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 무엇을 위하여 (109/118)


#109. 무엇을 위하여
2023.05.14.



 


“잡았다. 이 계집애.”

피투성이가 된 제인의 얼굴과 광기 어린 미소의 간극이 괴기스러웠다.

엉망인 얼굴에 비해 일말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라 그랬다.

눈 한번 깜빡일 새도 없던 찰나에 거리가 좁혀졌고, 설성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물리며 방어했다.

제인이 살벌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승부는 봐야지, 어딜 도망가?”

설성의 옆구리에 닿아있던 제인의 손바닥 안에서 검은 연기가 뭉쳐지기 시작했다.


‘제기랄!’

뒤늦게 그 기척을 알아챘지만, 그녀는 비웃듯 속삭였다.


“이미 늦었어.”

“……!”

“잘 가, 예쁜 언니.”

콰콰콰콰콰앙-!!!

엄청난 폭발음이 시공을 뒤흔들며 둘을 삼켰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것처럼 건물 귀퉁이가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

잠시 후. 돌무더기 사이에서 설성과 제인이 차례로 튀어나왔다.


“크윽!”

먼지를 뒤집어쓴 설성의 입가에 피가 흥건했다.


“허억…… 허억……!”

그녀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가까스로 비켜 맞긴 했지만, 옆구리에 꽂힌 충격이 엄청난 탓에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어서였다.

몰골이 엉망인 건 제인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통 따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오직 설성을 쫓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몽마 자존심이 있는데, 피라미나 잡고 있을 순 없잖아?”

양 손바닥에서 뻗어 나온 검은 연기 형태의 검을 쥔 제인이 붉은 눈을 빛냈다.


“적어도 수장 대가리 하나는 따야지, 내가 면이 서지.”

그러자 상황을 주시하던 형설이 곧장 외쳤다.


“수장님을 엄호하라!”

그의 명령에 사방에 진을 치고 있던 설국의 토벌대 중 설성과 가까이 있던 무리가 곧장 그녀를 보호하며 제인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검은 슈트를 입고 있던 몽마의 무리도 반격에 나섰다.

제인을 선두에 둔 채 양옆으로 길게 펼쳐진 검은 몽마들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녀가 제 뒤에 진을 치고 있는 몽마들에게 말했다.


“다 좋은데 저 여자는 내 거니까 건들지 마. 알았지?”

단단히 경고한 제인은 설성을 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럼 판 깔렸으니, 제대로 놀아볼까?”

그녀가 앞장서 돌격했고, 동시에 몽마와 천인들의 무리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콰콰쾅! 콰앙!

폭발음과 괴성이 난무했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립이 이어졌다.

언제 쳐졌는지 모를 결계의 경계선 안팎의 풍경이 서로 다른 시공간처럼 이질적으로 뒤섞였다.

그렇게 사방이 부서지고 깨지는 와중.

삼영과 지태는 서로에게 검을 겨눈 채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지태였다.


“전력 파악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왜요. 도망이라도 가시게요?”

삼영이 되묻는 말에 그가 순순히 수긍했다.


“솔직히 예정에 없던 싸움이라 내키진 않네요.”

“그러게 미리미리 훈련이라도 좀 해놓으시지. 전쟁이 뭐, 예고하고 벌어진답니까?”

그에 지태가 조금 웃었다.


“아무리 준비가 안 되어있어도, 부대 하나 날릴 정도의 전투력은 있습니다. 보아하니, 저쪽 수장도 까딱하면 여기서 죽을 것 같기도 하고.”

“…….”

“괜찮으시겠어요? 아끼는 분 같던데.”

그가 배려라도 하듯 물어오는 말에 삼영은 조용히 입꼬리를 늘였다.


“저 친구나 저나 오늘 죽더라도 몽마의 왕을 잡을 수 있다면, 명예로운 죽음이 될 겁니다.”

“반대로 날 죽이지 못하면 개죽음이 되겠군요.”

“…….”

“안타깝네요. 서강 씨도 나름 그쪽과 정이 많이 들었을 텐데.”

지태가 희미한 미소를 그릴 때였다.

순간 삼영은 뒤에서 기척도 없이 날아든 공격을 읽고는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했다.

캉!

검은 연기의 형상을 띈 검의 칼날이 익숙한 이의 손끝에 들린 채 다시 제 목을 겨낭했다.


“와, 대박.”

검의 주인은 신휘였다.


“매니저님 천인이었어요?”

그가 아주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삼영은 순식간에 앞뒤로 칼을 겨눈 몽마와 싸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동시에 치고 들어올 것을 대비해 그는 모든 감각을 기민하게 세우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걸 본 지태가 말했다.


“큰 싸움에 대비해 적의 발목 하나 정도는 부러트려 놓는 게 낫겠죠.”

“…….”

“물론 발목 하나 부러트려 놓는데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그렇게 말한 그가 검을 거두며 돌아섰다.


“가긴 어딜……!”

캉!

삼영이 쫓으려 했지만, 지태를 향해 날아간 칼끝은 신휘에 의해 막혀버렸다.


“한눈팔지 마세요.”

“…….”

“매니저님 상대는 저니까.”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삼영은 신휘의 어깨 너머에서 붉게 타오르는 불길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화염에 휩싸인 지태는 그대로 미소만 남긴 채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카앙!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다시 한번 검날이 날카롭게 부딪쳤다.


“친해졌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게. 나도 신휘 씨가 몽마일 줄은 몰랐네.”

나긋하게 받아주는 삼영의 대꾸에 신휘가 눈매를 곱게 휘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러지 말고 남은 생이라도 착하게 살도록 해. 그래야 죽어서 천국에 가지.”

“…….”

“아. 몽마는 영혼이 없어서 죽으면 그대로 소멸인가?”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라며 삼영이 웃었다.

하지만 신휘는 그의 그런 도발쯤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걱정해주시는 건 고마운데, 저도 살 만큼 살아서 천국에 미련 없어요.”

늘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실실 웃어대는 통에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이 농담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삼영은 한강 다리 위에서 이루어졌던 신휘와의 첫 만남을 생생히 기억했다.

단순히 강과 엮이기 위해 벌인 쇼라고 생각하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그래서 지금도 그가 하는 말이 농담으로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삼영은 신휘와 단단히 시선을 엮은 채 입을 열었다.


“천계의 고서에 이런 말이 있어.”

“…….”

“기적을 이룬 자, 기적이 되리라.”

감에 의한 거라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신휘가 적어도 노지태와 같은 결의 몽마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쯤 모험하는 심정으로 그를 회유해보고자 했다.


“몽마의 왕이었던 자가 천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죽음의 끝에서 영혼 결합을 했어. 융합을 마치고 온전해진 혼의 결정이 천계로 인도되면 죽어가던 땅을 소생시킬 만한 엄청난 에너지원이 될 거고.”

“그래서요?”

“너라고 보탬이 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얘기야.”

“…….”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손 떼.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천인들과 달리 노지태는 지극히 개인의 이득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자였다.

철저히 자신을 위한 불멸과 힘.

그가 융합혼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들이었다.

삼영은 그 결과가 노지태를 제외한 몽마들에게 득될 게 없음을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이 싸움은 반드시 우리가 승리한다.”

개인을 위한 이득이 아닌 모두가 염원하는 평화가 목적이기에.


“그러니 소멸이 두려워 따르고 있는 거라면, 차라리 이쪽에 힘을 보태.”

“…….”

“룰만 깨지 않는다면, 천인과 몽마와 인간은 얼마든지 어울려 살 수 있어.”

간곡한 부탁과도 같은 삼영의 말에 내내 듣고만 있던 신휘가 조금 웃었다.


“매니저님 눈엔 제가 죽는 게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 걸로 보여요?”

“그럼 이유가 뭐야.”

“그건 서강한테 물어보세요.”

순식간에 웃음을 지운 그가 붉은 눈을 번뜩였다.


“살려만 놨지, 이유는 안 가르쳐줬거든요. 그래서 나도 몰라요.”

신휘는 삼영에 제게 ‘너의 의를 따라 살라.’는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제겐 죽어야 할 이유도, 또한 살아야 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왜 사냐고 굳이 물어보시겠다면.”

“…….”

“나는 대답 못 해요.”

피식 웃은 그가 말을 이었다.


“그냥 태어난 김에 사는 거라.”

카앙!

검을 튕겨낸 신휘가 삼영과 거리를 벌리며 멀어졌다.

삼영은 느리게 흘러나오는 한숨을 뱉으며, 길게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이룰 것이 없는 싸움은 무의미한 살상만 초래할 뿐이라, 더 이상의 싸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피차 시끄러워져서 좋을 게 없으니, 이쯤 하는 게 어떨까?”

그러자 신휘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저도 동의하는데……, 저쪽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가 허공에서 전투 중인 제인과 설성을 가리켰다.


“워낙 화끈한 신입이 들어와 버려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인의 발이 허공에서 설성의 한쪽 어깨를 내려찍었다.


“크윽!”

쾅!

시멘트 건물이 부딪치는 소음과 함께 설성이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아니, 그건 내리꽂힌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바닥에 닿기 직전 몸을 튼 그녀가 충격을 최소화했다. 그러고는 곧장 창으로 형태를 바꾼 검을 양손으로 쥐며 공격자세를 취했다.

제인이 그걸 보고 달려들자, 뒤에 있던 형설이 그녀를 조준해 활시위를 당겼다.

피잉!

활을 벗어난 금빛 화살들이 수를 늘려 사방에서 제인을 공격했지만, 그녀는 기압을 폭발시켜 화살을 모두 튕겨냈다.

그러고는 형설을 향해 붉은 눈을 빛냈다.


“피라미는 꺼져!”

핏발을 잔뜩 세운 그녀가 다시 설성에게 덤벼들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협공을 해도, 제인은 집요할 만큼 설성만을 좇았다.

그 필사적이고도 무모한 모습에 설성이 눈가를 구겼다.


“미련한 것. 네가 진짜 죽고 싶어 용을 쓰는구나.”

“걱정마. 혼자는 안 죽을 거니까.”

웃으며 달려드는 그녀에게 설성이 장창을 휘둘렀다.

옆구리를 얻어맞은 제인의 목에 곧장 창날이 날아들었지만,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자루를 붙들고는 어마어마한 힘으로 설성을 창째로 던져버렸다.

형설이 재빨리 다시 한번 화살을 날렸고, 직선으로 날아간 살의 끝은 정확히 제인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그 공격은 이내 신휘에 의해 막혀버렸다.

날아드는 살을 그대로 움켜쥔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다시 날렸다.

형설의 심장을 향해 되돌아온 살을 쳐낸 건 삼영의 칼날이었다.


“뭐야……? 당신도 천인이었어?”

온통 설성에게만 신경을 쏟은 탓에 뒤늦게 삼영의 존재를 알아챈 제인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삼영이 천인이었다는 것.

아니, 그보다 그가 걸치고 있는 옷과 무기가 수장의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믿기 힘들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그랬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차라리 잘 된 거라며 다시 태세를 갖추었다.


“이참에 수장들 목은 죄다 따버리지 뭐.”

그런데 신휘에게 그만 뒷덜미가 붙들려버렸다.


“이거 안 놔? 놔!”

흥분한 제인이 발버둥을 치며 외쳤지만, 신휘는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는 조용히 속삭일 뿐이었다.


“네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야.”

“웃기시네! 해보기도 전에 어떻게……!”

“네가 죽으면 다음 표적은 네 엄마가 될 텐데, 괜찮겠어?”

조용히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에 제인이 숨을 멈추었다.


“너도 알잖아.”

“…….”

“인간을 노리는 몽마들이 그들의 절망과 고통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신휘의 시선은 여전히 전방을 향하고 있었지만, 스산한 그의 목소리만큼은 목덜미를 겨누는 칼과 같았다.

어떤 의미로 저를 말린 건지는 몰라도, 함부로 죽지 말라는 경고였다.

건너편에서는 삼영이 설성을 부축하며 말했다.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의 제안에 신휘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좋겠어요.”

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럼 저희는 다음에 제대로 붙어요, 매니저님.”

“…….”

“아니, 수장님.”

그렇게 말한 그는 제인과 수하들을 이끌고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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