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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실험 (118/118)


#118. 실험
2023.06.15.



 


“연민이 없다고?”

“…….”

“왜? 아예 제물로 바치지.”

“무슨 소리야! 나는 그냥…….”

“네가 여길 찾아온 걸 알면, 왕은 네 손으로 네 엄마를 죽이게 하고도 남을걸?”

웃음이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그녀를 보던 신휘가 경고했다.


“그러니까 지키고 싶은 인간이 있으면, 애초에 엮이지를 마.”

“…….”

“이미 너도 알고 있었던 답이잖아.”

엮인 인연을 끊어내지는 못할망정 정에 이끌려 스스로를 벼랑 끝에 몰아넣은 그녀의 어리석음을 질책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차마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피해버렸다.

자신의 행동이 자신뿐만 아니라 만금까지 위험하게 만들었음을 재차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저를 놓아달라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았다.

신휘는 시간이 없다며 마지막 경고를 했다.


“돌아가려면 지금 돌아가.”

“…….”

“아니면 네 엄마랑 여기서 나란히 죽던가.”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잠에서 깬 똥개가 제인을 보고 마구 짖어대기 시작했다.


“컹! 컹! 컹컹컹!”

동네의 다른 개들과 이웃들은 깊은 잠에 빠졌는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만금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하루가 멀다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저 늙은 똥개만이 미친 듯이 저를 보고 짖어댈 뿐이었다.

바보는 감기도 안 걸린다더니, 딱 그 짝 아닌가.

멍청한 녀석은 잠도 깊이 들지 않고, 최면도 빨리 풀리는 모양이었다.


“컹컹컹컹컹!”

“이 개새끼가 진짜……!”

화가 난 제인이 개를 죽이려고 손을 뻗었다가 간신히 다시 거두었다.

몽마를 알아보는 눈이라도 가진 건지, 저만 보면 짖어대는 괘씸한 놈이었지만, 녀석이 사라지면 만금이 슬퍼할 것이다.


“넌 운 좋은 줄 알아라.”

“컹컹…… 커허어어억!”

그녀의 손짓 한 방에 놈은 다시 혀를 길게 뺀 채 벌러덩 드러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정신 사나운 소음이 사라지자 제인은 신휘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덩그러니 남겨진 그녀는 한참이나 그렇게 서 있다가, 떨리는 눈으로 만금이 잠들어 있는 안방을 바라보았다.

누르고 있던 울음이 단숨에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묶여버린 것만 같은 발을 어렵게 떼 만금에게 다가갔다.


“엄마.”

조용히 중얼거린 제인이 손가락을 들어 엄지로 그녀의 이마를 가로로 그었다.

만금이 깨지 못하도록 깊은 최면을 걸어둔 것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제인은 또 한 번 그녀의 이마를 가로로 그었다.

그렇게 만금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영원히 지워냈다.

제인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주름진 손을 잡고 손바닥 위에 제 뺨을 기댔다.

일렁이던 눈가에 금세 물기가 고여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나 키워줘서 고마워.”

“…….”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하고.”

“…….”

“사랑해.”

그렇게 제인은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운 뒤, 조용히 그녀의 곁을 떠났다.

처음부터 만금 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그날 새벽.

제인은 서울로 돌아와 자주 찾던 클럽을 찾았다.

거기서 인간 남자의 악몽을 삼키고, 그를 죽여 인간의 혼을 삼켰다.

두 번째 살인은 훨씬 수월했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고, 인간들의 눈을 속일 뒤처리도 깔끔했다.

기운을 읽고 인간 세상에 잠복해있던 천인들이 검거에 나섰을 땐, 이미 그녀의 흔적은 능숙하게 지워진 후였다.

얼굴에 피를 범벅으로 묻힌 제인이 빛도 들지 않는 어둑한 골목길을 비틀대며 걸었다.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처럼 아드레날린이 솟았는데, 알 수 없는 공허감에 텅 빈 몸과 마음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술보다 독한 무언가가 온몸의 혈류를 따라 퍼지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녀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기분은 하늘로 솟았다가 땅으로 꺼지길 반복했다.

정신을 놓을 만큼 짜릿했다가도, 삶을 놓고 싶을 만큼 허무해졌다.

한강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려던 양신휘의 마음을 다른 각도로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사는 게 재미없어졌다는 게 이런 거였어?”

대답도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던지며, 제인은 쓴웃음을 뱉었다.

그래도 가장 이성적인 선택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속이 후련했다.

제가 사람처럼 살길 바라며 이름에 사람 인(人) 자를 넣어준 만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었지만, 더 이상 그녀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게 됐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 몽마는 몽마답게 살아야지.”

술과 피에 흠뻑 취해 비틀대던 제인이 허탈하게 웃었다.

무얼 해도 구멍 난 가슴이 채워지지 않았다.

.
.
.

다음 날.

삼영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문 엔터의 존재와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후였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했고, 성 감독과 양은오 작가는 비밀의 정원을 찍기 위해 남주 캐스팅을 한참 진행 중이라고 했다.

촬영장 집단 혼절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검색을 해도 기사는커녕 비슷한 가십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부터 그런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강은 이런 일이 정말 가능한 건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삼영에게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이 과거로 돌아간 게 아니야.”

“그럼?”

“그냥 사람들 기억 속에서 그 일이 지워진 것뿐이지.”

몇몇의 상급 몽마들은 자신을 본 인간들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드물게 무리를 지어 살며, 인간 세상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몽마들은 그렇게 인간의 기억을 지우는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리셋해버린다고 했다.

인간들은 알지 못하지만, 세상에서는 벌써 몇 번이나 그들이 속했던 무리의 존재가 사라지고, 하루아침에 다른 형태로 탈바꿈해 생겨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사라져버린 집단은 인간들에게 이미 익숙한 것들 사이에 섞여 조용히 다시 자리를 잡기도 해.”

대표적인 케이스가 연예계와 대기업이라고 했다.

그 과정 중에 이름이나 외형이 아예 바뀌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노지태 무리는 천인들한테 제대로 발각된 만큼, 금세 다시 움직이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좋게 말하면 시간을 번 셈이지만, 그건 몽마들에게도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결코 유리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일.

삼영은 자못 심각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그보다.”

“…….”

“산이는 좀 어때?”

그가 물어온 말에 강이 뒤늦게 미소 지었다.


“산이는 걱정하지 마.”

그녀가 괜찮다는 말 대신 고른 대답이었다.

물론 삼영도 그가 정말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물어본 말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났다면 벌써 나고도 남았겠지만, 그래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려면 산을 주시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산이 쳐놓은 결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운은 강의 집을 온전히 감싸듯 좁고 단단하게 둘러있었다.

손을 뻗은 삼영이 창문 옆의 벽을 만지작대자 푸른빛이 희미하게 어룽거리며 우웅- 하는 소리를 냈다.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

 

 
삼영이 놀란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챈 듯 곁에 있던 로미가 다가와 우쭐거렸다.


“우리 주인님 능력 짱짱맨이죠?”

입만 벌리고 있던 그는 뒤늦게 한 방 맞았다는 듯 웃었다.


“그러게. 산이가 천인의 결계를 칠 줄은 몰랐네.”

“우리 주인님은 천인과 몽마의 피를 모두 물려받았으니까요.”

“그럼 몽마의 결계도 칠 수 있다는 거야?”

“당연하죠!”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몽마와 천인의 결계를 모두 칠 수 있는 건 세상에 우리 주인님밖에 없을걸요? 히히.”

로미의 말대로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계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보통 몽마의 결계는 붉은 기운을 담고 있고, 천인의 결계는 푸른빛을 담고 있다.

그리고 결계를 뚫고 들어올 수 있는 건 같은 급의 동족이거나 결계를 뚫고 들어온 자가 결계를 친 이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가졌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삼영은 자신이 강의 집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후자이거나, 이미 자신이 결계의 반경 안에 들어온 후에 산이 결계를 친 거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딱 집의 크기만큼만 펼쳐진 결계 안 그 어디에서도 그의 기척이 읽히지 않았다.

다시 강에게 돌아온 삼영이 물었다.


“산이 지금 어디 있어?”

“만나야 할 사람이 있대.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온다고 했고.”

“뭐……?”

“걱정하지 마. 노지태 만나러 간 건 아니니까.”

그녀는 그가 무얼 우려했는지 안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러자 삼영이 다시 물었다.


“누굴 만나러 간 건데?”

그의 물음에 우다다 뛰어온 로미가 말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그 하부지가 천인들한테 모습을 드러내기 극도로 꺼리는 신비주의자라……!”

“백 노인 만나러 갔구나.”

“뜨헙! 어, 어떻게 알았지?”

놀란 그녀가 양손으로 제 입을 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삼영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모르는 척해줄게.”

“……진짜죠?”

“그럼.”

백 노인은 일국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실력자였다.

그만큼 그는 뛰어난 도공이자, 과학자였고, 의술가였다.

다만 단점이라면 돈을 너무 밝히고, 호기심이 위험할 만큼 많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걸 못 견뎌 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게 단점이었다.

아마 백 노인이 마음만 제대로 먹었다면, 일국의 수장 자리를 두고 순우와 박빙의 승부를 겨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결국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천계를 떠나 인간 세상으로 내려갔고,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지만, 산이 그의 도움을 받고 있었을 거라는 짐작은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가 인간 세상에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백 노인의 도움이 필요했을 거고, 모아는 천계에서도 그와 사이가 좋았으니까.

.
.
.

그 시각.

산은 삼영의 예상대로 백 노인을 찾아갔다.

단번에 옮긴 거처를 찾아낸 그를 본 백 노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라 기함했다.


“너, 너, 너…… 여긴 어떻게 또 알고 찾아왔냐? 이 거머리 같은 놈! 쌀벌레 같은 놈! 지긋지긋한 여름밤 모기 같은 놈!”

온갖 벌레 취급을 다 당한 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랑 원수진 것도 아닌데, 매번 다짜고짜 욕부터 하는 이유가 뭡니까?”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그는 언제 어디서 만나든 꼭 나쁜 짓을 하다 걸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매번 격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백 노인은 이번에도 펄펄 뛰어댔다.

그런데 오늘의 그는 평소보다 더 유별났다.


“다, 당장 돌아가지 못, 못할까? 여, 여기가 어디라고! 어? 네가! 감히이이!”

더듬거리는 말투.

흔들리는 눈빛.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터질 듯한 핏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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