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전쟁의 서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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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전쟁의 서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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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전쟁의 서막(2)
2023.05.11.
“설국천인(雪國天人).”
“…….”
“수장, 삼영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삼영의 정체에 강은 머리를 강하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의 등장에 동요한 건 지태도 마찬가지였다.
“……설국의 수장이라고?”
천계의 오국(五國)중 유일하게 부재중인 수장을 대신해 부수장이 임시로 수장의 직무를 대리하고 있는 곳이 설국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래전 갑자기 사라져버린 설국의 수장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있을 줄이야.
인간 이삼영을 포섭할 때만 해도, 최면이 잘 먹혀든 거라고만 생각했다.
불쌍할 정도로 황 대표에게 당한 게 많았던 삼영은 아주 오랫동안 오늘을 준비해온 것만 같은 상황이라, 모든 게 수월했고.
그런 그의 정체가 설국의 수장이란 사실은 정말이지, 다시 곱씹어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쯤 되니 어디까지가 인간 이삼영의 모습이었고, 어디부터가 천인 삼영의 계획이었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예상 밖의 상황에 가늘게 늘어져 있던 그의 시선은 이내 기절한 황 대표에게 향했다.
“황 대표가 꼬리를 아주 많이 달고 왔네요.”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비틀어버릴 듯 응시하던 지태는 다시 삼영을 향해 고개를 꺾으며 나긋하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
“아무리 수장이라도 고작 천인 둘로 내 상대가 되겠어요?”
말끝에 바람 같은 웃음이 실렸다.
“게다가 인간으로 살아온 세월이 꽤 돼서 감도 많이 떨어졌을 텐데.”
인간인든, 몽마든, 하물며 수인까지도.
인간 세상에 섞여 그들과 오래 지내 온 것들은 이상하리만치 인간을 닮아간다. 어리석게도.
하지만 삼영은 외려 그의 말이 재미있다는 듯 악의 없는 얼굴로 웃었다.
“아이고…….”
그러고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난감한 표정으로 벌게진 귀를 문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태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고, 그 변화를 똑똑히 목도한 삼영은 느긋하게 도발을 이어갔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너무 후한 거 아닙니까? 듣는 내가 다 민망해서, 원.”
그가 한 말에 지태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폭하려는 건가?
불쾌감은 둘째치고,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상황을 보고도, 내가 별 볼 일 없는 몽마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가 묻는 말에, 삼영이 다시 되물었다.
“그럼, 왕이라도 되나요?”
“그렇다면?”
그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
이제 와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영은 태도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별반 달라질 건 없지요.”
그저 어깨를 조금 올렸다 내릴 뿐이었다.
그 반응을 본 지태가 느리게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반응이 예상을 빗나가지 않음에 삼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황 대표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인내가 좋은 놈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모든 싸움의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정신력’이다.
흥분하는 순간, 판단이 흐려질 테고, 허점은 그 순간 드러난다.
삼영은 이 점을 노렸다.
강의 몸에 있는 혼의 융합이 완성되면, 그땐 천인과 몽마의 대전쟁이 벌어질 텐데, 그날이 오기 전에 상대의 역량을 반드시 파악해두어야 했다.
사실상 천계와 지하의 룰이 깨진 순간부터 긴 싸움이 이어져 왔지만, 선대 왕이었던 일리를 포함해 현재 몽마의 왕인 이사오와는 직접 부딪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삼영은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천인과 몽마와 인간의 공통점은 어느 정도 능력치를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데에 있지.”
“…….”
“선대 몽마의 왕이었던 이일리(212)는 그 부분에서 전무후무한 자였어.”
천계와 지하 사이에 맺어진 협약을 깨지 않고도 왕의 자리를 지켜온 자.
인간을 죽여 영을 흡수하지 않고도, 감히 힘으로는 대적할 자가 없던 자.
그가 바로 현 몽마의 왕인 노지태(245)의 형이자, 산의 아버지인 이일리(212)였다.
“힘이 곧 권력인 지하의 아주 오랜 역사 동안 이일리를 뛰어넘는 몽마는 탄생하지 않았다지?”
“…….”
“그런 형을 질투한 지금의 왕이 온갖 더러운 술수로 제 형과 형의 여자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했다는 이야기는 천계에서도 소문이 자자하거든.”
몽마들의 세계야말로 노력이 타고난 것을 이기지 못하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태를 도발하고자 했던 말이었지만, 이미 그들이 더 잘 아는 명백한 사실이기도 했다.
만약 이일리에게 지킬 게 없었다면, 자신이 어떤 수를 썼다고 해도 결코 그를 뛰어넘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 사실은 이사오에게 있어 치욕스러운 불명예였고, 뗄 수 없는 꼬리표였으며, 어떻게든 덮고 싶은 진실이기도 했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럴듯한 오만으로 포장된 그의 낮은 자존감과 실체가 삼영의 눈썰미에 단번에 간파당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삼영은 지태를 더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제법 평화롭기까지 하던 지하도 예전 같지 않다더군.”
이일리에게 절대 복종하던 몽마들은 너도 나도 인간의 혼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고, 비록 우애따윈 없을지라도 뿌리가 같아 모두가 형제였던 그들은 호시탐탐 서로의 목숨을 노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왕을 향한 절대 복종의 룰도 깨져버렸다.
지능이 없는 하급 몽마들은 본능만을 좇아 더 퇴화했고, 뿔뿔이 흩어진 몽마들은 제각각 힘을 키워 왕의 눈을 피해 멋대로 살아갔다.
한 마디로 ‘무리’의 개념이 사라져버린 통제 불능의 상태.
이사오는 지하를 통치하는 왕이 되길 원했지만, 정작 권력 앞에 무릎 꿇어가며 생존과 복종을 택한 몽마들은 그가 원하는 만큼 많지 않았다.
그중에는 그들의 세계에 이미 ‘왕’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고 여기는 몽마들도 적지 않았으니까.
이마에 핏줄이 툭 불거져 나올 만큼 사나워졌던 지태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래서?”
“…….”
“쪽수로 밀어붙이면 해볼 만할 것이다, 이런 판단이라도 한 건가?”
잠복해있던 천인들의 기척을 모두 잡아낸 그가 비웃듯 말했다.
그와 동시에 삼영과 설성을 둘러싸고 있던 리조트 안팎의 몽마들 주위로 천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하얀 사자들이 제각각 해방한 무기를 포위망 안에 들어온 검은 몽마들의 머리를 노렸다.
그때 삼영과 가장 가까이 있던 몽마 하나가 불시에 그의 뒤를 덮쳤다.
하지만 이내 어디선가 날아든 금빛 화살을 맞고 머리가 터져 소멸했다.
퍼어엉!
정적이 흐르던 공간이 흐름이 뒤틀렸다.
불티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한 몽마가 쓰러지자, 그에게 가려져 있던 천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눈처럼 하얀 은발을 휘날리며 활을 들고 있는 아름다운 외모의 남자.
“오랜만입니다, 수장님.”
설국의 부수장인 형설이었다.
삼영은 형설 뒤로 포진된 설국의 토벌대를 바라보았다.
천계의 명에 따라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인간으로 살아온 세월이 짧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든든한 수하들은 그 시간만큼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삼영은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운 저를 대신해 수장의 임무를 완벽히 해낸 형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잘 지냈니?”
그러고는 웃으며 재회의 인사를 건넸다.
형설과 그의 뒤를 가득 채운 천인들도 미소로 화답했다.
“회포는 조금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한 명도 빠짐없이 다시 모이자고 인사를 마무리한 삼영은 다시 시선을 돌려 지태를 향해 말했다.
“뭐, 보시다시피 쪽수로 밀어붙이는 거.”
“…….”
“해볼 만하겠네요.”
그의 말처럼 리조트를 둘러싼 수많은 설국의 토벌대들이 설원처럼 허공을 뒤덮은 채,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그 수는 포위망 안에 들어온 몽마의 수를 월등히 뛰어넘었다.
강은 눈앞의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평소 같지 않은 표정과 말투, 그리고 목소리.
그는 삼영이 확실한데, 자신이 알던 삼영이 아니었다.
“오빠.”
그녀가 입을 벙긋거려 불러봤지만, 그는 여전히 검을 길게 겨눈 채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다정한 말투로 강에게 말했다.
“강아.”
“으응.”
뒤늦게 그녀가 반응하자, 삼영이 여전히 노지태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지?”
“…….”
“길 터줄 테니, 밖으로 나가. 로미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뒤늦게 날아든 단단하고 온화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그의 미소를 본 강은 그제야 그가 평소의 삼영과 다르지 않음을 확신했다.
그때, 노지태의 수하 하나가 잽싸게 달려들었지만, 삼영이 휘두른 검에 두 동강이 나 그대로 연기가 되어 소멸했다.
“서둘러!”
삼영의 외침에 강이 걸음을 돌렸다.
드러난 그의 정체에 온갖 감정이 올라왔지만, 우선은 어떻게든 여기를 무사히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태는 그녀가 도망치는 광경을 물끄러미 관망만 했다.
억지로 그녀를 붙들어 와도 매개체 없이는 융합된 혼을 꺼낼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전까지는 그녀의 몸을 상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최대한 인간 세상에 어울리는 방법을 택했던 건데.
예상치도 못한 욕심 많은 인간 때문에 계획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조용히 일 치르기는 글렀군.”
이렇게 된 거 황 대표라도 죽여버리지 않으면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한숨과도 같은 웃음을 뱉은 노지태가 빠르게 웃음기를 거두곤 주머니에 넣어둔 손 한쪽을 뺐다.
하지만 삼영이 달려든 게 먼저였다.
콰과광!
섬광이 번쩍이며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차가운 안개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살갗에 닿은 얼음 결정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설원에 파묻힌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폭발 가까이에 있던 몽마 몇이 뼛속까지 얼어붙는 감각을 이기지 못하고 넋이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황 대표는 설국의 토벌대 중 하나가 이미 데리고 피한 상태였다.
지태의 시선이 허공에 가득 찬 토벌대를 향했다.
설원처럼 고요한 나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은밀한 작전을 주로 수행하고, 전투에 특출난 자들이 많아 전쟁을 대비한 토벌대가 있다는 곳.
“설국의 명성이 거품은 아니었네요.”
감탄하듯 말하던 그가 붉게 빛나는 눈으로 예리하게 그들을 훑었다.
오늘의 만남으로 전력을 파악해야 하는 건 제 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영을 보고 웃던 지태의 손이 뒤를 향했다.
설성을 향해서였다.
“피해!”
삼영이 외쳤고, 그녀가 빠르게 몸을 날렸다.
콰과광!
노지태의 손에서 빠져나온 검은 폭발물질이 광폭했다.
설성은 간신히 공격을 피했지만,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라 움직임이 둔해져 버리고 말았다.
부서진 바닥을 구르던 그녀는 시야가 흔들리고,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잡았다. 이 계집애.”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나타난 제인이 설성의 앞을 막아서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