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뜨겁게 사랑할 때
(111/118)
111. 뜨겁게 사랑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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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뜨겁게 사랑할 때
2023.05.21.
“삼영 오빠가…….”
“…….”
“설국의 수장이었다고.”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고, 침묵은 무거웠다.
산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설국의 수장 이야기를 모르고 있던 건 아니었다.
이유는 정확히 몰라도 천계의 오국(五國)중 유일하게 부수장이 수장의 직무를 대리하고 있는 곳이 바로 설국이었으니까.
항간에는 부재중인 설국의 수장에 대한 갖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누군가는 그가 화국의 수장처럼 다른 종족을 사랑해 추방된 거라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그가 비밀리에 인간 세계에 내려와 특별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결국 후자가 진실이었던 건가?
산은 열여섯, 처음 그와 조우하게 된 때를 떠올렸다.
정신을 빼앗길 만큼 강렬했던 죽음의 향기에 자제력을 잃고 살생할 뻔했던 날.
제 눈앞에 새하얀 제복을 입고 나타났던 천계의 수장을.
‘멈춰!’
금빛 섬광을 두르며 나타난 그에게 반항 한번 못해보고 제압을 당했던 기억이 선연했다.
‘후회할 짓 하지 마라.’
‘……끄으윽! 이거 놔!’
‘이 어리석은 놈아! 어찌 살상을 하려고 해!’
‘니가 뭔 상관…….
’
‘떽! 네 부모가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녀석아.’
그가 폭격처럼 내던진 잔소리도 여전히 선명했다.
모든 진실을 마주하고 나니, 그래.
그의 말투나 목소리가 눈을 감고 들어도 삼영이었다.
단지, 인간으로 마주한 그의 모습에서 천인의 모습을 비춰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삼영의 옥탑방에 처음 찾아갔던 날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산의 입술 사이로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가 흘렀다.
“하.”
그의 반응에 강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최면에 걸렸던 게 아니라, 적당히 속아 넘어간 척했던 거였어.”
“삼영 오빠한테도 최면을 걸었었어? 나는 그냥 널 좋아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걸 호의라고 느낀 그녀의 순수함에 또 한 번 바람 같은 웃음이 샜다.
흩어져있던 퍼즐 조각들이 차례대로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강의 경호원으로 접근하며, 최면에 가장 공을 들였던 게 바로 황 대표와 삼영이었다.
부딪힐 일이 많은 만큼 제게 반감을 갖게 해서는 안 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그는 적당히 속아 넘어가는 척하며…….
“내가 아니라, 내가 사 들고 간 한우를 반겼던 거지.”
뒤늦게 알게 된 진심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강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냉큼 말을 보탰다.
“어쨌든 너한테 보인 호의가 연기는 아니었다는 말이잖아.”
“대상이 내가 아니라 소고기였다니까?”
“아니, 평소에 널 대하던 모습 말이야.”
“그게 진심이었는지는 어떻게 알아.”
그녀는 삼영의 마음을 믿고 싶은 눈치였지만, 정작 산은 첫 대면이 그렇다 보니 마냥 좋게만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저를 대했던 태도도 그저 잘 짜인 각본에 의한 거였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는 천인 아닌가.
목적도 없이 제게 호의적으로 굴 이유가 없다.
그러니 만약 삼영의 호의가 진심이라면 그건 아직 제게 ‘융합된 혼을 인도할 유일한 존재’라는 타이틀이 남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강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오빠 봐온 세월이 10년이 넘어.”
“…….”
“정체는 숨길 수 있었을지 몰라도, 내가 봤을 때 마음까지 숨길 수 있는 사람은 아니야. 그러니까 너에 대한 마음도 분명 진심이었을 거야.”
그녀는 굳게 믿었다.
누구보다 산의 앞날을 신경 쓰고 있는 게 삼영일 거라고.
금기를 깨고 인간을 죽일 뻔했던 산을 곧장 제압할 만큼 힘이 있었으면서, 결국 그를 소멸시키지 않고 천계로 데려가 한 번 더 그에게 기회를 준 게 삼영 아니었나.
강은 분명 아직 다 알지 못한 그의 진심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산도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진실이 어떻든 강의 소망에 더 이상 찬물을 끼얹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제 상처를 저보다 더 아프게 느낄 그녀임을 알기에 그랬다.
그런데 강이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그녀는 빨간 볼캡을 골라 쓰고, 커다란 후드가 달린 회색 외투를 걸쳤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직접 만나서 얘길 들어보자.”
“무슨 얘기?”
“삼영 오빠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 이유.”
“…….”
“그리고 천인들의 진짜 목적.”
전투적으로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산은 쓴웃음을 삼켰다.
“강아. 마음은 알겠는데, 그런 걸 물어본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해줄 리가…….”
“상관없어.”
강은 그의 코트 깃을 단단히 여며주며 말을 이었다.
“너에 대해 알아야 할 게 남았다면, 전부 알아낼 거고.”
“…….”
“우리가 미리 준비할 게 있다면, 뭐라도 해둘 거야.”
제 몸에 잠들어 있는 혼이 융합을 마치고 온전해지면, 엄청난 에너지원이 될 거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었다.
천인들은 천계를 위해 그것을 사용할 목적을 갖는 동시에, 융합혼이 몽마의 손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몽마의 왕인 노지태(245)는 자신의 힘과 영원불멸의 삶을 위해 그것을 반드시 손에 넣으려고 한다는 것도.
물론 자신의 몸이 혼의 융합을 완성 시키는 그릇이 된다는 것과 융합을 마친 혼을 꺼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산이라는 사실도 안다.
그녀가 궁금한 건 그 이후의 일이었다.
천인들이 ‘융합혼의 인도자’라는 명목하에 산을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를 천인으로 인정해주지도 않는 상황에서 그의 쓰임이 다하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강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산이 두 번 버림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그를 비참하게 만들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바로 삼영을 찾아가는 거였다.
“날 엄청 추워진 거 알지? 그러니까 옷 단단히 여며.”
전쟁에 나가는 장수처럼 결의를 다지는 그녀를 산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강이 제 코트의 깃을 여미며 매무새를 정돈해주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가 뒤늦게 입술을 뗐다.
“만약에.”
“……?”
강이 고개를 들자 산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느리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만약에 삼영이 형이랑 나, 둘 중 한 사람 편에만 서야 한다면 너는 누굴 선택할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
“…….”
“당연히 너지.”
강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
“나는 지금 그걸 확인하기 위해 가려는 거니까.”
이어진 말에서 삼영에 대한 강의 믿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산은 알 수 있었다.
어떤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녀는 절대적으로 자신의 편에 서줄 거라는 걸.
그가 조용히 미소 짓다가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강의 후드를 잡아 그녀의 머리에 씌워주며 옷에 달린 끈을 쥐었다.
“나는 몽마라 감기 같은 거 안 걸려.”
끈을 당겨 조이자, 후드가 쪼그라들며 볼캡을 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파묻혔다.
“그러니까 감기는 네가 조심해야지.”
“…….”
“아프면 내가 대신 아파주지도 못하는데.”
산은 잡은 끈을 그대로 당기며 모자의 챙을 피해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강의 도톰한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꾹 겹쳐 눌렀다.
쪽.
힘껏 눌렸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소리가 났다.
그녀의 눈이 사슴처럼 동그래졌다.
양쪽 뺨을 손바닥으로 모으듯 누르니, 자연스럽게 입술이 오리 부리처럼 튀어나왔다.
피식.
그 모습이 귀여워 그는 다시 한번 강의 얼굴을 당겼다.
그러고는 잘 익은 앵두처럼 벌어진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씩씩하게 전투 준비를 하던 강은 이제 온순한 강아지처럼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제 얼굴을 감싼 커다란 손을 붙든 채 부드럽게 밀려 들어오는 숨결을 마셨다.
가볍게 시작된 입맞춤은 어느새 뜨겁게 달아올라 서로의 감각을 옭아맸다.
살 끝에서 번지는 달콤한 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질 무렵, 멀어진 산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입술을 부딪쳐왔다.
방금보다 더 진득해진 입맞춤과 마찰음이 공기를 후덥지근하게 덥혔다.
강은 다리가 풀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 간신히 버티고 섰다.
그런데 느리게 떨어진 그의 입술이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어.”
“뭐가?”
“형네 집은 나중에 가자.”
“뭐? 안 돼. 옷까지 다 입었는데……!”
“옷이야 벗으면 되고.”
“그래도 안 돼!”
“돼.”
“안 된다니까?”
강이 큰마음 먹고 몸을 떨어트렸지만, 허리를 감아 당기는 힘에 속절없이 도로 끌려가고 말았다.
제품에 가둘 듯 그녀를 끌어안은 산이 직접 씌워준 후드를 벗기고, 모자의 챙을 조금 더 위로 올리며 시선을 맞춰왔다.
그러고는 짤막한 한 마디를 뱉어냈다.
“돼.”
대꾸할 틈도 없이 입술이 도로 먹혀 버렸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모자를 벗기고 외투도 능숙하게 벗겨냈다.
그러고는 반항도 못 하게 두 팔로 강의 작음 몸을 포박한 채 그대로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잠깐만……!”
잠깐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다급히 외쳐봤지만, 그는 어림도 없다는 듯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강은 무기력하게 그에게 안긴 채 침실로 향했다.
“산아. 나도 이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지금 우린 이럴 때가 아니라…….”
“이럴 때야.”
산이 그녀의 목덜미 아래에 입술을 붙였다 떼며 대답했다.
“만약에 내일 죽게 되더라도 후회 같은 거 남기긴 싫으니까.”
“…….”
“이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
그러니 지금은 죽도록 사랑할 때.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강도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끝을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지금.
만약 내일이 정말 우리의 마지막이라면 나 역시…… 오늘 너와 보내지 못했던 밤을 후회하게 될 게 분명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녀는 산의 목을 끌어안으며 못 이긴 척 웃고 말았다.
지금은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할 때니까.
그의 가벼운 손짓 하나에 저절로 열렸던 침실 문은 그들이 침대로 향하자마자 도로 닫혔다.
유난히 크게 뜬 보름달이 하얗게 세상을 비추는 밤이었다.
.
.
.
그 시각.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문 엔터의 사옥 최상층.
지태는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사파로는 분명히 놈의 얼굴을 봤을 텐데, 왜 일체 언급을 안 했을까.”
혼의 융합이 완성되어가는 ‘그날’이 가까워지고 있는 요즘.
아직도 강의 악몽을 독차지하고 있는 놈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건 감영희(485)의 죽음에 얽힌 최대의 난제였다.
그리고 또 하나.
이일리(212)와 화국의 수장이 남긴 핏줄의 행방이 여전히 묘연하다는 것.
“죽은 건 아닐 테고…….”
아이는 분명 살아있을 것이다.
서강의 몸에 깃든 혼의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였다.
문제는,
“놈이 지금 어디에 있냐는 거지.”
지태의 미간이 좁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