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 나는 틀리지 않았어. (104/118)


#104. 나는 틀리지 않았어.
2023.04.27.



 


“아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머리 아파 죽겠네!”

“뭐 때문에 머리가 아플까?”

“으악!”

놀란 로미가 펄쩍 뛰어올랐다 내려왔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며 안경을 추어올리는 이는 다름 아닌,


“서, 설성님?”

설성이었다.

기척도 없이 어느새……?!

무간에서 감을 다질 만큼 다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니!

제가 그만큼 정신이 나가 있던 건지, 아니면 생각보다 설성이 기척을 감추는 실력이 뛰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로미의 생각을 그대로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웃었다.


“뭘 그리 놀라는 게냐? 내가 이래 봬도 설국의 부수장이었다.”

“아아…….”

그제야 로미가 어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에 최적화된 토벌대로 이루어진 설국(雪國).

설원의 고요한 기운만큼이나 은밀하게 적진을 파고들어,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가 바로 설국의 부대였다.

그런 곳의 부수장 출신이었으니, 기척 숨기는 정도야 일도 아닐 것이다.


‘휴. 다행이야.’

무간에 목숨을 걸고 다녀와 쌓았던 감이 죽은 건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여기서 뭐 하고 있던 게냐?”

“저, 저는!”

“집에서 네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었어?”

강의 곁에 제가 있는데 뭐가 그리 걱정돼 따라붙었냐고 묻는 말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 그것이……! 그것이……!”

당황한 로미는 말을 더듬으며 열심히 짱구를 굴렸다.

일단은 태연하게 행동해야 했다.


‘그래. 지금이야말로 나의 연기력을 발휘할 때야!’

그녀는 인간 세상에서 살며 배우로 벌어 먹고살던 짧은 시간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으며 불꽃 연기를 펼쳤다.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그걸 본 설성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확신했다.


“뭔가 어마어마한 걸 숨기고 있구나.”

실패다!

강과 신휘가 나름의 애정을 갖고 연기 지도를 해주었지만, 이놈의 발연기는 당최 늘지를 않았다.


“말해보아라.”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물어오는 설성의 눈을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로미는 결국 그녀에게 반 토막짜리 진실을 토해놓기로 결정했다.


“사실은…….”

어쨌든 노지태가 위험인물이라면, 그에 대비할 병력을 보충해야 할 때였다.


“지금 강이 언니가 만나고 있는 남자의 정체가 의심스러워 따라붙었습니다.”

그녀는 노지태가 몽마의 왕이라는 말은 빼놓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설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만나고 있는 남자라면, 황 대표와 선약이 있다는 남자 말이냐?”

“네.”

“그가 몽마라도 된다는 얘기야?”

“예, 그게 저희 회사 대표님이기도 한데요. 아무래도 근래 느낌이 좀 쎄 해서…….”

그 사실을 신휘를 통해 들었다는 사실도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자 설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있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 되어 미행까지 했지?”

“미, 미행이 아니오라!”

“그럼?”

“아휴, 제가 어떻게 감히 설성님을 미행합니까? 그냥 무간에서 다져온 제 동물적 감이 말하기를…….”

“말하기를?”

어쩌지? 어쩌지? 뭐라고 둘러대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로미가 버럭 외쳤다.


“왜, 왠지 존X 센 놈일 것 같아서!”

“……뭐?”

에라, 모르겠다!


“밑으로 거느리는 수하만 수백인 놈입니다! 장담하건데, 대표가 정말 몽마라면 별 볼 일 없는 놈은 아닐 겁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설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로미는 그 모습이 괜히 저의 속을 꿰뚫어 보려는 행동은 아닌지 싶어, 지레 겁을 먹고 눈을 피했다.

그런데,


“확실히.”

“……?”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싱긋 웃던 그녀가 손을 들어 로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혼의 기운이 강해진 만큼 놈들도 슬슬 움직이겠지.”

“…….”

“게다가 네겐 무간에서 다져온 감이라는 게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거다.”

무엇보다 병력을 강화해야 하는 곳은 강의 주변이라는 사실이었다.

설성은 망설임 없이 일어섰다.

그러고는 로미를 향해 말했다.


“설국의 토벌대를 호출하마.”

 

.
.
.

그 시각.

천계에서는 산의 돌발행동에 한바탕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월국의 수장인 태천이 일국에서 터져 나온 폭발적인 기운을 감지하고는 곧장 달려온 참이었다.


“한 발자국도 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라!”

천공을 울리는 태천의 벼락같은 음성에 그가 이끌고 온 수하들이 일제히 무기를 겨누었다.

수십 개의 칼날이 원을 그리며 산을 조준했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그의 몸에 번개의 형상을 한 금줄이 감기고, 부적의 형태를 띤 성서가 여러 장 달라붙었다.

산은 제 몸을 포박한 줄과 주지(呪紙)를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고작 제 손발 한번 묶어보겠다고 수장이 셋씩이나 달려든 게 어이없다가도, 그들이 읽은 제 기운의 위력을 확인한 것만 같아 만족스럽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새삼 그 위력을 선물해준 강의 얼굴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샜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닌데.’

저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가 무척 보고 싶었다.

조용히 산을 돌려보내려 했던 순우의 얼굴에는 낭패감이 스쳤다.


‘이를 어쩐담. 시끄러워지게 생겼네.’

그는 얼굴을 덮고 있던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 쉬었다.

꽁꽁 묶인 산에게 가까이 다가온 태천이 물었다.


“천계에서 천인을 공격하다니. 네놈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느리게 시선을 밀어 올린 산이 서늘하게 되물었다.


“역시나 저 같은 혼종은 믿을 게 못 되는 놈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

“열여섯에 살려보냈던 게 후회되세요?”

의미심장한 말에 태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은 이내 엉망이 된 몰골의 해미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러는가?”

“쓸데없는 말장난이니,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저 버릇없이 날뛰기에 경고만 하려던 것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산이 말했다.


“저 역시 수장님을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

“그저 다시는 내 부모를 욕보이지 말아 달라 경고한 것뿐이니까요.”

“저놈이……!”

해미가 이를 아득 물며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러자 태천이 손을 들어 저지한 후, 산에게 가서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상세히 설명하라.”

그의 물음에 산의 시선이 천천히 해미를 향했다.

제 입으로 말해야겠냐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해미는 애꿎은 입술만 깨물 뿐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반응을 잠시 지켜보던 산이 다시 태천에게 말했다.


“영감님은 무슨 생각으로 오자마자 저부터 포박하셨습니까?”

“……뭐라?”

“저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큰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

“제가 일국의 물건이라도 훔쳤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이유도 없이 천인들을 몰살하고, 천계를 공격하려 한다고 여기셨습니까.”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그의 음성이 사방에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

하지만 산은 이참에 확실히 묻고 싶었다.


“금기를 깨고 태어난 게 나의 의지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공의의 심판인지.

아니면,


“그러니 제가 죄인의 프레임을 써야만 하는 납득 가능한 이유를 설명해주십시오.”

학살인지.


“…….”

사방에 기름을 들이부은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불티 하나라도 튀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치솟을 것만 같은.

어느 천인도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고, 결국 상황을 지켜보던 순우가 나서야 했다.


“그…… 총수장님.”

“뭔가.”

태천이 묻자, 멀찌감치 있던 해미가 괜히 움찔했다.

어찌 보면 팔이 안으로 굽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전례가 없는 존재와 상황에 경계심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편견을 거두어내고, 사실을 바로 보는 눈이 필요할 때였기 때문이다.


“저희 쪽에서 먼저 공격했습니다.”

“뭐라?”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산은 줄곧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러니 천계든 지하든 그에게는 똑같이 자신을 적으로 보고 경계하는 위험 지역일 뿐이다.

그런 곳에서 정체도 알 수 없는 약을 해독제랍시고 내밀었으니, 이 사건이 애초에 천인들의 계략이었다고 의심해도 무리가 아닐 터.

게다가 어린 그를 산 채로 잡아 와 사형을 논하던 곳이 바로 이곳 아닌가.

천계는 산에게 어머니의 땅이었지만, 그를 품어주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단순히 의구심을 품었다는 사실만으로 난폭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해미의 ‘경고’가 순수한 경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봐도 분명한 적대심을 저렇게 대놓고 드러냈으니…… 언제 죽임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혼의 완성과 인도를 위해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거라고.

순우는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새삼 같은 수장인 해미의 행동과 신념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는 해미가 정확히 어떤 말과 행동으로 산을 모욕했는지 자세한 보고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 부분은 구태여 묻지 않아도 태천 역시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여 산의 사형을 외치고, 그를 지켜보는 와중에도 사사건건 못마땅해하던 게 해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내내 제대로 된 변명도 못 하고 있던 해미도 억울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천계에도 엄연히 법도가 있고, 규칙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과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건 그만큼 어긋나는 것을 유독 견디지 못하는 자신의 성정일 뿐, 잘못된 주장을 하는 건 아니었다.


“언제든 마음만 달리 먹으면 위험해질 수 있는 놈입니다! 시한폭탄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데, 도대체 무얼 얻기 위해 이렇게 한단 말입니까?”

“수장님, 진정하십시오!”

“이거 놔!”

말리던 순우의 손을 뿌리친 해미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외쳤다.


“그깟 융합혼 따위 없어도 천계는 잘만 돌아갑니다! 몽마가 융합혼을 차지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면 죄다 없애버리면 그만이고요!”

길게 뻗은 앙상한 손가락이 거칠게 산을 가리켰다.

흥분한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시작이 저놈부텁니다! 이 일의 원흉이 된 놈이니까요! 당장 죽여야 합니……!”

짜악!

눈이 까뒤집어진 채 발악하던 그의 얼굴이 돌아간 건 찰나의 일이었다.


“그만하지 못하겠나!”

해미의 뺨을 날린 태천이 통박을 쳤다.

사방에 있던 천인들도 놀라 입을 손으로 가리거나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정적이 흘렀다.

벙찐 표정으로 굳어 있던 해미가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짐짓 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태천이 걸음을 좁히며 다가와 말했다.


“그 정도면 됐네.”

“지금 저를…….”

“자네는 이미 말로 몇 번이고, 저 아이를 죽이지 않았는가.”

“…….”

태천의 말에 해미가 사지를 벌벌 떨기 시작했다.

분노와 수치와 혼돈이었다.


“자네의 사정도 알고, 뜻도 알겠지만, 더 이상 경거망동 말게나.”

그렇게 말한 그는 자신의 수하들을 시켜 해미를 일국에서 데리고 나갈 것을 명령했다.

근처에 있던 수하 둘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저, 수장님. 이만 걸음을 물리시지요.”

조심스럽게 권했지만, 해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걷다가 살짝 발을 삐끗하고는 문득 정신이 돌아온 듯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핏발 선 눈에 물기가 고였다.

흐리게 뭉개지는 시야 너머로 몽마의 피를 뒤집어쓴 채 죽어가던 누이의 얼굴이 스쳤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떨리며 새어나온 목소리는 이내 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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