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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숨겨진 이야기 (115/118)


#115. 숨겨진 이야기
2023.06.04.


삼영은 산에게 누군가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말고, 스스로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나의 다름이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부터라고 했다.


“수천 년을 몽마와 대치하던 게 천인이야. 그런 천인들이 몽마의 피가 섞인 천인을 두 손 들어 환영하는 게 쉬웠을 거라고 생각해?”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던 존재들.

이종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들이 종종 있었지만, 몽마와 천인 사이에 생명이 탄생한 건 지상과 지하의 오랜 역사를 통틀어 최초였다.


“마음을 열 시간이 필요했던 건, 너뿐만 아니라 천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리고 난.”

“…….”

“그들이 반드시 마음의 문을 열 거라고 생각해. 나 또한 네가 환영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고.”

삼영의 결의가 느껴지는 말에 산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곁에 있던 강도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띠었다.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어.’

처음부터 아군이었을 삼영을 등에 업은 것만으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강은 문득 내내 목에 걸려 있던 찜찜함을 털어놓았다.


“근데 천계에서 이 사실을 알게 돼도 괜찮아?”

“뭐가?”

“그게…….”

그녀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산이 대신 물었다.


“어쨌든 금기를 깬 죄인을 도왔으니, 내 어머니가 나를 가진 걸 알고도 묵인해준 거라면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자 삼영이 코웃음을 치며 당당히 말했다.


“몽마랑 천인이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가진 게 금기라고 누가 그래?”

“…….”

“피치 못할 책임을 져야 할 일이었다면 벌써 대가를 치렀겠지. 나는 그런 것들로부터 도망칠 생각이 없으니까.”

그의 말에 강도 산도 대꾸할 말을 잊고 말았다.


“금기는.”

삼영은 본질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천인이든 몽마든 인간 세상의 자연 섭리를 어지럽히고, 인간을 해치는 일. 그게 바로 금기야.”

힘과 권력을 동시에 지닌 상급 몽마들은 때론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그러니 한번 살인을 할 뻔했던 산이 언제 다시 금기를 깰지 모른다는 우려가 없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축복받아야 마땅할 생명의 탄생이 당사자에겐 저주가 되어버린 셈이었지만, 삼영은 산이 이제라도 제 삶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영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마저 말을 이었다.


“너희 아버지는 인간을 죽인 적이 없어.”

이일리는 몽마의 왕이었지만, 인간의 혼을 먹거나, 살인을 하지 않고도 아주 긴 시간 동안 왕좌를 지켜냈던 이였다.


“그만큼 선천적으로 강한 힘을 타고난 자였지.”

삼영은 식어버린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이쯤에서 네 부모님 이야기를 좀 들려줄까?”

그의 말에 강은 마치 제 출생의 비밀이라도 듣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고개를 돌려 본 산의 얼굴도 차갑기만 하던 아까와는 달리 제법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부모의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거의 없었던 터라 궁금했을 것이다.

너무 소중했던 것에 비해 너무 빨리 떠나버려야만 했던 그들의 못다 한 이야기가.

산은 기억하고 싶어도 자꾸만 흐려지는 기억을 애써 떠올렸다.

꽃처럼 아름답고 상냥했던 어머니와, 태산처럼 크고 높게만 느껴졌던 아버지를.

일리는 살아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린 아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다.

산은 그저 그런 아버지가 무뚝뚝해서 그랬던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겠지만, 그는…….


‘아빠.’


‘응?’


‘만약에 엄마랑 나랑 물에 빠졌는데, 한 명밖에 구할 수 없다면…….’


‘엄마.’


‘……아직 질문 다 안 끝났는데요.’


‘들을 필요도 없이 엄마니까.’


‘그럼 저는요?’


‘너는 알아서 헤엄쳐 나와야지. 아니면 엄마부터 아빠 쪽으로 밀어주던가.’


‘…….’


‘나는 내 아들을 나약하게 키운 기억이 없는데, 왜 그런 뻔한 질문을 하지?’

 

 
……지독히도 아내 바보였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문득 떠오른 어린 날의 기억에 헛웃음을 짓던 산에게 강은 안색이 안 좋은 것 같다며 물었다.


“아니, 그냥. 어릴 때 생각이 나서.”

고작 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또래의 인간 여자아이가 레스토랑에서 제 부모에게 물어보는 걸 보고는 그냥 생각이 나서 물었다가 본전도 못 찾았던 질문.

어린 마음에 꽤 충격받았던 기억이 있지만, 덕분에 엄마는 어떻게든 아버지와 힘을 합쳐 지켜줘야 할 존재라는 생각이 강하게 박혔던 것 같다.

결국엔 어린 자신을 지키려다 둘 다 목숨을 잃어야 했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 산에게 엄마를 지켜달라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실은 너를 엄마만큼 사랑해.’

 
제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줬었다.

그게 아버지인 일리와의 마지막이었다.

아내와 아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그는 제 목숨을 내놔야 했기 때문이다.

울부짖느라 흐려진 시야 너머로 점이 되어 작아지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향해 벌떼처럼 날아들던 수억만의 몽마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노렸던, 아버지 동생의 흐린 얼굴도.

상념이 깊어질 때쯤, 삼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어미인 모아와는 어릴 때부터 아주 친하게 지냈던 동료였다.”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삼영의 기억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꽃과 나무가 만개한 아름다운 영토인 화국(華國).

인간의 긍정적 감정을 주관하고, 인간의 복을 빌어주는 일을 했던 화국의 수장이 바로 산의 어머니인 모아였다.

그는 모든 이에게 다정했고, 따뜻했으며, 존재만으로 빛을 발하는 천인이었다.

천계의 어느 누구도 그런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화국의 수장이 몽마와 사랑에 빠져, 스스로 날개를 꺾고 천계를 떠났다.

삼영은 모아가 처음 아이를 가진 사실을 고백했던 날을 떠올렸다.


‘삼영아. 나 아이를 가졌어.’


‘뭐?’

 
가장 친한 친구이자, 오랜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그녀에게 고백도 하지 못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었다.

게다가 그녀의 연인이 몽마의 왕인 이일리(212)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는 것처럼 눈앞이 새하얘졌었다.


‘너 미쳤어? 대체 어쩌려고……!’


‘이 아이가 태어나면, 너도 예뻐해줄 거지?’


‘…….’


‘내 아이는 네 조카이기도 하잖아.’


‘……조카는 얼어 죽을.’

 
당혹감과 상실감에 눈물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고 있던 제게 모아는 아이의 이름을 고민하고 있다며 신이 나서 떠들어댔었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산이라고 짓겠다고 한걸, 어렴풋이 들었던 것도 같았지만, 그땐 그런 게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만약에 우리가 없더라도, 너만큼은 이 아이를 아껴줬으면 좋겠어.’


‘애만 놔두고 부모가 왜 없어져? 헛소리하려는 거면 나, 갈 거야.’

 
어쩌면 그때 그녀는 이미 자신이 아이를 위해 죽게 될 걸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찌 보면 그게 당연한 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방방 뛰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땐 모든 게 혼란이었다.

천인과 몽마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는 건 들어본 적도, 겪어본 적도 없던 일이었으니까.

또한 삼영은 천인 중 유일하게 일리를 대면한 이였다.

처음엔 무척 걱정스러웠다.

모아가 아이를 품고,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했던 결심을 그도 과연 가지고 있을까 싶어서.

아니, 애초에 몽마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길 수 있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우려는 일리를 직접 만나게 된 순간 기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무척이나 모아를 사랑했고,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제 목숨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였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모아를 오래 짝사랑했지만, 둘 사이에 다른 이가 끼어들 틈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그들은 천인과 몽마의 눈을 피해 인간 세상과 우국의 이계의 틈을 오가며, 아이를 지켜냈다.

태어난 아이는 사내였고, 이름은 일리가 인간 세상에 내려와 가지게 된 이름의 성을 따 ‘한산’이 되었다.


“너희 아버지는 금기를 어기지 않고도 가장 오랫동안 지하를 다스리던 왕이었어.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지.”

그건 산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태어나서 살아온 세계를 떠나 모든 걸 버리고 인간 세상으로 왔을 때, 인간을 죽이지 않고 버티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거야.”

스스로 날개를 꺾고 몸에 새겨진 숫자를 지운 몽마의 힘은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선 강한 악몽과 인간의 공포, 그리고 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너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살인을 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알겠어?”

“…….”

“바로 네가 그 이유였어.”

아들에게 금기를 깨고 태어난 아이라는 죄명을 씌워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되면 천인들은 네게 기회조차도 주지 않으려 했을 테니까.”

너는 그들의 기적이자, 삶의 이유였음을 잊지 말라는 말에 산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어쨌든 일리와 모아가 떠나고 삼영에게 남겨진 숙제는, 그들이 남긴 아이를 그들의 몫까지 책임져주는 일이었다.

부탁받은 일이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의지로 한 일이었다.

그리고 예상했듯, 홀로 남은 산은 곧바로 몽마들의 표적이 되었다.

쭉 그를 지켜보던 삼영은 살생하려던 산을 천계에 끌고 왔고, 어쨌든 공식적으로 그를 지켜본다는 명목하에 산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인간 세상에 내려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그는 천인으로서 지녔던 모든 능력을 검에 봉인해 두고 평범한 인간으로 살았다.

물론 쉽게 최면에 걸리지 않았고, 신체 능력도 보통 인간에 비해 여전히 뛰어난 편이었지만, 그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인간이 느낄 애환과 아픔을 고스란히 경험하며 살았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강은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열여섯.

학교 가는 길에 보았던 동네 백수 아저씨.

언제부턴가 나타나서 동네 이곳저곳을 고치고 돌보던 키다리 아저씨.

나와 내 연인을 지켜주기 위해 잠시 날개를 접고 내려온 신의 사자.


“고마워, 오빠.”

그녀는 산의 손을 꼭 잡으며, 삼영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오빠가 있어서, 너무너무 다행이야.”

처음으로 삶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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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휘는 문 엔터 사옥을 빠져나왔다.

최후의 결전이 머지않았으니, 준비된 상급 몽마들의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 올려두라는 지태의 명이 있었다.

어둠을 가로지르는 그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그래, 그럼 나가 봐.’


‘네.’


‘오구일(591) 교육 좀 시키고.’


‘알겠습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제인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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