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 피할 수 없는 일 (117/118)


#117. 피할 수 없는 일
2023.06.11.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혼란의 시기였다.

하지만 둘만 있을 때는 염려나 걱정 따윈 끼어들 틈이 없을 만큼 모든 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마치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처럼.


“산아.”

강은 산의 이름을 부르며 감았던 눈을 떴다.

빛에 따라 푸르게도 보이고, 붉게도 보이는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쳤다.

하려던 말을 잊을 만큼 아름다운 눈이었지만, 그녀는 흐트러지려던 마음을 다잡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그가 귓바퀴 뒤로 머리를 넘겨주며 되물었다.

그리고 강은 오래전, 산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럼 너는?’

 
그의 정체만큼이나 궁금했던 것.


'너는 나한테서 뭘 원하는 건데? 그냥 꿈만 먹으면 되는 거야?'

  
바로 그의 진짜 목적이었다.

그때 산은 고요히 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네 꿈을 독식하길 원해.’


‘궁극적인 목표가 그거야? 원하는 거나 더 바라는 건 없고?’


‘현존하는 가장 좋은 악몽을 독식하다 보면, 언젠가 내가 정점에 서는 날도 오겠지. 아무도 나를 위협할 수 없고, 아무도 내 위에 설 수 없게 되는 순간이.’


‘…….’


‘일단은 그게 목표야.’


‘왕이 되겠다는 거네?’


‘수많은 선택권이 있지만, 일단은 그래.’

 
그때 자신이 말했던 ‘왕’의 의미는 아무도 그를 위협할 수 없고, 아무도 그의 위에 서지 못 하게 할 거라는 말을 듣고 던졌던 말이었다.

몽마의 세계에 왕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기 전의 일이었던 만큼 별생각 없이 했던 말.

하지만 산은 과연 어떤 의미로 한 대답이었을까?

삼영은 이제 그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할 때가 된 만큼, 앞으로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산의 진짜 속내는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천인들을 믿지 못했고, 천인들 역시 그를 믿지 못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럴 것이다.


“있잖아.”

조용히 말문을 연 그녀를 산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왕이 되겠다고 했잖아.”

“…….”

“융합혼을 어쩔 생각이야?”

내심 천계로 인도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오길 바라며 물었다.

어느 선택을 하든 그를 존중했지만, 그의 선택이 그를 해치진 않았으면 했으니까.

그러자 잠시 생각하던 산이 자신의 진짜 계획을 고백했다.


“천계든 지하든 힘이 곧 권력인 세상이야. 그러니 내가 그 두 무리를 통틀어 가장 강해진다면 누구도 내게 위협이 될 수 없겠지.”

“…….”

“그런 세상에서 너와 살 거야. 네가 늙어가고, 네가 죽어가는 걸 보면서.”

돌아온 대답에 그녀는 애써 웃었다.

안타깝게도 애초에 그는 융합혼을 천계에 인도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삼영을 포함한 천인들을 등져야 할 미래 앞에 강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산이 세상의 모두를 등지고, 세상의 모두가 그를 등지더라도 자신만은 산의 곁에 서주고 싶었다.

그의 선택이 그의 죽음은 물론,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게 되는 결말을 불러올지라도.

애초에 모두가 행복해지는 선택이 있었다면, 산도 이런 결정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다른 선택을 해보자고 그를 회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이해하기엔 그들의 세상 이치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제가 생각하는 최선이 또 어떤 나쁜 결말을 가져올지 알 수 없어서였다.


“융합혼을 차지하게 되면 너는 안 늙어?”

강이 물은 말에 산이 가볍게 웃었다.


“아마 그럴걸?”

“치…… 나만 할머니가 되긴 싫은데.”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좋은데?”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이라도 못 하면.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의 대답이 싫지 않았다.


“아무튼 세간의 시선도 있으니 밖에서 데이트하기는 좀 힘들겠다. 그렇지?”

느닷없이 심각해진 그녀의 말에 산의 웃음이 짙어졌다.


“세간의 시선이 무슨 상관이야. 우리 둘만 좋으면 되지.”

“나는 상관있어.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외진 산속에 들어가서 둘만 살자.”

“좋아.”

“아, 로미도 같이 셋이서 살면 되겠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내가 늙어서 누워만 있게 됐을 때, 네가 나가서 바람을 피진 않을지 로미한테 감시해달라고 할 거거든. 그러니까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생각이었다면 이제라도 솔직해지는 게 좋을걸?”

강의 마지막 말에 그도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난 언제나 네게 솔직했어.”

산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는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며 말했다.


“몸도.”

“…….”

“그리고 마음도.”

앞서 말했듯, 인간에 비해 몽마의 노화는 아주 천천히 진행된다.

하지만 질 좋은 악몽을 많이 흡수한 몽마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겉모습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게다가 융합혼을 차지하게 된다면 불멸은 물론이고, 영원히 늙지 않는 외모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 말에 강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불멸을 원해? 그게 네 진짜 목적이야?”

그녀의 질문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너보다 빨리 죽고 싶진 않아.”

살아야 할 목적을 잃은 채 달려온 건, 이유도 모른 채 쫓기는 입장이 된 사람이 본능적으로 도망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지만 이제는 살아야 할 이유도, 죽음에 대한 신념도 명확해졌다.

산은 강이 안전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길 원했다.

그런 삶이 되도록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걱정이 됐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해왔을 산을 이해했지만, 그의 선택이 어쩌면 평생 그를 위협 속에 살게 할 길이 되지는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

하지만 그 우려 섞인 마음을 차마 입 밖에 내진 못했다.

산의 말처럼 그가 속한 세상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였으니, 강하면 강한 만큼 지킬 게 많을 거고, 약하면 약한 대로 잃을 게 많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가 뒤늦게 되물었다.


“내가 죽고 나면?”

그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산의 입술 사이에선 바람 같은 웃음이 샜다.


“잊었어?”

“…….”

“우린 한날한시에 죽기로 했잖아.”

내 삶의 끝은 내 손으로 만들어준 네 무덤 옆이 될 테니,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는 하나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어.”

너를 위해 선명하게 그려냈던 목표는 네가 사라진 이후엔 그저 백지에 불과했으니까.

그 결연한 대답에 강은 더 이상 묻기를 포기한 채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산이 온몸을 감싸듯 안아주자, 세상의 소음도 멀어지고, 모든 걱정거리도 사라져버린다.

온 우주에 둘만 남은 것처럼.

그녀는 차라리 모든 게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꼭 끌어안은 채 벌어진 이계의 틈에 떨어져 먼지처럼 우주를 돌고 돌다가, 깊고 고요한 바닷속으로 영영 잠겨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에게 피할 수 없는 진실을 전해야 할 때였다.

그에게 원수의 정체를 알릴 생각을 하니, 더더욱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강은 산을 끌어안은 채 그의 품속에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산아.”

“응?”

“네 부모님을 죽인 게, 지금의 왕이라고 했지?”

“……그랬지.”

“이사오(245)가 진짜 이름이라고 했지?”

“…….”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직감한 듯 산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강은 여전히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얼굴을 묻은 채 진실을 고백했다.


“노지태가 이사오였어.”

아직도 아물지 못한 네 상처가 너무 많이 헤집어지지 않길 바라며.

.
.
.

한편.

만금은 제인을 끌어안은 채 어느덧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미친 듯이 짖어대던 개들도 모두 잠든 고요한 새벽.

제인은 눈을 감은 채, 만금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그러고는 어린 아기가 응석을 부리듯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몽마도 잠을 자기는 했다.

접촉을 통한 꿈의 문에 진입할 때를 제외하곤 인간처럼 수면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건 아니었지만, 인간 세상에서 나고 자란 많은 몽마들이 보통의 인간들처럼 잠을 즐기기도 했다.

제인도 마찬가지였다.

악몽을 먹어야지만 연명할 수 있는 몽마임은 분명했지만, 인간처럼 잠을 자기도 했고, 인간의 음식을 좋아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그녀는 악몽을 먹는다는 것 외에는 지극히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을 해치지 않은 모든 몽마가 그러했다.

하지만 근래에는 잠이라는 걸 자본 기억이 없었다.


‘……이게 다 그 망할 왕 때문에.’

노지태의 수하로 잡히고부터는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그에게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었지만, 제인은 자신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힘을 얻어 강해지는 만큼 강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 현실에 몸과 마음은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만 갔다.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할 곳은 오직 여기뿐이었다.

그래서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루라도 만금의 곁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고향을 찾은 거였다.

큰 욕심 내지 않고 예전처럼 잘생긴 남자들의 악몽이나 먹고 살았다면 여전히 행복했을까?

만금을 제외한 모든 걸 잃고 보니, 문득 옛날이 그리워졌다.

이런 절망스러운 와중에도 버틸 수 있는 건 아직 만금이 제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뒤척이다 보니 상처가 쑤셨다.


‘……제기랄! 더럽게 아프네!’

피는 멎었지만, 다친 팔이 연신 욱신거렸다.

저도 모르게 끙끙대는 신음을 흘리자, 만금이 잠결에 손을 뻗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제인은 그런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순간 전혀 느껴지지도 않던 낯선 기척이 지척에서 강렬하게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만금의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신휘가 보였다.


“……!”

“쉿.”

어둠 속에서 그가 조용히 하라며 제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개들도 느끼지 못할 만큼 완전히 기척을 지운 채 나타난 그가 저를 깨우기 위해 일부러 기척을 흘린 거였다.

제인은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눈꺼풀을 떨었다.

너무 놀라 헉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팔은 만금을 감쌌다.


“엄마는 건드리지…….”

“조용히 하라니까?”

“…….”

다시 한번 주의를 준 신휘가 바깥으로 나오라며 고갯짓을 했다.

제인은 마지못해 만금을 홀로 둔 채 그가 기다리고 있는 마당으로 나갔다.

기척에도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똥개는 이미 아주 깊은 잠에 빠진 뒤였다.

아마 신휘가 한 짓일 게 분명했다.

그는 제인을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연민이 없다고?”

“…….”

“왜? 아예 제물로 바치지.”

“무슨 소리야! 나는 그냥…….”

“네가 여길 찾아온 걸 알면, 왕은 네 손으로 네 엄마를 죽이게 하고도 남을걸?”

웃음이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그녀를 보던 신휘가 경고했다.


“그러니까 지키고 싶은 인간이 있으면, 애초에 엮이지를 마.”

“…….”

“이미 너도 알고 있었던 답이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