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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영원한 아군 (114/118)


#114. 영원한 아군
2023.06.01.



 


“인간 세상엔 왜 내려온 겁니까?”

적당한 안부를 주고받다가 자연스레 화제를 전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산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걸 택했다.


“아니, 그보다 내 어머니가 나를 가졌다는 걸 알면서도 도와준 이유가 뭐예요?”

“…….”

“첫사랑이라서?”

그의 싸늘한 음성에 정적이 흘렀다.

산은 처음 삼영을 만났을 때, 일면식도 없던 그가 잔소리를 퍼부어대던 장면을 떠올렸다.

뒤늦게 숨겨진 사정을 알고 나니, 그때의 쓴소리가 그저 분풀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기분이 더러웠다.


“산아…….”

고래 사이에 낀 새우 처지가 된 강이 조그맣게 그를 불러봤지만, 산의 눈에 붙은 불은 좀처럼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음물을 끼얹은 것만 같은 분위기 속.

그가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제 어머니는 천계에서도 호평이 자자했는데, 어떻게 그런 천인한테서 나 같은 종자가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했죠?”

그러자 삼영이 멈췄던 젓가락질을 다시 하며 뻔뻔하게 되물었다.


“내가 그랬어?”

“…….”

“그래. 일리가 있는 말인 걸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웃는 얼굴로 맞장구나 치는 그의 모습에 산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는 짓을 보니 아비를 닮은 게 분명하다고도 했었는데.”

“맞아. 너는 네 아빠를 많이 닮았어.”

“네 몸에 흐르는 절반의 피가 천인의 것이라는 게 수치다. 이게 다 썩을 놈의 몽마가 착한 네 어미를 꾀는 바람에 벌어진 참사다.”

“…….”

“-라는 말도 했고요.”

마치 그날의 묵은 감정을 쏟아붓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삼영은 그저 재미있는 추억거리라도 회상하듯 대답했다.


“그래, 생각났다. 웃어른한테 말을 함부로 하기에 쥐어박아 줬던 것도.”

“……뭐라고요?”

“기억 안 나?”

대꾸한 그가 어린 산을 흉내 내며 그날을 재연했다.


“끄으윽! 이거 놔! 네가 뭔 상관……!”

“…….”

“이래서 내가 꿀밤을 콱 먹여줬잖아. 하하하.”

목젖이 보이도록 웃던 삼영은 계란찜이 담긴 뚝배기를 밀어주며 말을 이었다.


“밥이나 마저 먹자.”

“…….”

“나머지는 먹고 얘기해도 되니까.”

그렇게 말한 그는 다시 밥 한술을 뜨다 뭔가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잠시 후, 삼영이 가져온 건 잘 익은 열무김치와 방앗간에서 새로 짜온 참기름 한 병이었다.


“잘 봐.”

비장하게 숟가락을 쥔 그가 말을 이었다.


“쌀밥에 된장찌개 한 수저. 그리고 열무김치를 넣고.”

삼영이 들고 온 참기름병을 까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냄새가 장난 아니지? 이걸 밥 위에 이렇게 쪼르륵 두르는 거야.”

입맛을 다시던 그가 수저로 밥을 슥슥 비비기 시작했다.

맛깔나게 비벼진 열무 된장비빔밥 한 숟가락이 삼영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으으으음! 이거지! 너네도 따라 해봐. 둘이 먹다가 셋이 죽어도 모를 맛이니까.”

감탄한 그가 또 한 번 비빔밥 한 수저를 떠 입에 넣었다.

산은 그런 삼영의 행동이 황당했지만, 그는 둘이 저를 어떻게 보든 말든 이틀은 굶은 사람처럼 밥을 먹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밥 한 그릇을 다 비운 삼영은 밥풀이 묻은 그릇에 물까지 부어 마시고 난 후에야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이고, 자알 먹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던 그가 물었다.


“커피 마실래?”

하지만 대답을 들으려던 건 아니었는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일어나 상을 치우고는 곧바로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산이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니다.”

“차 마시고 가.”

“됐어요.”

그가 대꾸하며 현관으로 향하는데, 삼영의 손짓 하나에 현관문이 닫혔다.

순간 화가 난 산의 두 눈이 선명한 붉은 빛을 띠며 빛났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어금니를 꽉 물며 말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하지만 삼영은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털며 덤덤히 답했다.


“마시고 가.”

두 남자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던 강이 산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끌었다.


“얘기 듣고 가자.”

“……,”

“우리 그러려고 온 거잖아.”

미소를 지으며 저를 달래는 그녀의 모습에 그도 마지못해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삼영은 종이컵에 탄 커피 석 잔을 내려놓으며 먼저 한 모금을 마셨다.

크- 좋다.

감탄하던 그가 말했다.


“나는 이게 그렇게 맛있더라?”

인간 세상에 내려와 가장 좋아하게 된 먹거리를 꼽자면 단연 믹스 커피가 최고라며.

하지만 산은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이런 얘기 하려고 붙들었어요?”

“아유, 알았어. 알았어.”

그의 말에 삼영이 손을 저으며 남은 커피를 한입에 훌훌 털어 넣었다.

탁.

빈 종이컵을 방바닥 위에 내려놓은 그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인간 세상에 왜 내려왔냐고 했지?”

답은 뻔했다.


“널 지켜보기 위해 내려왔어.”

“…….”

“네가 살생을 할 수도 있고, 또 그전에 몽마들이 널 찾아내서 죽일지도 모르니까.”

“감시하러 온 거네요.”

삼영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그가 강의 최측근으로 자리를 잡은 이유도 그녀가 융합혼을 담고 있는 ‘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산이 그녀를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삼영은 강이 열아홉 화재 사고를 겪었을 때, 산이 그녀를 구한 사실을 직접 목격했다.

멀리 있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가 늘 강의 곁에 맴돌고 있었다는 걸 확인한 셈이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강이 말했다.


“나는 오빠가 신이 나한테 보내준 수호천사인 줄 알았는데…….”

어쩐지 시무룩해진 그녀의 반응에 삼영이 웃었다.


“강이 수호천사 맞아.”

목표를 좇다 보니 그렇게 된 거긴 하지만.


“어쨌든 널 지키기 위해 네 곁에 머문 것도, 그래서 지켜낸 것도 맞으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을 모두 얘기하진 않았지만, 삼영은 그녀의 매니저로 있는 동안 모든 몽마의 접근을 차단했고, 위험으로부터 몇 번이나 그녀를 구했었다.

의무이기도 했지만, 의지로 한 일이기도 했다.

인간 서강의 곁을 지키는 천인으로서 그녀가 안타까웠고, 애틋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은 강은 그제야 시무룩해진 얼굴을 펴며 웃었다.


“맞아. 오빠는 언제나 날 구해줬어.”

“…….”

“몽마들한테서도, 그리고 내 지독한 외로움에서도.”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인생에 삼영마저 없었더라면, 아마 진작 살아갈 희망을 접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천계의 목적이 뭐였든 그가 제게 하나뿐인 가족이자, 친구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오빠의 따뜻함을 믿고 싶어.”

그녀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산이가 절대로 두 번 배신당하지 않게.”

강은 그렇게 말하며 옆에 앉은 산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친 채 꼭 잡았다.

그가 제 손을 내려다보다 그녀를 마주 보았다.

삼영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그들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산이 네가 천인들을 많이 원망했을 거라는 걸 알아.”

그의 말에 강과 산이 고개를 돌렸다.


“같은 뿌리를 가진 이들이 너의 존재를 부정했으니, 충분히 그랬을 거야.”

……부정.

그랬다. 제가 이제껏 당해온 건 부정이었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말은 우국의 수장인 해미가 했던 말이었고, 열여섯에 끌려간 자리에 있던 대다수의 천인들도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 저를 쳐다보는 눈빛엔 혐오가 그득했었다.

삼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 역시 네가 수치스러웠던 때가 있었어.”

“오빠……!”

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소했고, 강의 미간도 좁아졌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나와 같은 천인의 피를 나누어 가진 네가 살생을 하려 했으니까.”

“…….”

“천인들은 인간의 삶을 관장하고, 그들을 돌보기 위해 존재하는 신의 사자잖아. 절대로 인간을 죽여선 안 돼.”

강은 그제야 식사를 막 시작했을 때, 그가 산에게 했던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잊으셨나 본데, 제가 몽마라 주식이 사람 음식은 아니라서요.’


‘천인이기도 하잖아.’


‘…….’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자신과 같은 피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천인의 금기를 깨고 완전한 몽마가 되길 바라지 않는 마음.

그거야말로 삼영의 진심이었던 셈이다.

산은 눈동자에 옅은 혼란이 일었다.


“……내 정체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인간과 사랑에 빠지도록 내버려둔 건 왜 그런 겁니까?”

그 말에 삼영이 조금 웃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버려둔 게 아니라, 내가 너희 둘을 이어준 거나 마찬가지지.”

잘 생각해보라는 그의 말에 산과 강은 삼영이 자신들 사이에서 적당히 밀고 당기며 큐피드 역할을 해왔던 일들을 떠올렸다.

먼저 반응한 건 강이었다.


“뭐야. 완전 작정하고 엮었던 거였어?”

희생이라고 하기엔 거창했지만, 애꿎은 반이 말려들 뻔하기도 했고, 신휘까지 엮어서 산을 각성시킨 게 바로 삼영이었다.

그뿐인가?

제인이 산에게 호감을 드러냈을 땐, 팬이라며 난리였던 그가 바로 태세 전환하며 그녀를 경계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말해봐. 우릴 그렇게 열심히 엮은 이유가 뭔지.”

강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삼영은 그런 그녀를 어린 누이라도 보듯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한테는 살아갈 이유가 필요했으니까.”

“…….”

“나는 너희가 서로에게 그 이유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거든.”

산에게는 강이.

그리고 강에게는 산이.


“너희 둘이야말로 일리와 모아가 이룬 기적의 결과물이야.”

 

 


“…….”

“그래서 난 그들이 못다 이룬 걸, 너희가 반드시 이뤘으면 해.”

그의 말에 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총수장님은…… 제가 융합혼을 천계로 인도하면 천인으로 받아들이겠냐는 물음에 애매한 대답만 내놨었습니다.”

그는 천계에서 태천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어쨌든 융합혼을 꺼낼 수 있는 이는 자네뿐이니,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를 믿어주게.’


‘…….’


‘약속한 대로 혼이 천계로 무사히 인도되면, 그땐 어떤 일이 있어도 평생 자네의 편이 되어주겠네.’


‘저를 천인으로 인정하시고, 받아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의 그 침묵을 기억한다.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네만,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평화만 약속할 수 있다면야 안 될 것도 없지 않겠나.’

 
그 말에 산은,


‘무책임한 대답 잘 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천인들은 모두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러자 삼영이 대답했다.


“태천님은 단 한 명의 반대하는 천인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을 거야.”

“…….”

“이왕이면 모두가 너를 환영해주시길 바란 거지. 그러려면 너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강력한 명분이 필요했고.”

그가 가진 ‘다름’은 누군가의 ‘두려움’이 되기도 했다.

그것이 그에게 직접 선택권을 부여한 이유였다.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산이 스스로 천인임을 증명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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