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불안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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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불안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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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불안의 정체
2023.06.08.
어둑한 시골길을 걷는 제인의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녀가 걷는 걸음마다 붉은 핏자국이 매화처럼 점점이 피어났다.
“하아…… 하아……! 망할 놈의 천인들…….”
어떻게든 천인의 수장 하나는 잡아다 바쳐야겠다는 생각에 몸이 작살나는 줄도 모르고 설성과 싸웠다.
며칠 전, 지태와 나눴던 대화 때문이었다.
‘인간 손에 자랐다고 알고 있는데.’
‘……네. 그렇습니다.’
불길한 기분이 엄습했지만, 그저 제 기우이기를 빌고 빌었다.
그러자 악몽을 와인에 녹여 마시던 그가 들고 있던 잔을 허공에 돌리며 물어왔다.
‘인간들과 오래 섞여 산 몽마들은 쓸데없는 연민이 생기더라고. 골치 아프게.’
‘…….’
‘설마 너도 그런 건 아니지?’
‘그런 게 있을 리가요.’
그녀는 보란 듯 코웃음을 쳤다.
남자의 악몽을 좋아해 숱하게 가지고 놀다 버려온 게 자신이었으니까.
그런데 지태가 그런 제인을 빤히 보며 물었었다.
‘내가 확인해봐도 될까?’
‘……네?’
뜻 모를 미소를 짓던 그가 수화기를 들어 자신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인간을 호출했다.
‘인간의 혼만큼 몽마를 강하게 하는 게 없거든.’
‘…….’
‘너도 한번 죽여봐.’
당황스러웠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머뭇거렸다가는 어떤 뒤탈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렇게 제인은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을 죽이고 혼을 흡수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것만 같은 기분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해보니 별것도 아닌데, 뭐 때문에 아등바등 스스로 금기를 지키며 살았는지 허무할 정도였다.
하지만 요동치는 기운이 잠잠해지고 난 후, 이성이 돌아온 제인은 자신이 왜 그동안 인간을 해치는 일만큼은 하지 않았는지를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절대 사람을 해쳐선 안 돼, 제인아.’
바로 자신을 키워준 박만금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을 죽이는 데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면, 노지태는 그의 비서가 아닌 박만금을 죽이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엄말 살리는 길을 택한 것뿐이야.”
그녀가 애써 자위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치 온몸에 추를 달고 걷는 기분이었다.
제인은 인간보다 월등히 빠른 회복력을 가졌지만, 확실히 천인의 수장은 그 실력이 남달라서였을까?
잘려 나갈 뻔했던 팔에서 일어난 출혈이 멎질 않는다.
아마 인간의 혼을 먹지 않았다면, 설성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팔의 상처를 옭아맨 뒤, 물에 젖은 것만 같은 몸을 가누었다.
시골의 작은 동네는 가로등이 있어도 어두웠다.
월! 월월월월!
개 짖는 소리를 뒤로한 채 간신히 도착한 집의 낡은 대문은 늘 그렇듯 조금 열려 있었다.
아마 언제 불쑥 찾아올지 모를 제 변덕 때문에 늘 대문을 조금 열어놓던 게 습관으로 굳어진 탓일 것이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TV 불빛만 번져있던 문 안쪽에 불이 들어왔다.
안방의 문이 열리고, 박만금이 툇마루로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세요?”
“나야, 엄마.”
어둑해서 형체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딸의 목소리를 한 번에 알아챈 만금이 맨발로 뛰어나왔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우리 딸!”
컹컹컹컹!
마당에 있던 똥개가 우렁차게 짖어댔다.
“어휴, 저거는 아직도 주인 얼굴을 몰라보네.”
박만금에게 반쯤 안긴 제인이 누런 똥개를 흘기며 말했다.
“대봉이가 나이가 많아서 오락가락해. 그나저나 우리 딸 이 밤중에 어떻게 왔어? 늦게 돌아다니지 말라니까.”
“나, 엄마 보고 싶어서 왔지.”
제인이 만금의 정수리에 얼굴을 비비며 응석부렸다.
“밥은 먹었고?”
“에이, 그럼. 시간이 몇 신데.”
“그래도 배고프면 말해. 엄마가 국수라도 얼른 말아줄 테니까.”
“그러게. 간만에 엄마 국수 먹고 싶다.”
“말아줘?”
만금의 물음에 조용히 웃던 제인이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그럼 얼른 씻고 와. 시간도 늦었는데, 어른 자야지. 간만에 우리 딸 끌어안고 자보자.”
“응. 나 오늘 엄마 찌찌 만지면서 잘 거야.”
“다 큰 계집애가 찌찌는 무슨!”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며 딸의 허리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 * *
불이 전부 꺼진 시골 마을은 적막하다고 느낄 만큼 조용했다.
제인은 제 몸의 반밖에 되지 않는 만금을 끌어안은 채,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익숙한 체향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만금은 제인의 등을 두드려주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자그만 귓불을 만져 주다,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기도 했다.
“엄마.”
“응?”
“나 등 긁어줘.”
그녀의 요청에 만금의 거친 손이 옷 속으로 쑥 들어와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으, 시원해. 그 밑에도.”
“이짝?”
“조금만 왼쪽.”
“이짝?”
“어어. 거기.”
벅벅벅벅.
말이 사라진 공간엔 벌레 우는 소리와 오래된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가득했다.
“왜 안 자. 잠이 안 와?”
만금이 눈을 감은 채 물어왔다.
제인이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엄마는 눈도 어두우면서 어떻게 알아? 나 눈 뜨고 있는 게 보여?”
“안 봐도 다 알지.”
“거짓말.”
“진짜여. 엄마는 다 알아.”
“…….”
“무슨 걱정 있어? 서울살이가 마음 같지 않디?”
무료한 시골 생활이 지겨워 무작정 상경하겠다는 그녀를 만금은 말리지 못했다.
그저 정성 들여 키운 아기새를 자연에 방생이라도 하듯 보내주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는 말만 건넸을 뿐이었다.
“엄마. 나는 여기가 참 싫었다? 잘생긴 남자도 없고, 맨 노인네들뿐이고.”
“시골이 다 그렇지, 뭐.”
만금의 말에 조용히 웃던 그녀가 한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엄마랑 살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
“왜. 유투븐지 보튼지가 잘 안 돼?”
“아니.”
“그럼.”
“그냥…… 이제 서울이 싫어졌어.”
“그럼 그냥 내려와. 엄마랑 살게.”
“그럴까? 나 정말로 그냥 예전처럼 엄마랑 둘이 텃밭이나 돌보면서, 장 서면 읍내에 가서 맛있는 거나 사 먹고, 그러고 살까?”
“그럼 엄마는 좋지.”
“엄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이 깡촌에서 내가 좋아하는 건 엄마밖에 없었으니까.”
하려던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고 엉뚱한 이야기만 흘러나왔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제인은 다시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근데 엄마는 이상하지도 않았어?”
“뭐가?”
“나 처음 만났을 때. 겉모습은 다 큰 소녀였는데, 하는 짓은 네 살짜리 애 같았잖아.”
몽마는 처음부터 대부분이 처음부터 성체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생물학적 부모가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저 그들은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태어날 뿐이었다.
그런 제인에게 엄마라는 역할을 해준 만금은 어찌 보면 가장 신기한 존재였다.
또한 지하가 아닌 인간 세계에서 태어난 몇몇의 몽마들은 인간처럼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 인간과 비슷한 속도로 나이를 먹다, 성체의 모습을 갖게 되면 더 이상 늙지 않는다.
지하와 인간 세상의 중간쯤에서 태어난 제인은 사춘기 소녀 같은 외형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머리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라, 그저 본능만 좇아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보육원에 들어가게 됐고, 이곳저곳을 떠돌던 그녀에게 그곳은 뷔페와 다름이 없었다.
만금을 만난 건 그때쯤이었다.
“응? 엄마. 나 안 이상했어? 처음에 데리고 왔을 때 막 사이코 같은 짓도 많이 했잖아, 내가.”
제인의 말에 만금의 입술 사이로 푸스스 웃음이 쏟아졌다.
“뭘 이상해. 그냥 오지게 철이 안 든 지지밴가 보다, 했지.”
“…….”
“그럼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외모가…… 이상하다고 여기진 않았어?”
“아이구, 참내. 동안이라고 자랑허냐?”
그녀가 장난스럽게 엉덩이를 툭 때렸지만, 제인은 함께 웃을 수 없었다.
“……내가.”
“…….”
“혹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어쩌면, 처음부터 다 알고 있지는 않았어?
차마 다 꺼내지 못한 말 뒤로, 만금이 곧장 대꾸했다.
“네가 사람이 아니면 뭔디. 도깨비여?”
“아니, 뭐…….”
“그런 건 상관없어. 어차피 너는 누구보다 사람답게 살 거니께.”
만금의 말에 제인은 그녀의 옷깃을 꼭 쥐었다.
그러자 그녀가 제인의 등을 다독여주며 말을 이었다.
“엄마가 왜 네 이름을 제인이라고 지었는데.”
“……내 이름이 무슨 뜻인데?”
“별 반짝반짝할 제(晢) 자에, 사람 인(人).”
“…….”
“예쁘지? 그러니까 너는 이름값 하고 살아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돼야 한단 말여.”
없는 형편에 작명 잘하기로 유명한 노인네를 찾아가느라 8만 원이나 썼다며 웃던 만금이 잔잔히 말을 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나도 사람 구실 못하는 놈들 허다해. 짐승만도 못한 놈들도 많고.”
“…….”
“그러니께 반대로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그냥 사람답게 살면 되는 거야.”
잠이 묻은 만금의 목소리에 작은 웃음이 실렸다.
“사람답게 사는 게 뭐 별 거 있냐?”
“…….”
“남 해치지 않고, 도리를 알고 살면, 그게 사람답게 사는 거지.”
그녀의 말에 제인은 가슴 한쪽이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사람이 해야 할 도리. 그딴 건 모른다.
자신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만금이 자신을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아부었는지에 관한 것과 결국 자신은 그녀가 바라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안다.
소망이 사라진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현실은 재투성이였다.
.
.
.
강과 산이 돌아온 건, 저녁쯤이었다.
삼영은 자정에 천계의 문이 열린다고 했고, 설성은 천계로 다시 돌아갈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를 대신해 다른 수장이 내려올 거라고.
“머리를 종일 말려?”
멍하니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뒤늦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산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헤어드라이어를 가져갔다.
“아, 그냥 뭐 좀 생각하느라.”
“무슨 생각.”
“음. 네 생각?”
강의 심심한 농담에 산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금방 나왔잖아.”
빛의 속도로 몸을 씻고 나온 그가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그녀의 젖은 머리를 정성껏 말려주었다.
“네가 머리 만져 주니까, 기분 좋다. 잠이 막 솔솔 와.”
강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산은 대답 대신 손끝으로 그녀의 목과 두피를 꾹꾹 누르며 마사지해주었다.
눈을 감고 있자니, 문득 삼영이 술을 마실 때마다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꽃같이 웃으며 내게 말했지. 삼영아 나 아이를 가져쒀.’
그게 삼영의 첫사랑이자, 산의 어머니 이야기라는 걸 알고 나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나를 배 아파 낳아 기르고도, 나를 버렸던 내 어머니와는 달랐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늘 안타깝게만 여겨졌던 산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가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았던 건 아니었으니까.
머리를 다 말린 후.
강과 산은 침대에 누워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혼란의 시기였지만, 살갗에 닿는 서로의 숨결은 그런 걸 다 잊게 할 만큼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삼영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형체 없는 불안이 몸집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산을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땐 그냥 흘러가는 대화에 불과했지만, 다시 되짚어 보니 영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산아.”
“응.”
“나…… 궁금한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