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 230 (105/118)


#105. 230
2023.04.30.



 
해미가 사라진 후.

태천은 산을 포박해둔 것들을 없애주었다.

그러고는 묵직한 한숨을 한번 내쉰 후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우국의 수장을 용서하게나.”

혼종과 몽마에 관한 일이라면 유독 치를 떠는 그의 입장을 대변하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었다.

변명이든 이해든 때가 맞아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결국 태천은 더 이상 해미를 언급하기를 포기한 채 말을 이었다.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

“언젠가 자네도 우리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날이 올지 모르겠군.”

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이해를 논할 관계도, 그럴 시기나 상황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게 불필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융합혼을 꺼낼 수 있는 이는 자네뿐이니,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를 믿어주게.”

“…….”

“약속한 대로 혼이 천계로 무사히 인도되면, 그땐 어떤 일이 있어도 평생 자네의 편이 되어주겠네.”

“저를 천인으로 인정하시고, 받아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태연히 되묻는 산의 얼굴엔 일말의 기대감이나 간절함 따윈 없었다.

소망을 말한 게 아니라, 책임을 꼬집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정적이 흐르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몇 명의 천인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주십시오.”

순우의 말에 수군거림이 멎었다.

하지만 산을 바라보는 제각각의 표정들은 쉬이 사라지질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를 궁금해했고, 어떤 이들은 그런 발언을 한 산을 경멸하듯 바라보기도 했다.

다만 그중 누구도 그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잠시 대답을 고르던 태천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네만,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평화만 약속할 수 있다면야 안 될 것도 없지 않겠나.”

태천의 대답에 산이 산뜻하게 웃었다.


“무책임한 대답 잘 들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얼어 있던 주변이 다시 술렁였다.


“저놈이 감히 뚫린 입이라고……!”

결국 지켜보던 태천의 수하 하나가 발끈해 외쳤지만, 곧 태천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자신이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던 만큼, 산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의 눈이 붉게 빛나며 방금 저를 나무랐던 수하에게 향했다.

그 선득한 시선이 마치 무례를 떨 만큼 나를 아냐고 되묻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만큼 느껴지는 엄청난 압에 그는 이내 몸을 피해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산이 느긋하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런 반응인데, 퍽이나 영감님 말씀처럼 되겠네요.”

“…….”

“이만 돌아갈 문을 좀 열어주셨으면 합니다.”

무간과 인간 세상의 시간만큼 격차가 크진 않았지만, 어쨌든 인간 세상의 시간은 천계보다 빠르게 흘렀다.

자신의 입장을 이참에 확실히 박아놓은 건, 앞으로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만 돌아가야 했다.

강을 위해서도.

그리고 로미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
.
.

한편.

지태는 가드에게 막혀 굳어 있는 강의 뒷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같이 지켜보던 황 대표가 불쾌하다는 듯 말을 보탰다.


“거, 여배우 몸에 함부로 손대고 그러진 맙시다. 예?”

그녀를 막아선 남자들의 눈이 붉게 빛나는 걸 평범한 인간인 황 대표는 보지 못했다.

기민해진 감각에 홀로 그 광경을 목격하고, 주변의 기운을 읽은 강만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할 뿐이었다.

하지만 유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숨이 가빠지고, 입술이 바짝 말라가는데도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지태가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


“보내드리세요.”

“…….”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네요.”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인 그의 명령에 정승같이 버티고 있던 남자들이 비켜섰다.

강은 두 남자를 힘껏 노려보고는 걸음을 내디뎠지만, 문밖을 간신히 나선 걸음은 이내 멈추었다.

황 대표를 두고 가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려서였다.

돈에 눈이 먼 황 대표가 어떤 식으로 노지태를 자극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산이가 올 때까지는 최대한 일을 키우지 말아야 하는데.’

고심하던 강은 교통수단을 핑계 삼아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뭐해요? 빨리 안 오시고? 저 택시 타고 가요?”

“어? 아, 아니. 가야지!”

그런데 지태가 바로 말했다.


“아. 대표님은 앉으시고.”

“네?”

“저랑 하던 이야기는 마저 끝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에 황 대표가 간사한 웃음을 흘렸다.


“아유, 이거 말 몇 마디로 성사될 계약이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서두르지 마시죠. 번갯불에 볶아먹을 콩이 아닙니다.”

“…….”

“대표님 말마따나 귀한 우리 여배우를 택시 태워 보내기도 그렇지 않습니까? 혹시나 중간에 예기치 못한 사고라도 나서 누가 우리 강이 채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지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뜩이나 근본도 없는 하급 몽마들까지 들러붙을 정도로 기운이 강해진 탓에 최대한 일을 조용히 해결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소란을 일으켜 주변의 몽마며 천인들을 죄다 끌어들이면, 엉뚱한 지점에서 그녀의 몸을 상하게 해 온전한 융합혼을 얻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의 농담에 마냥 웃어줄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황 대표는 제가 호랑이의 입안에서 노는 생쥐 꼴이 된 줄도 모르고, 나불대는 입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이게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태를 가만히 살펴보니,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강을 데리고 갈 것만 같은 눈치 아닌가.

이럴 때는 시간차 공격을 위한 밀당이 최고였다.


“빨리 와요!”

강이 소리치자, 황 대표가 잇몸을 만개한 채 손을 흔들었다.


“어! 금방 간다, 강아!”

그러자 노지태가 고개를 돌리며 곧장 말을 끊었다.


“아니요. 아무래도 서강 씨는.”

“…….”

“먼저 가시는 게 좋겠네요.”

느슨하게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던 그가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까딱이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굳게 닫혔다.

완벽한 밀실이 되어버린 레스토랑 안에 갇힌 꼴이 된 황 대표가 움찔 몸을 떨었다.


“어…… 저거 자동문이었나요?”

의미 없는 질문을 던져봤지만, 대답은 어디에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밖에 있던 강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그녀가 두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쿵!


“이봐요! 문 열어요! 저기요!”

목청껏 소리쳐봤지만, 굳게 닫힌 문은 도무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에서는 그녀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묘한 서늘함이 맴돌고 있는 공간 속.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황 대표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눈알을 굴렸다.

의자에 삐딱하게 기댄 채 턱을 괴고 있던 노지태와 눈이 마주쳤다.


“앉으시죠.”

그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황 대표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만난 김에 이야기는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별로 없었다.

더더군다나 이런 일로 이 역겨운 인간을 두 번이나 만날 시간은 더더욱.


“가, 간단히 끝내시죠. 대표님. 아시다시피 여배우를 혼자 택시 태워 보내기도 그렇고…….”

“그러니까 내가 둘이 보자고 했잖아.”

“…….”

“약속은 괜히 하는 줄 알아?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웃음이 사라진 노지태의 얼굴은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안 하는 황 대표를 바짝 얼게 할 만큼 소름 돋는 위압감이 어려 있었다.

대꾸도 못 하고 굳어있는 그를 지태가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황 대표 같은 인간은 세상에 아주 많았지만, 눈앞의 놈은 그중에서도 상위 1% 안에 들 만큼 돈에 환장한 놈이었다.

여차하면 가족들은 물론, 제 영혼까지 팔아넘길 놈.

그러니 돈으로 다루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욕심이 많아도 너무 많은 황 대표가 시간을 지체하며 장난질을 치려고 한다는 게 문제였다.


“조용히 일만 진행했으면, 회사를 넘기든, 배우를 넘기든, 아쉽지 않을 만큼 값을 쳐줬을 텐데, 왜 일을 이따위로 만들지?”

“아니, 그, 저는 뭐 일단 얼굴이라도 터서 친분이라도 쌓게 해드리면 더 좋아하실 줄 알고…….”

그 말에 노지태가 실소를 터트렸다.

제가 누구와 거래하는 줄도 모르고, 감히.

황 대표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려 원하는 걸 손에 얻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사회적으로도 얽힌 눈들이 많은 거래다 보니 입맛대로 일을 주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 됐든, 지금 당장의 목표는 서강을 제 시야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지켜보는 일이었고, 그날이 오기까진 어떤 소란도 득이 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

“내가 얼마를 부르든 당신이 시일 내에 서강을 넘길 생각이 없다는 건 아주 잘 알겠어.”

황 대표는 순식간에 공기의 흐름이 뒤바뀌는 걸 느꼈다.

이 순간 느긋한 건 오롯이 노지태 한 사람뿐이라는 것도.

지태는 배부른 사자처럼 눈앞의 사냥감을 응시했다. 그러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곤, 느긋하게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회사에 생각보다 적이 많으시던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횡령도 꽤 해드셨고, 일부 직원들은 개만도 못하게 다루는 거 보니, 밤길에 칼 맞아도 할 말 없겠던데요?”

뿌연 연기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거요! 증거 있어요?”

“증거?”

피식 웃던 지태가 말을 이었다.


“당신 회사에서 몸 바쳐 일하던 당신 직원들이 바로 그 증거야.”

“…….”

“서강 씨 매니저 알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황 대표의 얼굴이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반응을 보니 알만했다.


“그래요. 이삼영 씨요.”

노지태가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게 잘 좀 해주지 그랬습니까.”

 

.
.
.

문밖에 있던 강이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하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데리고 나오지?’

황 대표를 어떻게 해야 데리고 나올 수 있을지를 궁리하던 그때였다.

저 멀리서 익숙한 누군가가 나타난 게 보였다.


“……오빠?”

삼영이었다.


“강아.”

“……오빠가 여긴 웬일이야?”

다가온 그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그런데 그때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다가와 삼영에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노지태 대표님과 선약이 잡혀 있는데요.”

그가 대답하자, 의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남자가 말했다.


“선약하신 분은 이미 안쪽에 계십니다만.”

“네? 그럴 리가 없는데?”

“이쪽으로 오셔서 명단 확인 한번 부탁드립니다.”

삼영이 그를 따라가자, 직원이 입구에 놓인 서류를 내밀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삼영입니다.”

“이선영이요?”

“아니요. 이삼영이요.”

그가 손가락 두 개와 세 개를 연달아 펼치고는, 다시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붙이며 말을 이었다.


“숫자 이백삼십(230) 할 때, 그 이삼영이요.”

무던히 흘러나온 대답에 강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몽마의 진짜 이름과 힘은 숫자에 숨겨져 있어.’

 
왜 그 순간에 산의 경고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지만, 삼영이 방금 건넨 말이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들어 빠지질 않았다.


‘숫자 이백삼십(230) 할 때, 그 이삼영이요.’

 
뒤늦게 명단을 확인한 직원이 말했다.


“아. 여기에 있네요. 죄송합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대표님께 갑자기 연락받은 거라서요.”

명단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그가 환히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온 힘을 다해 부정하면서도 끝내 떨쳐내지 못한 깨달음이 있었다.

위험은 늘 감춰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대놓고 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