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 전쟁의 서막(1) (107/118)


#107. 전쟁의 서막(1)
2023.05.07.



 


“뿌린 만큼 거두고, 죄지은 만큼 벌 받는 게 세상 이치 아니겠습니까?”

“…….”

“이제 당신 차례예요.”

그가 어떤 불법을 저지르고, 윤리적으로 무슨 잘못을 했는지 따위는 관심 없었다.

황 대표에게 잘못이 있다면, 필요 이상으로 욕심이 과하다는 것.

그리고 그 과욕이 부른 결과가 제 계획에 방해된다는 것.

그뿐이었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상황을 주시하던 강은 죄와 벌을 논하는 노지태의 태도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천인과 몽마들에게 명확한 선과 악의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건 이미 산을 통해 경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몽마의 왕이라는 자가 죄를 들먹이며 세상의 이치를 거론하다니.

웃픈 일이었다.

그녀는 노지태와 황 대표를 번갈아 보다가 마지막으로 삼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

그늘진 그의 얼굴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과연 이 중에 진짜 악(惡)은 누구인가.

이제는 그 경계마저 흐려질 지경이었다.

한편 황 대표는 멎어버린 사고회로를 돌리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다.


‘씨X. 이게 뭔 개 같은 상황이야, 지금? 확 그냥 들이받아? 아니면…….’

분위기를 보아하니 적당히 빠져나가긴 글렀고, 그렇다면 납작 엎드려야 할 판인데, 타고난 성질머리가 있으니 그게 참 어려웠다.

하지만 돈 앞에서 그깟 자존심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재수 없으면 여태껏 일궈놓은 게 몽땅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판에.

황 대표는 마음을 고쳐먹고는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엎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멋쩍게 웃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거 뭔가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걸 받아주기엔 지태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는 게 문제였다.


“오해고 나발이고.”

“…….”

“서강 넘길 거야, 말 거야.”

그는 이제 강이 있든지 말든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그 고압적인 태도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던 그때.


“황 대표님.”

삼영이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지만, 삼영의 시선은 정확히 황 대표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횡령한 회삿돈 제자리로 돌려놓으시고, 상처 줬던 직원들에게 찾아가 사과하세요.”

“뭐, 인마?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사과도 때가 있는 겁니다.”

그는 처음으로 날것 그대로의 질타를 쏟아부었다.


“제가 드리는 마지막 기회를 저버리지 마세요.”

삼영의 말에 황 대표의 일그러진 얼굴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뒷목을 잡고 실소했다.


“……하!”

하하!

어이없다는 듯 튀어나온 웃음은 이내 대소로 이어졌다.


“와하하하하!”

황 대표는 마치 실성이라도 한 사람처럼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지루하다는 듯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지태가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매니저님.”

“…….”

“권선징악은 넣어두시고, 이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드시는 게 어떨까요.”

그건 삼영을 향한 경고였다.

네 역할은 이쯤에서 끝났으니,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잡아먹지 말라는 경고.

삼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는 곧 피곤하다는 듯 이쯤에서 상황을 마무리 짓자고 말했다.


“계약은 처음 얘기했던 조건으로 합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서류를 모아 흔들며, 경고하듯 말을 이었다.


“시간 끌면 재미없을 테니까, 그런 줄 아시고.”

인내가 바닥난 지태의 태도에 황 대표의 짧은 인내도 끊어지고 말았다.

기껏 납작 엎드려 돌아오는 결과가 변한 게 없다면, 반대로 아주 대차게 엎을 차례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왕 엎을 거라면 어설프게 엎지 말고, 아주 살벌하게 엎어야 했다.

제기랄!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이 조폭 양아치 같은 새끼가 어디서 감히……!”

콰앙!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친 건 지태였다.

그 바람에 발악하던 황 대표가 놀라서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어버버하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지태가 말했다.


“그 조폭 양아치 같은 놈들이 왜 안 사라지는 줄 알아?”

“…….”

“너 같은 새끼 때문에 그래요. 좋은 말로 하면 못 알아먹고, 꼭 짐승마냥 두들겨 패야 말을 듣는 너 같은 새끼 때문에.”

“뭐? 새끼……?!”

“바쁜 사람 붙잡고, 이러지 맙시다. 예?”

말로 해결 가능한 건 여기까지라는 그의 말에 황 대표는 간담이 바짝 쪼그라들긴 했지만, 쉬이 흥분을 가라앉히질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기 전까지 생생히 그렸던 일확천금의 꿈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상황이기 때문에 그랬다.

게다가 말로 안 하면 뭐?

드럼통에 시멘트랑 같이 부어서 바다에 매장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물정 모르는 양아치 새끼가!

돈에 눈이 먼 그는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나처럼 존재감 큰 사람한테 이딴 협박이 통할 것 같아?! 씨X 없던 일로 해! 수천억을 줘 봐라! 내가 너한테 서강 넘기나! 재수가 없으려니까, 진짜!”

옆에 있던 건장한 남자 하나가 황 대표를 제지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되레 그에게 엎어치기를 당하고 나동그라졌다.

쿠당탕!

그 황소 같은 힘에 곁에 있던 이들도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이 X만한 새X가. 내가 빌빌 기어주니까, 너까지 날 호구 등신으로 보냐? 엑스트라는 꺼져, 이 병X 새X야!”

황 대표는 씩씩대며 지태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야, 조폭 새끼처럼 구는 거, 너만 할 줄 알아? 나도 왕년에 한가닥했던 놈이야! 너 사람 잘못 봤어, 이 개X끼야!”

그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셔츠 단추를 뜯자, 가슴팍에서 매생이를 가발처럼 뒤집어쓴 용의 머리가 꿈틀댔다.

경악한 강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고, 삼영은 그런 강의 눈을 손을 뻗어 가려주었다.

지태는 그 광경이 무척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돈에 눈이 먼 인간들을 숱하게 봐왔지만, 저 정도의 집념을 가진 놈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니라 몽마였다면 가공할 위력이었을 텐데.

아니면 차라리 운동선수를 했다면, 국민 스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인재였다.

엉겁결에 가드 하나를 매친 그는 이내 강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야! 일어나! 집에 가게!”

“아파요!”

“빨리 안 일어나?!”

그 순간 삼영이 그의 손목을 잡으며 제지했다.


“그만하세요! 뭐 하는 짓입니까?”

“뭘 그만해, 새꺄! 안 놔? 이게 쥐약을 처먹었나 똥폼 잡고 자빠졌네! 너는 해고야, 이 개X끼야! 내가 너 소송 걸어서 콩밥 먹이고, 들어가기 전에 팔, 다리 다 분질러 놓을 거야! 알아들어? 어디 대표를 X같이 보고!”

평소였으면 눈을 질끈 감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을 그가 황 대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끝까지 이러실 거예요?”

“아아. 나한테 사과받을 사람이 너였어? 그동안 나한테 처맞은 게 그렇게 억울했구나? 그렇지? 에라이! 아임 쏘리다 이 새끼야. 됐냐?”

“…….”

“그리고 용서를 지껄일 거면, 사고 치기 전에 나랑 딜을 했어야지! 죄다 팔아넘기곤 이제 와서 그딴 소리를 운운하냐, 이 모지리 새끼야?”

그 순간이었다.

노지태가 까딱한 손짓 하나에 황 대표가 저만치 나가떨어진 것은.

콰앙!

쿠당탕탕!

벽으로 날아간 그의 육중한 몸이 테이블에 한 번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꺄악!”

정말 눈 한번 깜빡할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강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허…… 허으윽!”

고통에 신음하던 황 대표에게 다가간 노지태가 그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여간 인간들은 좋은 말로 하면 듣지를 않아요.”

그러고는 비스듬히 고개를 꺾어 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목이 틀어쥐어지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며 숨을 멈추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며 붉게 눈을 빛내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쯧. 역시나 안 먹히네.”

황 대표를 조져놓고, 기억에서 삭제하려고 최면을 시도해봤지만, 융합혼이 완성되어가는 상태의 강은 최면이 통하지 않았다.


“뭐, 상관없지.”

때는 곧 올 거고, 이미 일은 저질러졌으니까.

길게 눈을 감았다 뜬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유감이지만, 기억을 지우는 건 안 되겠으니, 알아서 못 본 셈 치세요.”

그러고는 입술 끝을 보기 좋게 올리며 염려하듯 말했다.


“그리고 몸 상하지 않게 각별히 주의 부탁드립니다.”

“…….”

“당신 몸은 잘 키워서 내보내야 할 보물을 품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그는 손에서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듯한 형상의 검을 뽑아냈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걸어가 나동그라진 황 대표의 앞에 섰다.


“저승 가는 노잣돈은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죠.”

“으, 으윽…….”

“잘 가요.”

지태가 그의 심장을 겨누며 조용히 인사했다.

놀란 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안 돼! 그만둬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쿠콰쾅!

커다란 마찰음과 함께 전면의 통유리창 하나가 박살 났다.


“멈춰라!”

부옇게 인 먼지 사이로 커다란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에 거품을 문 채 기절한 황 대표의 심장을 겨누던 지태의 칼끝이 흔들렸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꺾으며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깨진 유리창의 파편과 무너진 자재들 위에 된 설성이 서 있었다.

강이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설성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게 전부라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뭡니까?”

느긋하게 정체를 묻는 지태에게 설성이 대답했다.


“화국천인(華國天人) 수장, 설성이다!”

“화국의 수장이라고?”

천천히 그녀의 말을 되뇌던 그가 미간을 좁히며 반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네요. 화국의 수장이었던 여자는 내 손에 이미 죽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태가 모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안 강과 설성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시끄러워!”

“…….”

“천인을 죽인 걸로도 모자라 또 다시 인간을 해하려 하다니. 당장 검을 거두지 못할까!”

그에 지태가 코웃음을 쳤다.


“내 형제이자 지하 세계의 통치자도 죽인 난데.”

“…….”

“그깟 천인이나 인간 목숨이 대수겠습니까?”

“닥쳐!!”

그렇게 외친 그녀는 손바닥에서 곧장 등에 메고 있던 무기를 뽑아내 노지태에게로 던졌다.

여러 겹의 천으로 봉인되어 있던 무기에서 빛이 발하고, 겉에 싸여있던 천이 모두 풀리자 온전한 검의 형태가 드러났다.

직선으로 빠르게 날아든 검은 지태의 뺨과 머리카락을 살짝 스치며 빗겨나갔고, 그의 시선은 저를 위협적으로 스치고 지나간 칼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삼영의 손에 쥐어졌다.

그가 검을 쥐는 것과 동시에 폭발하는 듯한 강풍이 불었다.


“꺄악!”

순간적인 힘에 밀려 넘어질 뻔한 강의 손목을 덥석 잡은 삼영이 검을 든 손은 지태에게 뻗었다.

안개를 흩뿌린 듯 흐렸던 시야가 선명해지며, 강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눈앞에 금빛 수가 놓인 하얀 제복을 입은 삼영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지?”

지태가 물은 말에 삼영이 덤덤히 말했다.


“설국천인(雪國天人).”

“…….”

“수장, 삼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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