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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당신 차례 (106/118)


#106. 당신 차례
2023.05.04.



 


‘숫자 이백삼십(230) 할 때, 그 이삼영이요.’

 
삼영의 마지막 말만 뇌리에서 맴도는 와중, 뒤늦게 명단을 확인한 직원이 말했다.


“아. 여기에 있네요. 죄송합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대표님께 갑자기 연락받은 거라서요.”

환히 웃는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요동쳤다.

아닐 거라고, 그럴 리 없다고.

온 힘을 다해 부정해봐도 집채만큼 몸을 키운 두려움은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묶어버렸다.

그때 삼영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사색이 된 얼굴로 뒷걸음질 치는 강에게 손을 뻗었다.


“강아. 안색이 왜 이래? 어디 아파?”

지극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철저히 계산된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쳐내버렸다.


“손대지……!”

삼영의 얼굴이 굳었다.


“……왜 그래?”

“…….”

그걸 보는 강의 얼굴도 혼란으로 일그러졌다.

만일 그가 정말로 몽마라면.

애초에 저를 노리고 접근한 왕의 측근이라면.

그땐 모든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데.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제발 그것만큼은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이 순간.

정체가 명확한 이들 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강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답해줘. 오빠가 여기에 왜 있어?”

“…….”

“말 안 해줄 거야?”

그저 적당히 웃기만 하던 삼영은 그녀의 채근에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실은.”

그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노지태 대표님한테 이거 넘기러 왔어.”

물기가 비치던 강의 눈동자가 가방과 삼영을 번갈아 보았다.


“그게 뭔데?”

“그동안 황 대표가 해먹은 횡령자료랑 직원들 진술서. 그리고 진단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그녀는 커다란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보고, 들으면서도 가늠이 되질 않았던 탓이다.


“그런 걸 왜 문 엔터 대표한테…… 아니, 그보다 진단서라니?”

“그건 얘기가 마무리되면 자세히 얘기해줄게.”

“…….”

“피해자 프라이버시도 있으니까.”

그가 고갯짓으로 서류 가방을 가리키곤 이해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너는 왜 나와 있어?”

삼영은 왜 여기에 있냐고 묻지 않고, 왜 나와 있냐고 물었다.

마치 제가 여기 올 걸,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뭐가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결국 강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털어놓았다.


“대표님이 점심 약속이라고 무작정 데리고 왔어. 이런 자리인 줄 모르고 온 거라…… 불쾌해서 먼저 일어난 참이고.”

“황 대표답다.”

“…….”

“너도 너답고.”

황 대표 얘기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그는 이내 강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래, 그럼 차로 가 있어. 밖에 설성 씨 있더라.”

“……만났어?”

“응. 새로 온 매니저라며.”

“아니야. 그냥 임시로 잠깐…… 봐주시는 분이야.”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삼영이 혹시나 이 일로 상처 입을까 싶어, 대답을 골랐다.

그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

강은 혼란스러웠다.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삼영의 모습에 그의 이름이 숫자로 이루어진 게 공교로운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 정체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괜한 걱정이었던 걸까?

아니면 이 순간까지 그가 보이는 태도와 말, 모든 게 거짓인 걸까.

그런데 그때.

명단 확인을 돕던 호텔 직원 하나가 다가와 삼영에게 말했다.


“들어오시죠.”

“아, 네.”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 그가 강의 어깨를 떠밀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직원이 끼어들었다.


“서강 씨도 함께 모시고 들어오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아, 저희 배우님은 좀 바빠서…….”

“함께 모시고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직원의 반복된 말은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삼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냐, 강아? 볼꼴, 못 볼 꼴 다 보게 생겼네.”

그렇게 말한 그는 농담처럼 혼잣말을 덧붙였다.


“하여간 노 대표님, 성격 한번 급하시다니까. 사람이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참…….”

뒤따른 말에 강의 심장은 다시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너무나도 다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일일이 그런 걸 물고 늘어질 여유는 없었다.

만약 삼영이 몽마가 아니라면, 그것대로 그가 노지태와 남겨질 상황이 걱정되었고, 그가 몽마라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의 권한조차 이미 제겐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오늘 이 리조트를 찾은 손님들은 없었고, 사방이 노지태의 수하들이었다.

어설프게 도망치려 해봤자, 자칫 그를 자극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댔어.’

지금은 냉정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믿어야 했다.

절대 자신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산과 밖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설성을.


“가시죠.”

로봇이나 진배없는 직원을 따라 삼영이 먼저 걸음을 뗐고, 강이 그 뒤를 따랐다.

.
.
.

그 시각.

천계에서는 돌아갈 길을 열어달라는 산의 부탁에 태천이 명했다.


“천계의 문을 열어라.”

“네, 알겠습니다!”

월국의 수하들이 즉각 대답했다.

안개처럼 퍼져있던 구름이 걷히자 천계의 입출구로 연결되는 커다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하 둘이 가서 육중한 문을 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가는 그를 향해 태천이 말했다.


“혼이 천계에 무사히 인도될 수 있게, 잘 부탁하네.”

그에 미련 없이 걸음을 떼던 산의 발이 잠시 멈추었다.

반쯤 고개를 돌린 그가 뜻 모를 미소를 머금었다.

산은 잠시 천계를 둘러보고는 이내 가볍게 묵례한 후 다시 멀어졌다.

결국 대답은 듣지 못한 상태였다.

태천과 순우를 포함한 천인들이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조금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손쓸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산의 마음이 변심해 위험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천계의 문을 나선 그는 이계의 틈을 지나 인간 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나가는 길은 천인들의 결계가 없이는, 언제 괴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곳이었다.

반드시 천인의 동행이 필요한 이유였다.

그걸 무엇보다 잘 아는 천인들이 동행 없이 산을 내보낸 건 필시 그의 능력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산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이제껏 먹어온 강의 악몽이 제게 얼마나 큰 힘을 내주었는지는 일국에서 벌어진 소동으로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그녀야말로 불완전했던 자신을 완성하는 마지막 열쇠였다.

오직 강을 만나러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걸음이 빨라지던 그때.

난데없이 이계의 틈이 벌어지며, 연기 같은 형상의 괴수 하나가 튀어나왔다.


「키에엑!」

붉은 눈을 번뜩이며 입부터 벌리고 달려드는 놈은 몽마였다.

형태는 있지만, 인간의 형상을 갖추지 못하고, 짐승의 것들을 엉터리로 갖다 붙인 것 같은 기괴한 몰골.

기를 읽어보니, 중급 정도 되는 몽마였다.

산은 제게 달려드는 놈을 향해 한쪽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제 몸의 두 배 정도 되는 녀석의 목을 잡고, 그대로 비틀었다.

꽈드득!


「끼……!」

뼈가 으스러졌고, 산은 핏줄이 도드라진 손을 움켜쥐어 녀석을 터트려버렸다.

푸악!

사방으로 검붉은 피가 튀었다.

놈은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그대로 불티가 되어 흩날렸다.

겉가죽이 먼저 타버린 후 남은 뼈의 잔재가 바닥으로 후두둑 쏟아진 채 타올랐다.

그는 피범벅이 된 손을 허공에 털며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혼이 천계에 무사히 인도될 수 있게, 잘 부탁하네.’

 
산은 태천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일을 해.”

뺨에 튄 붉은 핏방울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은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내 일을 할 테니까.”

그렇게 산은 끝도 없이 펼쳐진 어둠 속을 거닐었다.

그만의 빛을 따라.


 

.
.
.

직원의 안내를 받고 다시 들어간 레스토랑 안의 풍경은 강이 나올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욕심 많은 두꺼비 같던 황 대표의 표정이 꼬리를 바짝 말아 넣은 똥강아지 같아졌다는 것.

그는 비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삼영의 얼굴을 본 황 대표의 얼굴은 엄청난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사색이 되어 질려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앉으시죠.”

지태가 일어나 정중히 인사하자, 삼영이 가벼운 미소를 띠며 묵례하곤 노지태와 황 대표 사이에 앉았다.


“서강 씨는 그 옆에 앉으시면 되겠고.”

그가 덧붙여 말했고, 강이 못 이긴 척 삼영의 옆자리에 다시 착석했다.


“이, 이삼영.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지레 겁을 먹은 황 대표가 애꿎은 삼영을 쪼아댔다.

삼영은 대꾸하지 않았고, 지태 역시 그를 무시하며 삼영에게 제 할 말만 건넸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예. 덕분에요.”

“좋네요. 준비한 자료는 가져오셨죠?”

“여기 있습니다.”

삼영은 준비해온 서류 가방을 노지태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황 대표가 발끈해 당장이라도 삼영의 멱살을 틀어쥘 듯 말했다.


“너…… 이 새끼, 어디서 감히 회사 기밀문서를……!”

그러자 노지태가 픽 웃었다.


“기밀문서요?”

“…….”

“여기에 뭐가 들어있을 줄 알고?”

초조함에 제 발등을 찍은 꼴이 된 황 대표가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가 뒤늦게 다물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지 그는 떨리는 손으로 유리컵을 움켜쥔 채 냉수만 벌컥벌컥 마셔댔다.

황 대표는 제발 아니길 빌었지만, 지태가 삼영에게 건네받은 서류는 멀리서 봐도 회계장부가 분명했다.

결국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그가 먼저 치고 나갔다.


“사람 이딴 식으로 모함해도 되는 겁니까? 당신 솔직히 말해 봐! 처음부터 내 회사 날로 먹을 계획이었지? 엉? 그래서 이삼영이랑 짜고, 일부러 입사시켜서……!”

“알아서 무덤을 파시네.”

“뭐, 뭐?”

“입 열수록 손해 보실 거 같으니, 좀 다물고 계시는 게 어때요?”

지태의 말처럼 황 대표는 스스로 무덤을 파다 못해, 관짝까지 짤 기세였다.

궁지에 몰린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삼영을 향해 눈알을 부라리며 온갖 분노를 쏟아붓는 것뿐이었다.

평소의 삼영이었다면, 그런 황 대표와 눈도 못 마주쳤겠지만, 그는 경멸이 섞인 눈으로 황 대표의 시선을 받아쳤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강도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서류를 훑어보던 노지태는 이내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펼쳤다.


“예상했던 것보다 대단히 과감히 해 드셨네요.”

“해, 해 먹긴 뭘 해 먹어! 내, 내, 내가 횡령이라도 했다는 거야, 지금?! 어?”

이쯤 되면 무덤 파는 게 특기가 아닐까 싶었다.

실소하던 지태가 손끝으로 서류의 모퉁이를 짚고는 그대로 죽 밀어내며 말했다.


“횡령뿐이면 다행이게요? 직원들한테 했던 폭행, 협박, 성추행까지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데.”

“포, 폭행이라니! 협박이라니! 성추행이라니이이!!”

“직접 확인해보시죠.”

황 대표는 지진이 난 동공으로 서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셔츠가 흥건히 젖을 정도로 흘러내린 땀은 이제 그의 눈까지 따갑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을 투박하게 닦아내며 턱을 덜덜 떨었다.

지태는 그런 황 대표를 바라보며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대고 깍지를 꼈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그 위로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뿌린 만큼 거두고, 죄지은 만큼 벌 받는 게 세상 이치 아니겠습니까?”

“…….”

“이제 당신 차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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