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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인연이란 (113/118)


#113. 인연이란
2023.05.28.



 
삼영은 설성이 회복을 위해 깊이 잠든 것뿐이라고 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강의 시선엔 걱정이 가득했다.

산을 대했던 천계의 태도를 생각하면 마냥 곱게만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삼영은 그렇다 쳐도 설성에게 역시 미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직 그녀를 미워할 만한 일보다는 고마워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겠지.

강은 지금의 이 관계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천계로 돌아가서 치료받으시는 게 빠르지 않아?”

“그게 빠르긴 하지.”

삼영이 싱크대 아래 선반에 머리를 밀어 넣고 낑낑대며 답했다.


“그런데 왜 여기에 계셔?”

“아이고, 천계의 문이 아무 때나 막 열려라, 참깨! 하면 열리는 게 아니에요. 가만있어보자. 냄비가…… 악!”

그러다 결국 개수대에 머리를 박고는 비명을 질렀다.

소리에 놀란 강이 물었다.


“오빠! 괜찮아? 바가지 깨지는 소리가 났는데?”

“아이고오오! 그래애…… 내 해골바가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바닥을 구르는 그를 보며 그녀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런 웃픈 상황에서도 산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은커녕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삼영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바닥만 볼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를 지켜보는 강도 슬슬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얼굴을 봐둘 걸 그랬어.’


‘……왜?’


‘마주치면 바로 죽여버리게.’

 
산이 삼영의 정체가 설국의 수장이라는 걸 몰랐을 때 했던 말이 자꾸만 뇌리에 맴돌아서였다.

그녀는 지금의 이 평화가 폭풍전야의 고요는 아닐까 싶어 염려가 됐다.


‘노지태가 이사오라는 건 아직 말도 못 꺼냈는데.’

한꺼번에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산이 과연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지에 관한 부분도 걱정이었다.

삼영에 관한 일로도 버거울 텐데, 부모를 죽인 원수의 소식까지 듣는다면, 당장 그를 찾아가 죽이겠다고 날뛰어도 말릴 재간이 없을 것만 같았다.


“여기 짱박혀 있었네, 이놈의 냄비!”

마침내 냄비를 찾은 삼영이 좁은 싱크대에 서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미리 받아놓은 쌀뜨물에 큼지막한 멸치 한 줌을 넣는 그를 강이 조용히 불렀다.


“오빠.”

“응?”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천인들은 인간의 음식만으로 배가 채워져?”

몽마가 인간의 음식을 먹긴 하지만, 인간의 악몽을 먹어야지만 연명할 수 있듯이, 천인들도 무언가 다른 게 필요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삼영이 조금 웃으며 대답했다.


“인간의 몸으로 현신하고 있을 땐 인간이랑 똑같이 먹어. 사실 천계에 있는 음식들도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고.”

물론 천인으로서 힘과 능력을 기르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그건 성실한 수련과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게 많아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무얼 먹고 사느냐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은 천인이 인간의 음식을 먹고 기운을 얻는다는 사실이 매우 흡족한 듯 웃었다.


“다행이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다시 설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겉보기에 외상이 심하진 않았지만, 천하무적일 것 같던 그녀가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 많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설성님은 제인한테 이렇게까지 당한 거야?”

설성이 당했다는 사실보다는 의외로 제인이 무척 강한 몽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물은 말인데, 삼영은 두부를 자르다 말고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

“깜짝이야.”

“설성은 몽마의 아지트를 찾아내서 잠입했다가 왕의 수하를 떼거지로 맞닥뜨렸을 뿐이야. 제인은 거의 마지막에 만난 거고.”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라고 해도 감당이 안 되는 머릿수로 덤비면 답이 없다. 게다가 몽마의 비밀 소굴에 하급 몽마들만 있었을 리도 없었고.

그나마 거기에 있던 게 설성이라 커버가 됐던 거라며 목소리를 높이던 그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설성이 이 정도면 제인은 지금쯤 반은 송장일걸?”

삼영이 그렇게 말하는데 이상하게도 강은 썩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인간 제인과 함께 했던 기억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을 떠나 송장이 된 그녀의 모습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말을 돌렸다.


“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금색 막도 오빠가 만든 거야? 치료해주는 건가?”

“응, 맞아.”

“신기하다. 언제부터 이런 게 가능했어? 이런 능력도 계속 숨기고 살았던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내 검을 돌려받았을 때. 그때 전부 되찾았지.”

삼영은 인간 세상에 내려오기 직전, 자신의 무기에 천인으로서 자신이 지녔던 힘과 능력을 모두 봉인해놓고 내려왔다고 했다.

그 힘을 되찾은 건, 설성에게 무기를 건네받은 직후였고.


“오빠가 힘이 없어서 당한 게 아니라, 봐준 거였네?”

“뭐를?”

“황 대표 말이야.”

그녀의 말에 삼영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천인이 인간 상대로 힘써서 뭐 하게.”

괘씸한 그를 마주할 때마다 주먹이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론 힘을 봉인해 두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조금은 더 인간이 겪는 온갖 감정에 대해 더욱 생생히 느끼고, 그들의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황 대표는 언젠가 죗값 치를 거야.”

“죽고 나면?”

“죽어서든 살아서든 지은 죄의 값은 반드시 받게 되어있어.”

살아서 그 값을 치러야 한다면 자신이 제일 먼저 쥐어 박아줄 준비가 되어있다며 삼영이 눈을 부라렸다.

어느새 평소처럼 그를 대하며 웃을 수 있게 된 강이 말했다.


“오빠랑 이런 이야기 나누니까 이상해.”

“그러게. 나도 이상하다.”

“수장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어우! 하지 마! 하지 마!”

천계에서는 자연스럽게 듣던 호칭이지만, 강의 입으로 그런 소리를 들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삼영이 소름이 돋아난 팔을 문지르는 사이 그녀가 다시 질문했다.


“근데 오빠, 혹시 천계에 있을 때도 가난했어?”

“무슨 소리야. 설국이 얼마나 부유한대. 얼마나 으리으리하고 아름다운 줄 알아?”

“근데 인간 세계에서는 왜 이러고 살아?”

아무렇지도 않게 옆구리를 찔러오는 질문에 삼영은 합죽이가 됐다가 겨우 입술을 뗐다.


“그냥 뭐……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닌데, 가지고 온 거 하나도 없이 바닥부터 시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잡힌 콘셉트랄까?”

웃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강은 그만 웃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콘셉트라면 너무 잘 어울리고, 너무 잘 적응한 느낌이라.

그러면서 한편으론 그가 연기력으로 승부하는 배우가 됐어도 무척 잘 해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혹시 이 집을 고집한 건, 뭔가 사연이 따로 있어?”

그녀의 입에서 온갖 궁금했던 것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이 집은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었어.”

“왜?”

“이 집터가 바로 천계와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통로니까.”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제야 강은 삼영이 절대 이 집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왜 하필 여기가 천계의 문이 열리는 곳이 되었을까?

서울 한복판의 으리으리한 빌딩은 아니더라도 좀 더 살기 편한 곳이 통로가 됐다면 삼영이 여름이나 겨울마다 그만큼 고생할 일도 적었을 텐데.

그녀는 안타까운 웃음을 짓곤 다시 잠든 설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촬영장에서 수면초의 독에 당했을 때, 산의 곁을 지키던 설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게도 곁을 지켜드려야 할 분이 계시거든.’

 
아마도 그건 다른 병실에 입원해있던 삼영을 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반대로 삼영이 그녀를 돌보는 입장이 되었지만, 어쨌든 둘은 서로를 꽤 지극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다 보니 번개같이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오빠, 근데…….”

“응?”

“혹시 오빠가 술만 마시면 찾던 첫사랑이…… 설성님이었어?”

“앗 뜨…… 으악!”

찌개의 간을 보던 삼영이 놀라서 떨어트린 숟가락이 발등을 찍고 싱크대 아래로 사라졌다.

발등을 붙든 채 데굴데굴 구르는 삼영을 강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 좀 조심해! 괜찮아?”

“안 괜찮아……! 하이고오, 내 족발……!”

발등에 불이 나도록 비벼대던 그가 싱크대 아래로 손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첫사랑 얘기는 하지 말자.”

……진짜 설성님이었어??


“참고로 걔 아니니까 이상한 오해하지 말고.”

“아니라고?”

“그래. 설성이 지금은 화국의 수장이지만, 원래는 내 밑에 오래 있었던 설국의 부수장이었어. 오른팔 같던 녀석이니 애지중지하던 건 맞지. 하지만 내 첫사랑은 아니야.”

거듭 부정한 삼영이 떨어진 수저를 수돗물로 씻으며 대답했다.


“아. 하긴, 오빠 첫사랑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라고 했지? 게다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었다고…….”

거기까지 말하는데 삼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강도 본의 아니게 그의 상처를 후빈 것 같아 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쎄한 촉 때문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술만 먹으면 첫사랑이 생각나 주정을 부리곤 했는데, 언젠가 산도 그 모습을 함께 본 적이 있었다.


‘애두라……. 나도 겨론하고 싶다…….’


‘내가 첫사랑에 실패만 안 했어도, 지금쯤 너네 같은 자식이…….’


‘나의 첫사랑 그녀는 꽃처럼 웃으며 내게 말했지…….’


‘삼영아. 나 아이를 가졌어…….’

 
머릿속에 영상처럼 펼쳐지는 삼영의 주정에 순간 팔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머릿속에서 드라마 한 편이 펼쳐졌지만, 강은 그녀의 정체가 금기어라도 되는 것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황급히 산의 눈치를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가 이글이글한 눈으로 삼영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 하하하! 지, 집이 좀 덥네? 산아, 우리 바람 좀 쐬고 올까?”

“추운데?”

“아, 아니야! 이 집이 원래 주방이랑 붙어 있는 구조라 불 쓰면 더워!”

어떻게든 산을 끌고 나가보려는 강과 일어나지 않으려는 산이 대립했다.

삼영은 귓불을 붉힌 채 계란찜을 만드는데, 모든 집중을 쏟아붓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그를 끌고 나가는 데 실패했고, 그사이 식사 준비를 마친 삼영이 말했다.


“자, 밥 먹자! 밥!”

그가 오래된 양철 소반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밥상은 소박했다.

따뜻한 쌀밥에 멸치를 잔뜩 넣고 끓인 된장찌개와 계란찜. 그리고 풋고추와 된장, 김치가 전부였지만 모두 강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산은 제 앞에 산처럼 쌓인 고봉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왜? 사양하지 말고 먹어.”

“잊으셨나 본데, 제가 몽마라 주식이 사람 음식은 아니라서요.”

“천인이기도 하잖아.”

툭 던져진 삼영의 말에 산과 강이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뭘 그렇게 보냐고 묻는 듯한 그의 반응에 강이 조용히 웃었다.


“그러네. 어쨌든 밥 잘 먹으면 도움은 되겠네.”

이번엔 그녀와 삼영이 산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다.

찬은 소박했지만, 속이 따뜻해지는 음식들이었다.

강이 왜 그토록 삼영이 만든 밥을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상황은 아니었다.

밥이나 얻어먹자고 온 건 아니었으니, 이쯤에서 물을 건 물어야 했다.

산은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인간 세상엔 왜 내려온 겁니까?”

밥상 위에 툭 던져진 그의 서늘한 음성에 강도 삼영도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니, 그보다 내 어머니가 나를 가졌다는 걸 알면서도 도와준 이유가 뭐예요?”

“…….”

“첫사랑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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