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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카오스 (112/118)


#112. 카오스
2023.05.25.



 


“문제는 지금 놈이 어디에 있냐는 거지.”

짙은 눈썹 아래 날카롭게 자리 잡은 눈이 붉게 빛났다.

융합혼은 혼의 주인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이룬 기적이니만큼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 즉 그들의 아이를 위해 존재했고, 오직 그 아이를 통해서만 반응했다.

완성된 융합혼을 꺼내기 위해 반드시 아이가 필요한 이유였다.

아마 부모가 죽은 뒤 홀로 인간 세상을 떠돌았다면, 살아남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성체가 되지 못한 혼종은 가장 만만한 사냥감이자 먹잇감이었을 테니까.

지태는 분명 그 부분에 있어 천계의 개입이 있었음을 추측했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봤던 사파로의 모습을 떠올렸다.


「……면목 없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만신창이가 된 채 겁에 질려 죽여달라는 말만 반복하던 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사파로는 왜 서강의 꿈을 통째로 앗아간 녀석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나.

아니, 밝히지 못했나.

아마도 그건 그가 아는 이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마디로 서강의 측근은 아니라는 얘기겠지.

도출된 결과는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걸 지울 수가 없었다.

양신휘(475)를 시켜 두 번이나 서강의 악몽을 되찾으려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한 탓에 여전히 놈의 정체는 미궁에 빠져있었다.


“설마, 그놈이…….”

그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이일리(212)의 아들은 아니겠지?”

확률적으로 희박하다는 걸 알면서도 행방이 묘연한 둘의 정체가 같은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만약 정말로 강의 악몽을 차지하고 있는 녀석이 이일리의 아들이라면.


“…….”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금기를 깨고 태어난 이의 잠재된 힘은 감히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서강의 꿈을 노린 몽마들은 놈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수도 없이 많았다. 강한 놈을 만났을 때 사파로가 얻어터지고 오는 일도 처음은 아니었고.

지태가 감영희를 보육원의 원장으로 둔 건, 강의 곁을 그만큼 치밀하게 파고들기 위해서였다.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아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말 그대로 가장 인간 흉내를 잘 내는 몽마가 필요했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봤을 땐, 사파로만한 적임자가 없었지만, 애초에 전투력 자체가 높았던 녀석은 아니다 보니 그의 뒤를 봐주는 게 지태의 역할이었다.

그렇게 그는 사파로가 야금야금 물어다 주는 꿈의 조각을 먹으며, 힘을 키웠다.

그리고 서강의 악몽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훌륭했다.

과연 이일리(212)가 죽어가는 와중에도 찾을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꿈의 주인임이 확실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녀의 몸에 꿈의 문을 새기고 그녀가 꾸는 악몽을 독차지하고 싶었지만, 융합혼이 완전해지기도 전에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최대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 역시 중요했다.

능력의 한계로 꿈을 온전히 다 흡수하지도 못하는 사파로를 통해 악몽의 일부만 감질나게 얻어먹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테이블 위를 두드리는 손끝에 닿은 그의 눈빛이 한층 짙어지던 그때였다.

똑똑.

그가 호출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지태가 말하자, 묵직한 문이 열리고 곧 신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 있는 그를 지태가 말없이 바라보다가 손짓했다.

신휘가 군말 없이 다가갔다.


“신휘야.”

“네, 대표님.”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 시작하며, 왕이라는 호칭은 무색해진 지 오래였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몽마들의 세계에서 이일리가 사라지며, 왕의 명성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하지만 지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전히 저를 맞닥뜨린 많은 몽마들이 겁에 질려 저를 ‘왕이시여.’라고 높여 부르는 일이 많았고, 머지않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왕이 될 이도 바로 자신임을 의심치 않았기에.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천천히 신휘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주변을 천천히 반 바퀴 돈 지태가 신휘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사파로가 왜 놈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

난데없이 날아든 질문이었지만, 신휘는 덤덤히 대답했다.


“안면이 없었던 놈이라 그러지 않았을까요?”

“처음 보는 놈이었을까?”

“적어도 서강의 측근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흐음.”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렸다 내린 지태가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바닥을 울리는 묵직한 구두 소리가 넓고 적막한 공간을 울렸다.


“죽은 놈은 말이 없는데 말이야.”

의자에 털썩 기대어 앉은 그가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며 공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여간 이래서 인간 세상에 너무 오래 살면 안 된다니까.”

“…….”

“안 그래?”

지태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신휘에게 물었다.

이렇다 할 대꾸를 찾지 못한 그를 대신해 지태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알아? 인간들이랑 너무 오래 섞여 있던 사파로가 혹시나 멍청한 연민이라도 생겨서 누군가를 감싸려고 했다던가.”

“…….”

“아니면 주제넘게 상황을 바꿔볼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을지.”

“설마요.”

신휘가 그럴 리 없다는 투로 한 말에 그도 따라 웃었다.


“도무지 밑에 것들 생각을 알 수가 있어야지.”

피곤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 지태가 이만 나가보라며 손짓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신휘가 군말 없이 물러났다.

그런데 그의 손이 막 손잡이를 잡았을 때.


“아.”

뒤에서 지태가 말했다.


“촬영장에서 꿈의 문을 새기려다가 실패했던 이유가.”

“…….”

“천인 때문이랬나?”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신휘는 이내 고개를 돌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꼬리를 늘였다.


“네.”

“어디 수장이랬지?”

“우국의 수장이라고 했습니다. 화국의 수장이 뒤늦게 가세했고요.”

“그 둘 말고 다른 놈은 없었고?”

표정이 사라진 지태의 얼굴을 보며 신휘가 곧장 대답했다.


“없었습니다.”

그런 그를 지태가 빤히 쳐다보았다.

어둠이 깔린 룸 안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신휘를 바라보던 지태가 뒤늦게 굳은 표정을 풀었다.


“그래, 그럼 나가 봐.”

“네.”

“오구일(591) 교육 좀 시키고.”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지막으로 그는 조용히 룸을 빠져나왔다.

산의 정체가 몽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신휘는 그 사실을 지태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그의 정체가 상급 몽마라는 사실을 안다면, 결국 그를 포섭해야 하는 일은 제 일이 될 텐데 실패할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한산이 강의 악몽을 독차지 하고 있는 놈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곁에 있는 것만으로 꿈의 조각을 얻을 순 있을 것이다.

그게 목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 흉내까지 내며 악착같이 서강의 옆에 붙어 연애질까지 하고 있는 놈이니까.

어차피 자신이 밝히지 않아도 때가 되면 밝혀질 진실이었다.

신휘는 그와 더불어 로미의 정체가 수인이라는 것도 지태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랬다면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 지태는 그 자리에서 로미를 죽였을 테니까.

산의 일이야 귀찮아지는 게 싫은 마음이 컸다고 해도, 로미에 관한 일은 왜 순간적으로나마 그런 판단을 내린 건지 저도 알 수 없었다.


‘개미는 언제든 밟아죽일 수 있으니까.’

그녀에게 말했던 그런 단순한 이유만으로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납득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하여간 이래서 인간 세상에 너무 오래 살면 안 된다니까.”


“혹시 알아? 인간들이랑 너무 오래 섞여 있던 사파로가 혹시나 멍청한 연민이라도 생겨서 누군가를 감싸려고 했다던가.”


“아니면 주제넘게 상황을 바꿔볼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을지.”

 
머릿속에선 지태가 하는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우뚝 멈춰선 그는 황금색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누구지?”

 

 
누가 들었다면 비웃음을 당했을지도 모를 자조적인 질문은 던지며, 그는 한참이나 자신의 모습을 마주했다.

그러다 이내 헛웃음이 흘렀다.


“돌겠네.”

몽마가 연민을 품다니.

몽마가 우울증을 앓고, 자살을 생각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신휘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몸을 실었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린데, 지울 수 없는 한 가지는 뚜렷했다.

어쩌면 이런 저야말로 혼종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
.
.

산과 강이 삼영의 집을 찾은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왔어?”

평소처럼 낡은 추리닝 차림으로 둘을 맞이한 삼영의 머리에 까치집이 지어져 있었다.


“밥은.”

“……아직.”

“설마 아침도 아직 안 먹은 건 아니지?”

“늦잠 자느라 못 먹었어.”

“아이고! 너는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공복이야?! 너 그러다 진짜 큰일 난다!”

그가 잔소리하며 강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그녀의 시선은 이내 삼영이 입고 있는 추리닝 안의 낡은 러닝을 거쳐, 뒤축이 닳아빠진 슬리퍼로 향했다.


‘……분명 삼영 오빠가 맞는데.’

강은 자신이 잠깐 꿈을 꿨던 건 아니었는지 의심할 지경이었다.


“오빠.”

“응?”

“아니, 그…….”

“왜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흐리는 강을 보며 삼영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일단 들어와. 밖에 멀뚱히 서 있지 말고.”

그러더니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산을 향해서도 손을 흔들었다.


“산이 너도 들어오고.”

엉덩이를 긁으며 먼저 돌아선 그가 쭈그리고 앉아 장독대에 있던 작은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더니 국자로 무언가를 퍼 찌그러진 양푼에 담았다.


“뭐해?”

한참 만에 안으로 들어선 강이 묻는 말에 삼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하긴. 된장 푸지.”

“…….”

“된장찌개 끓여서 다 같이 밥이나 먹게.”

그녀는 아무래도 제가 간밤에 꿈을 꾼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천인은 무슨.

오빠가 설국의 수장 같은 존재일 리가 없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산에게 삼영의 정체에 대해 밝혔던 일마저도 긴가민가했다.


‘설마 그것도 꿈이었나?’

그런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봤지만, 산은 이렇다 할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강은 이 모든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금세 알게 되었다.

삼영의 오래된 옥탑방 안에 의식이 없는 설성이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다급히 들어가 설성의 곁에 앉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황금빛의 투명한 막이 그녀의 몸 주변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다.


“급한 대로 치료 중이야.”

뒤따라 들어오던 삼영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그는 설성이 의식을 잃은 게 아니라, 회복을 위해 깊이 잠든 것뿐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천계로 돌아가서 치료받으시는 게 빠르지 않아?”

“그게 빠르긴 하지.”

“그런데 왜 여기에 계셔?”

“아이고, 천계의 문이 아무 때나 막 열려라, 참깨! 하면 열리는 게 아니에요. 가만있어보자. 냄비가…… 악!”

싱크대 아래에 반쯤 머리통을 밀어 넣던 삼영이 개수대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비명을 질렀다.

강은 눈앞의 상황이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하는 행동이며, 말투는 인간 이삼영이 확실한데, 그가 하고 있는 말의 내용은 그가 천인임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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