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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일촉즉발 (102/118)


#102. 일촉즉발
2023.04.20.



“있잖아, 로미야.”

“네?”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돼?”

강이 묻는 말에 로미가 귀를 쫑긋 세웠다.


“뭔데요? 제가 알고 있는 거면 대답해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산이 부모님이 어떻게 소멸하지 않고, 인간의 몸에 영혼의 조각을 심을 수 있게 된 건지 알아?”

산에게 언뜻 듣기로 천인이 죽으면 빛으로 소멸해 천계의 에너지원이 된다고 했고, 몽마는 흩날리는 불티가 되어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인간의 몸에 들어와 누구도 예측 못 할 ‘가능성’을 심게 된 걸까.


“음.”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골몰하던 로미는 이내 고개를 갸웃대며 말을 이었다.


“그 부분에 관한 건 저도 잘은 모르지만, 소문에 의하면 월국의 고서에 ‘기적을 이룬 자, 기적이 되리라’라는 말이 적혀 있다고 해요.”

“아…….”

그녀는 로미의 말해준 고서의 내용을 곱씹었다.

기적을 이룬 자, 기적이 되리라.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천인과 몽마의 사랑으로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킨 이들이었으니, 죽음에 관해서도 이례적인 일을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네.”

강은 금세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들의 만남, 그리고 그 결실인 산의 탄생, 또한 그들이 마지막으로 이루려고 하는 모든 일이 기적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그녀는 그 마지막 기적이 이루어지고 있을 제 몸속 어딘가를 상상하며, 제 심장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또렷하게 울려오는 심장의 박동이 그들과 함께 살아있음을 알려오는 것만 같았다.


“로미야.”

“네?”

“너는 산이 부모님의 마지막을 봤어?”

“아니요. 그때 일리 님은 추적당하고 있다는 걸 알자마자 저를 인간 세상에 먼저 내려보내셨어요.”

로미는 저를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던 일리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저도 싸울 수 있어요! 같이 있을래요!’

 
분리되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던 그녀에게 일리가 말했다.


‘네가 할 일은, 여기서 산이를 기다리는 거야.’


‘…….’


‘할 수 있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리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리님이 지킬 게 없었다면, 절대 왕이 바뀌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로미는 몽마들의 세계가 계급사회로 이루어져 있지만, 모두가 본이 같은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럼 산이의 부모님을 죽인 것도……?”

“맞아요. 이사오는 일리 님의 동생이었어요. 상급 몽마들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꽤 가까운 사이였겠죠.”

절대 권력을 갖고 있던 형의 등에 칼을 꽂고 왕위를 손에 넣은 현 몽마의 왕이 바로 이사오였다.


“그리고 이사오의 정체는…….”

“정체를 알아?”

“그게…….”

그녀는 신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양신휘한테 들은 거라 확실하진 않아요. 무슨 꿍꿍인가 싶어, 따로 알아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왕이 누군데?”

다급하게 채근하는 강을 보며 로미가 어렵게 입을 뗐다.


“문 엔터 노지태 대표요.”

그건 아직 산에게도, 어떤 천인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비밀이었다.

신휘가 너무나 쉽게 그것을 털어놓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게 함정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일단 이야기를 해봐야 하나 싶었지만, 내내 설성이 붙어 있었던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몽마의 왕을 알아내면 천인들이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강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노지태 이사가 몽마의 왕이라고?”

“확실하진 않아요. 그러니까 언니도 알고만 계세요. 주인님께는 곧 얘기할 생각이에요.”

로미는 자신이 속한 회사였기 때문에 나름 문 엔터의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밝혀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노지태와 양신휘만 봐도 어마어마한데, 그가 몇이나 되는 몽마들을 수하로 심어놓았을지.

회사를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건, 그 모든 걸 너무도 쉽게 밝혀버린 양신휘의 태도였다.

병실에서 마주친 노지태의 반응으로 봐서는 노지태가 의도한 일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죽이려면 그 자리에서 제 정체를 밝히고, 죽였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양신휘는 나를 왜 살려준 걸까.’

그날 이후.

내내 곱씹어봤지만,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황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악몽을 꿀까 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 강이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전화를 받아들었다.


“네, 대표님.”

- 강아. 몸은 좀 어떠니?

“괜찮아요.”

- 그래? 그럼 지금 회사로 좀 올 수 있을까?

“회사는 왜요? 오늘 스케줄도 없는데…….”

- 왜겠어. 일 때문에 그러지.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 그건 와서 얘기하자. 어차피 또 이동해야 하니까 차에서 천천히 얘기해줄게. 아! 너무 대충하고 오지 말고, 신경 써서 차려입고 와. 알았지?

그렇게 그는 설성을 보내겠다는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은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끊긴 전화의 액정을 바라보았다.


“……차려입고 오라고?”

황 대표가 그렇게 말할 땐, 업계 관계자를 만난다는 뜻이었다.

가능하면 산이 돌아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았지만, 일 때문이라면 어쩔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설성과 함께 움직일 수 있다는 거였다.

그녀는 곁에서 잠든 로미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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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강아, 왔어? 설성 씨도 안녕!”

수트 재킷을 팔에 걸친 그가 넥타이를 매만지며 허겁지겁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설성과 강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냉큼 올라탔다.


“자, 바로 가자고.”

“어딜 가는데요?”

강이 되물었지만, 그는 휴대폰에 찍힌 주소만 설성에게 보여줄 뿐이었다.


“내비에 찍힌 대로만 가면 돼. 자, 출발! 출발!”

“누구 만나러 가는지는 알려주셔야죠. 혹시 양은오 작가님 뵈러 가는 거예요?”

강이 거듭 채근했지만, 황 대표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가보면 안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차는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달려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리조트로 향했다.

꽤 한적한 곳에 있던 그곳은 레스토랑과 수영장이 딸린 숙박시설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꽤 고급스러웠다.

한국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


“이야, 이 양반 리조트 좋은 거 갖고 계셨네.”

황 대표가 부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설성 씨는 근처에서 커피라도 한잔하고 있어. 일 마치면 전화할 테니까,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가 건네는 법인 카드를 받아든 설성이 강을 한번 바라보았다.

주변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 같았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황 대표와 함께 걸음을 돌렸다.

리조트는 웬만한 5성급 호텔만큼이나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붉은 카펫이 깔리고 커다란 샹들리에가 걸린 로비에 들어서자, 직원 하나가 나와 그들을 안내했다.

1층 입구 쪽에 있던 라운지를 지나 도착한 곳은 커다란 통창 밖으로 잘 꾸며진 정원과 야외 수영장이 보이는 레스토랑이었다.

이런 날씨에도 수영장이 운영하는 걸 보니, 온수 풀인 것 같았다.

안내를 받아 착석한 강이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살피며 가볍게 입을 뗐다.


“시설도 잘되어 있고, 규모도 큰데…… 생각보다 사람이 없네요?”

“그러게. 휴가철이 아니라 그런가?”

그가 메뉴판을 뒤적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강은 이유 없이 밀려드는 긴장감에 손바닥을 말아쥐며 물었다.


“이제 말씀해주세요. 누구 만나러 온 거예요?”

“아, 그게…….”

굵은 금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으로 턱밑을 석석 긁던 황 대표가 말을 이었다.


“너, 문 엔터테인먼트 알지? 노지태 대표.”

“……!”

“이 주변 땅이 다 그 양반 거란다.”

부러운 듯 혀를 차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 양반이 널 좀 보고 싶어 하더라고. 그냥 밥 한 끼 먹으러 가는 거니까, 편하게 있다 가면 돼.”

노지태를 만날 거라는 말에 놀란 강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걸 왜 이제……!”

그런데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황 대표가 입구 쪽을 보며 활짝 웃었다.


“어! 저기 오네! 대표님, 여깁니다!”

그는 마치 오래된 벗이라도 만나는 것처럼 반갑게 손을 흔들어댔다.

노지태가 양쪽에 비서를 대동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강은 그의 등장만으로 어깨가 짓눌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단순히 로미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몸의 감각이 기민해진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주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강이 간신히 시선을 올리자, 손목에 걸린 메탈 시계를 바라보는 노지태가 보였다.


“이런. 제가 늦은 줄 알았는데, 일찍 오신 거군요.”

“예. 혹시나 늦을까 봐, 서둘러 온다는 게 너무 서둘렀나 봅니다. 하하!”

어딜 가도 좀처럼 굽신대는 모습을 보이는 걸 못 본 황 대표가 연신 손바닥을 비벼댔다.

그녀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지만, 혹시 몽마를 만나더라도 동요하지 말라는 산의 말을 기억하며 최대한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마 그가 정말 몽마의 왕이라면,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밖에 설성이 있으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녀뿐 아니라, 로미도 있을 테니.


‘침착히 행동하자, 침착히.’

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떨리는 손끝을 마주잡았다.


“식사 올릴까요?”

직원 하나가 와서 물은 말에 노지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강 씨 식사도 같이 준비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그가 강을 한번 쳐다봤다가, 황 대표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미리 준비했을 텐데요.”

“아, 네. 대표님이 서강 씨를 워낙 좋아하시는 것 같아, 제가 서프라이즈 이벤트로 한번 준비해봤습니다. 어떻게, 마음에 드십니까?”

그의 말에 노지태가 가볍게 웃었다.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있나요. 서강 씨가 물건도 아닌데.”

받아주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뼈가 있는 말이었다.

민망한 마음에 괜히 더 크게 웃던 황 대표를 강이 노려보았다.

……이 미친 인간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노지태를 앞에 두고 마냥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윽고 테이블 위에 송아지 스테이크가 올려졌다.


“드시죠.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노지태가 권하자, 황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이 포크와 나이프를 쥔 채 덤벼들기 시작했다.

칼날이 접시를 긁는 기분 나쁜 소음이 들렸고, 강은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

그녀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자, 건너편에 앉은 노지태가 느릿하게 시선을 올렸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마른침을 삼킨 강이 길게 눈을 감았다 뜨며 간신히 입술을 뗐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의 시선이 황 대표의 접시 위에 닿았다.

연한 고깃덩이가 썰리며 흘러나온 핏물이 접시 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외면할 수 없는 불길함이 온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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