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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감(感)의 칼날 (103/118)


#103. 감(感)의 칼날
2023.04.23.



 
가시밭에 앉아 모래를 씹는 것처럼 불편한 식사가 이어졌다.

적막 속에 들려오는 건 고기를 입에 가득 문 황 대표가 쩝쩝대는 소리뿐이었다.

강은 먹는 둥 마는 둥 고기를 깨작대며, 건너편에 앉은 노지태를 바라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던 그의 동작엔 아주 조금의 빈틈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면도, 내면도 철갑을 두르고 있는 것만 같은 남자였다.

시선이 마주친 건 불식간의 일이었다.


‘……!’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덩이를 마주하는 것만 같은 기분에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어왔다.

피할 타이밍을 놓쳐 마주하고 있던 3초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노지태의 눈동자에서 붉은 이체를 본 것도 같았다.

최면을 걸려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정체를 포함해 그녀가 노지태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었기에.

한동안 지그시 강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느리게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아무래도 서강 씨 입맛엔 음식이 잘 맞지 않는 것 같군요.”

지태의 말에 그녀는 포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긴장감 때문에 행동이 자꾸 부자연스럽게 나왔지만,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니요, 그건 아닌데 배가 불러서요.”

초조함을 가리기 위해 그녀는 일부러 느리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미리 알았으면 속을 비우고 왔을 텐데.”

“…….”

“아침을 좀 늦게 먹었거든요.”

그러고는 제게 진득하리만큼 달라붙어 있던 시선을 자연스럽게 황 대표 쪽으로 돌려놓았다.

눈치 없는 그는 먹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그 상황에서도 강의 접시에 놓인 고깃덩이를 노렸다.

기다렸다는 듯 포크를 든 황 대표가 그녀의 접시에 놓인 고기를 푹 찍으며 웃었다.


“그럼 이거 내가 먹는다? 괜찮지?”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멀어진 고깃덩이가 그의 입안에서 게걸스럽게 씹어 삼켜졌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시간이 지나고.

테이블 위엔 커피가 한 잔씩 놓였다.

우아한 동작으로 커피 한 모금을 넘긴 지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황 대표님.”

“앗, 뜨뜨!”

한 박자 늦게 커피를 마시던 황 대표가 입에 들어갔던 아메리카노를 반쯤 흘리며 요란법석을 떨었다.


“커피를 용광로에서 끓이셨나, 하하…… 굉장히 뜨겁네요.”

셔츠에 묻은 커피를 아무렇게나 문지르는 그를 잠시 응시하던 노지태가 보이지 않게 한숨을 삼켰다.

그러더니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입을 뗐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예. 말씀하십시오.”

황 대표가 말하자, 그가 미간을 누르느라 기울어졌던 고개를 바로 세우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사적인 자리에 함부로 서강 씨 동행시키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잠시 벙쪄 있던 그가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함부로……? 사적인 자리요?”

하지만 지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건조하게 대꾸했다.


“네.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이제 곧 우리 회사 식구가 될 텐데, 시작도 전에 잡음 생기는 일은 없어야죠.”

“잠시만요! 그게 무슨……!”

우리 회사 식구라는 말에 반응한 강이 끼어들었지만, 황 대표가 그녀의 손등을 꾹 잡아 누르며 말했다.


“하하. 제가 말도 없이 강이 데리고 온 것 때문에 많이 언짢으셨습니까?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요.”

“물론 개인적으로는 서강 씨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엄한 소문 나는 거 순식간이잖습니까? 혹시 오는 길에 사고라도 나면 그것도 곤란하고요.”

“…….”

“알 만큼 아시는 분이.”

쯧.

들릴 듯 말 듯 혀를 차는 소리까지 이어지자, 황 대표도 빈정이 상했는지 덩달아 말투가 삐딱해졌다.


“노 대표님.”

“…….”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아직 거래 전입니다만?”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 그가 지태가 했던 말을 인용하여 말을 이었다.


“대표인 제가 배우를 데리고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제 마음 아닙니까? 아직 우리 회사 식구니까요.”

소속 배우를 제 액세서리나 물건쯤으로 생각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노지태는 소귀에 경을 읽어주는 헛수고 따위 딱 질색이라는 듯 잘라 물었다.


“얼마 원합니까?”

돈 이야기가 나오니 굳었던 황 대표의 얼굴이 금세 느슨해졌다.


“역시. 듣던 대로 성격 한번 시원하십니다.”

엄지 두 개를 척척 흔들던 그가 슬쩍 강의 눈치를 살피며 언성을 낮추었다.


“근데 당사자 앞에 두고 돈 얘기하기가 이거 참…… 허허.”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이맛살이 확 구겨졌다.

황 대표의 태도가 마치 물건을 팔러 나온 장사꾼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노지태가 타박하듯 말했다.


“그래서 제가 대표님만 오시라고 누누이 말씀드렸던 겁니다.”

“아! 제가 그런 깊은 뜻도 모르고! 아아, 이런!”

그가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태도로 유감이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더니 이내 슬쩍 자세를 고쳐 앉으며 노지태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표님.”

“말씀하시죠.”

“아시다시피 강이가 좀 예민한 구석이 있어서 사람 바뀌는 걸 극도로 싫어합니다. 이왕 데려가 주시는 김에 매니저도 같이…….”

“그러죠.”

“정말입니까?”

“문제 될 거 있나요?”

“아니, 그런 말씀은 아니고…… 그 친구가 연차가 꽤 되다 보니 몸값이 제법 나갑니다. 하하.”

“상관없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계산해드리죠.”

황 대표의 얼굴에 감추지 못한 기쁨이 넘쳐흘렀다.


‘뭐야, 이거. 생각보다 얘기가 쉽겠는데?’

잘하면 제대로 한몫 당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주체가 안 됐다.

결국 듣다가 못한 강이 나섰다.


“사람 앞에 두고 뭐 하시는 거예요?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아. 불편했다면 미안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모셔 오려다 보니, 제가 마음이 급했네요.”

그렇게 말하는 노지태는 무척 정중했지만, 아쉬운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모든 건 결국 본인이 원하는 대로 될 거라는 데에 일말의 의심도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걸 본 황 대표가 놀리듯 말했다.


“어우, 대표님. 너무 노골적이시다. 그렇게 강이가 좋습니까?”

“네, 제가 원래 뭐 숨기고 그런 걸 잘 못 하는데, 서강 씨 아주 좋아합니다. 배우로서도.”

“…….”

“그리고 인간으로서도.”

“어이구, 혹시 이성으로 보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뭐, 동성은 아니니까요.”

“와하하! 말씀을 듣고 보니, 이런 선남선녀가 또 따로 없습니다! 이러다 조만간 국수 얻어먹는 거 아닙니까?”

황 대표가 침을 튀기며 웃는 동안에도 강을 향한 그의 눈빛은 숨통을 조일 듯 달라붙었다.

그건 필시 먹잇감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이런 상황 너무 당황스럽네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커피잔을 내려놓던 노지태가 피식 웃었다.


“들은 걸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합니까?”

생각보다 노골적인 지태와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은 강 사이에 끼어 있던 황 대표가 슬슬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 대표님.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게 왜 데리고 나와서는 시작도 전에 관계 초 치게 만드세요. 이래서야 원 호감은커녕, 데리고 올 수나 있겠어요?”

지태의 연이은 타박에도 그는 그저 싱글벙글이었다.


“안타깝지만, 배우 본인이 안 간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아시다시피 얘가 몸값이 워낙 비싼 애라. 하하.”

부르는 대로 주겠다는 말에 영혼까지 팔아넘길 태세로 침을 튀기던 며칠 전과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간을 보기 시작하는 황 대표의 말에 눈만 위로 뜬 지태가 서늘하게 말을 뱉었다.

이것 봐라?


“말이.”

“…….”

“바뀌시네요?”

“이 바닥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허허.”

그제야 지태는 자신이 황 대표에게 걸어놓은 최면의 효과가 미미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돈’에 대한 그의 욕심과 집착이 저에 대한 호감도를 상상 이상으로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돈이라면 물불 안 가릴 미친놈 중 미친놈이라는 것.

그런 황 대표가 서강을 데리고 나온 이유는 저와 흥정을 하기 위함이었다.

배우 하나 넘기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여차하면 회사 자체를 통으로 넘기려는 생각인 것 같기도 했다.


‘생각보다 훨씬 정신 나간 놈이었군.’

지태는 그런 결과를 도출해내곤, 헛웃음을 삼켰다.

강이 더 이상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일어섰다.


“다신 이런 일로 부르지 마세요. 식구끼리 고소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으니까.”

황 대표에게 경고하며 자리를 벗어나려는 그녀의 앞을 건장한 남자 둘이 막아섰다.


“뭐예요. 비켜요!”

강이 둘 사이를 뚫고 나가려고 했지만, 완강한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그녀가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장신의 남자들을 향해 막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

제 앞을 막고 있는 가드들의 눈이 붉은색을 띠었다 사라졌다.

찰나였지만, 강은 똑똑히 그 변화를 목격했다.

붉은 눈동자.

그것은 분명 몽마의 눈이었다.

삽시간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어둡고 묵직한 기운이 공기 중에 섞여 숨도 잘 쉬지 못할 만큼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조금씩 강한 기운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강은 이제 그 기운을 읽어낼 만큼 제 몸의 감각도 기민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빛이 심상치 않은 건 노지태의 비서들뿐만이 아니었다.

가드도, 리조트의 직원들도.

모두 그의 수하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곳은,


‘……위험해.’

몽마의 소굴이었다.


 

.
.
.

그 시각.

로미는 로미 나름대로 강의 주변을 맴도는 중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신휘가 했던 말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우리 대표님이 왕이고, 배후야.’

 


“으으. 어디까지가 진짜인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적에게 알려 득 될 것이 없는 진실이었다.

그건 사실일까?

아니면, 위험한 덫일까.

그녀는 이 일을 쉽사리 천인들에게 알렸다가, 되려 역으로 당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 무척 걱정됐다.

자신이 설성을 따르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 역시 산만큼이나 천인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천인들이 몽마의 왕을 잡고, 융합혼을 차지하기 위해 산을 미끼로 사용한다면?

그래서 산이 다치거나, 죽거나, 혹은 그가 원하지 않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면?

그 빌미를 제공한 자신은 돌이킬 수 없는 일에 평생을 후회의 무게에 짓눌려 살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계에는 설성이나 모아 같은 천인들만 있는 게 아니었고, 설령 설성이 그런 일을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 역시 명을 따라야 하는 위치에 속한 이였기 때문이다.


“아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머리 아파 죽겠네!”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때문에 머리가 아플까?”

“으악!”

놀란 로미가 펄쩍 뛰어올랐다 내려왔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인물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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