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이런 재회
(110/118)
110. 이런 재회
(110/118)
#110. 이런 재회
2023.05.18.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강은 씻자마자 침대에 거의 쓰러지듯 몸을 누였다.
여전히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오늘 있었던 일이 충격적이고,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집에 오니 잔뜩 얼어 있던 몸의 감각들이 제멋대로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언니, 괜찮아요?”
몸을 떠는 강에게 다가온 로미가 그녀의 하얀 뺨을 핥아주며 물었다.
“응. 난 괜찮아.”
강이 힘겹게 웃어 보이곤 로미의 눈가에 난 상처를 가만히 만져주었다.
로미는 그녀의 손바닥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며 애교를 부렸다.
“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좀 주무세요.”
“…….”
“인간은 잠을 자야 기력을 회복하잖아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반복되는 긴장과 스트레스 탓인지는 몰라도 오한이 일고, 몸에서 미열도 계속 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된통 몸살이라도 앓을 것 같은 증상이라 휴식이 간절하긴 했다.
하지만 산이 없는 상태로 잠을 자려니, 그 또한 쉽지 않았다.
그가 없이 악몽을 피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아.’
너는 지금 어디쯤 오고 있을까.
강은 그런 생각을 하며 힘겹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속눈썹이 여린 새의 깃털처럼 떨리는 걸 본 로미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맞다. 주인님이 없으면 악몽을 지울 방법이 없잖아.’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가 눈을 감고 있는 강에게 바짝 붙어서며 말을 이었다.
“언니. 주인님은 자정 전에 돌아올 거예요.”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돌아오겠지.”
“네. 그러니까 잠이 안 오더라도 일단 눈이라도 감고 계세요. 그러면 좀 나을 거예요.”
눈을 감고만 있어도 어느 정도 수면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길 어디서 들었던 것 같아 건넨 말이었다.
그러자 강이 손을 뻗어 로미의 하얀 털을 꼬옥 움켜쥐었다.
마치 커다란 곰 인형을 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일정하게 흘러나오는 강의 숨소리를 들으며 로미도 그녀를 감싸듯 몸을 둥글게 말았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로미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뜨이기를 반복했다.
고요한 밤.
나란히 몸을 겹친 시계의 바늘이 자정을 알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열린 문틈 사이로 밀려 들어왔다.
하얀 시폰 커튼을 부드럽게 밀어낸 바람과 함께 산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귀를 쫑긋거리던 로미가 일순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주인……!”
“쉿.”
반가운 마음에 달려들려는 그녀를 향해 산이 제 검지를 들어 입술을 눌렀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합죽이가 된 로미가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와서는 발발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꼬리가 떨어질 듯 흔들어대는 그녀를 산이 무릎을 굽혀 안았다.
로미도 두 발을 들어 그의 어깨에 걸치고는 무사히 돌아온 제 주인의 뺨을 마구 핥았다.
인간 세상의 시간으로는 며칠만의 재회였지만, 3년을 우국과 이계의 틈을 오가며 살았던 로미에게는 그와의 재회가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살아 돌아올 줄 알았어.”
조용히 재회의 감격을 누른 산이 그녀를 안고 있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고 보드라운 털에 코를 묻었다.
로미도 괜히 울컥해지려는 마음을 달래며 웃었다.
“당연하죠! 제가 누군데요! 히히!”
안았던 팔에 힘을 풀며 멀어진 산은 이내 그녀의 눈가에 선명히 그어진 흉터를 보며 물었다.
“눈은 왜 그래?”
“아, 이건 그냥…… 영광의 상처랄까?”
헤헤.
해맑은 로미의 말에 그는 미간을 좁힌 채 그녀의 흉터를 잠시 어루만졌다. 우국과 이계에서 목숨을 걸고 버텼을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는 이내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상처를 치료하는 천계의 약이야. 꾸준히 바르면 상처도 흐려진다고 했으니까, 빼먹지 말고 발라.”
“헐. 저 때문에 챙겨오신 거예요?”
“응.”
나 운다, 진짜…… 흐엉.
감격한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로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던 산은 접었던 무릎을 펴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잠든 강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그녀의 곁에 앉았다.
강의 얼굴을 꽤 평온해 보였지만, 그녀의 몸에서는 이미 보랏빛을 띤 악몽의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산은 상체를 숙여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며 말했다.
“다녀왔어.”
그 모습을 본 로미의 뺨과 귀가 빨개졌다.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아 황급히 앞발로 주둥이를 틀어막은 그녀가 얼른 일어나며 말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산이 없는 동안 일어났던 일이 어마어마했지만, 그건 강이 깨어나는 대로 전해줄 테니, 굳이 제가 전할 필요는 없었다.
허둥지둥 돌아서던 로미가 카펫을 밟고 미끄러졌다.
쿠당!
“아이고! 내 예쁜 엉덩이!”
둔부가 쪼개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픈 것보다 창피한 게 먼저라 벌떡 일어섰다.
“괜찮아?”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저 그럼 가 볼게요!”
“그래. 고생했어.”
산이 한 손으로는 강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다른 손을 흔들어주었다.
“네, 넵! 조,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약 꼭 바르고.”
“네에!”
열린 창틈으로 도망치듯 나가는 로미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시선을 내려 바라본 강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로미가 한바탕 엉덩방아를 찧어도 깨지 않는 걸 보니, 몸이 많이 고됐던 것 같았다.
무의식의 그녀는 아직 악몽을 초입일 것이다.
끝도 없는 어둠을 걷고 또 걷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산은 하얀 뺨을 쓸며 조금씩 진해지는 악몽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우국의 부대 덕에 안은 평화로웠지만, 바깥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부쩍 진해진 악몽의 향기를 맡은 몽마들이 들개처럼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으잉? 저것들이?”
집으로 돌아가려던 로미도 발걸음을 멈추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몽마 한 마리를 두들겨 팼다.
제 눈에 걸린 놈들을 씨를 말려버려야겠다는 생각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절대! 안에 있는 저 둘만큼은 아무도 방해 못 하게 할 거야!’
그녀는 산과 강의 모습에서 예전의 일리와 모아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끝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지만, 산과 강만큼은 어떻게든 이 마지막 전투에서 살아남아 더 오랫동안 서로의 곁을 지켜주었으면 했다.
“사랑은!”
로미가 단전에 힘을 주며 외쳤다.
“위대한 거니까아아아!”
아오오오오!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 짐승의 하울링이 까만 밤을 가득 울렸다.
.
.
.
강이 잠에서 깼을 땐,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이었다.
그녀는 눈앞에서 저를 바라보고 누워있는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산이다.”
넋두리 같은 혼잣말이 저도 모르게 흘렀다.
그런 강의 반응에 산은 하얀 뺨을 어루만져주며 물었다.
“잘 잤어?”
그러자 그녀는 사슴같이 커다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되물었다.
“……이거 꿈이야?”
피식.
낙화 같은 웃음이 이마를 간지럽히며 내려앉았다.
“꿈 아니야.”
그의 대답에 강은 말없이 산을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들었다.
조용히 다가간 그녀의 손끝이 빚은 듯 아름다운 그의 눈과 코와 입술을 차례대로 어루만졌다.
뒤늦게 강의 얼굴에도 따스한 웃음이 번졌다.
“정말이네.”
“…….”
“진짜 산이네.”
그녀가 팔을 뻗어 산의 어깨를 꼭 끌어안으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체향과 일정하게 뛰는 심장의 박동이 자장가처럼 온몸에 스며들어 긴장을 녹여주었다.
“해독은 완벽히 했어?”
“응.”
“그럼 이제 안 아파?”
“원래도 아프진 않았어.”
그가 강의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누르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도 산의 뺨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러고는 그의 달콤한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떼며 화답했다.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은데, 막상 얼굴을 보니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것만 같았다.
긴장도, 공포도, 두려움도. 그리고 걱정도.
그와 함께일 때는 모든 게 다 녹아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그녀가 평생을 그토록 좇던 행복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삶.
그래서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알고 나니 더 욕심이 생겼다.
시간만 허락해준다면 조금 더 그와 많은 것을 나누고, 많은 것을 함께 하며, 더 오랫동안 미래를 그려나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강은 지금의 이 소중함을 최선을 다해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산의 옷깃을 만지작대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산아.”
오늘 있었던 일과 삼영의 정체에 관해 미리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예전에 산에게 들었던 게 있어, 말을 꺼내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날. 설국의 수장한테 잡히지 않았으면, 아마 난 살인을 저지르고 쭉 몽마로 살았을 거야.’
그의 말대로 삼영은 산의 살인을 막았다.
그리고 그 일은 하마터면 천계와 척을 지고 천인의 제거 대상이 될 뻔할 일을 막은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산은 그 일이 기억에 별로 좋게 남지 않은 듯한 반응이었다.
‘어떻게든 얼굴을 봐둘 걸 그랬어.’
‘……왜?’
‘마주치면 바로 죽여버리게.’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강은 아마도 그때의 그가 천계에 끌려가 모진 일을 겪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산의 말대로라면 천인들 중 누구도 그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혼종은 죽여야 한다며 사형을 외치던 이도 있었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산의 입장에서는 저를 그렇게 대한 천인들과 척을 지는 일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을 거고, 삼영이 했던 일을 딱히 고맙게 여기지 않는 것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왜 불러놓고 말을 안 해?”
애꿎은 옷자락만 닳도록 만지고 있는 강에게 산이 되물었다.
“어? 아, 그게…….”
“뭔데 그래.”
“이 얘기 듣고도 화내거나 흥분하지 않겠다고 약속부터 해줘.”
대뜸 던지고 본 말에 그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왜. 나 없는 동안 바람이라도 피웠어?”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됐어. 뭐든 수용할 테니까, 얘기해 봐.”
강은 농담이나 던지는 그를 슬쩍 한번 흘겨봤지만, 그 와중에도 뭐든 수용하겠다는 그의 빈말에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예전에 네가 나한테 들려줬던…… 열여섯에 있었던 일, 기억나?”
“응. 기억나지.”
“그때 네가 살인할 뻔했던 걸 막고, 너를 천계에 데려갔던 게 설국의 수장님이라고 했었잖아.”
“그랬지.”
“오늘 그분을 만났어.”
“…….”
말이 없어진 산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게 느껴져 그녀는 얼른 말을 이었다.
“나한테 해코지하거나 나쁜 일 있었던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그럼?”
“그게, 오히려 나를 그분이 구해주셨는데…… 그분이 누구였냐면…….”
마른침을 꼴깍 삼킨 그녀가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삼영 오빠였어.”
“……뭐?”
산의 눈이 커다래졌다.
강은 어쩔 수 없이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다.
“삼영 오빠가…….”
“…….”
“설국의 수장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