전의 응축된 기가 그를 묶어놓은 사슬과 공기의 진동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 무슨 힘이 이렇게……!’

속으로 뇌까리던 천인 하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금줄을 고쳐잡았다.

건드리면 크게 터질 것이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산이 순우에게 말했다.


“나갈 땐 안내 필요 없습니다. 길만 열어주세요.”

 

.
.
.

그 시각.

설성이 결계를 치고 주변을 순방하는 동안, 강은 로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제는 산의 부모인 모아와 일리에 관해서였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 본 생명체 중 가장 아름다운 형상을 한 이들이 바로 모아와 일리라고 했고,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들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이야기할 땐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도 했다.

거기서 강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근데 산이 부모님 살아계실 땐, 네가 아주 어릴 때 아니야?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하다.”

그녀가 묻는 말에 로미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인간 세상에서 스물두 살로 살고 있긴 한데요.”

“…….”

“사실 제 정확한 나이는 저도 몰라요.”

수인들은 거의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걸 기억할 만큼 기억력이 좋고, 인간보다 월등히 성장이 빠르다.

그러다 보니 태어난 순간부터 거의 모든 걸 기억할 만큼 훌륭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건 단점이 되기도 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죽고, 죽음의 땅에 버려지듯 남겨진 순간마저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인간의 나이로 따지면 아마 그때가 다섯 살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렇구나.”

강은 로미의 이야기를 신기하게 들으면서도 산이나 그녀의 처지가 저 못지않게 무척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로미는 강이 주는 간식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손과 발이 없는 것도 아닌데, 수인의 모습을 한 채 입만 벌려 주는 걸 받아먹으며 응석을 부렸다.


“요즘 주인님이랑 언니를 보면 꼭 모아님이랑 일리님을 보는 것 같아요.”

“그래?”

“네. 그래서 두 분은 꼭 모아님이랑 일리님이 못다 이룬 생까지 오래오래 함께 하셨으면 좋겠어요.”

로미의 말에 강은 말없이 그녀의 보드라운 털만 쓰다듬어 주었다.


“꼭 그렇게 될 수 있게 제가 지켜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너무 든든하다.”

그렇게 강은 로미가 들려주는 천계와 지하, 그리고 그녀가 알지 못했던 세상의 이야기를 들으며 밤을 견뎠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너무 길다고 느껴지지 않도록.

그러다 문득 내내 궁금했던 일이 하나 떠올랐다.


“있잖아, 로미야.”

“네?”

어쩌면.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돼?”

너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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