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완전한 내 편
(2/110)
2. 완전한 내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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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완전한 내 편
2022.06.05.
“거의 도착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대표님은 일정이 있으셔서 지호 씨만 올라오실 것 같네요.”
“네. 감사합니다.”
혜윤은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여직원의 상냥함을 눈에 담았다. 차는 나중에 함께 마시겠다는 대화를 끝으로 그녀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가는 듯했다.
그제야 둘러보게 된 4층 대표실. 지호의 회사는 건물 외관만큼이나 내부 또한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다. 높은 층고와 일정한 간격으로 큼지막이 자리한 창문들은 공간을 더 넓어 보이게 했다. 한 층이 통째로 대표실이니 더 그럴 수밖에.
몇 개의 유리창 밖으로 가을 저녁이 번져가고 있었다.
[혜윤아, 6시까지 늦지 말고. 말도 안 되는 기회니까 꼭 잡자. (오후 1:31)]
다시 들여다본 몇 시간 전 민우의 메시지. 그 글자들 위로 지난 며칠의 기억들이 붕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에휴, 진짜 이게 무슨 일일까.”
상상했던 이야기들을 어설픈 시나리오와 대본 형식으로 적어둔 게 전부였는데. 그걸 대학 선배인 민우가 보게 된 게 시작이었다. 중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묻지도 않았고.
결론적으로 시나리오가 그 유명한 안지호에게 갔고, 마음에 들어 했고, 출연 확정 전에 작가인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까지만 알고 나왔다.
‘카페 사장도 좋지. 그래도 글 쓰는 재능 그렇게 썩히는 거 아깝지도 않아?’
민우의 말에 하마터면 사실대로 말할 뻔했다. ‘그 유명한 동화작가 장윤이 사실 저예요, 선배.’라고.
혜윤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는 취미이기도 했지만, 이런 식으로 필명 작가인 자신을 외부에 소개할 때 써먹을 수 있는 하나의 방패막이기도 했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돈으로 저렇게 잘 먹고 잘살지 싶어 하면 곤란하니까.
필명이 주는 자유는 여러모로 컸다. 본래 가진 이미지를 의식 안 하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 특히 그랬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런 일이 벌어졌고, <23센티미터> 시나리오엔 민우가 흡족하게 ‘극본 장혜윤’이라고 적어놓았으니.
‘뭐, 이번 한 번은 어쩔 수 없지.’
띵동-
그때 가려진 벽 너머로 희미하게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렸다.
탁. 탁. 탁. 가까워지는 발소리마다 혜윤의 마음속을 부유하던 생각들도 하나하나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땐.
하마터면 딸꾹질을 할 뻔했다.
혜윤이 처음 지호를 보며 한 생각은 딱 한 가지였다.
‘앞으로 아우라라는 단어는 함부로 쓰지 말아야겠다.’
지호는 검은색 캡 모자를 시작으로 스웨트셔츠와 바지, 스니커즈까지 온통 블랙의 향연이었다.
검은색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면 잘 어울린다고 말해 주고 싶지만, 보호색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감추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철저히 실패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무슨 수를 써도 그 아우라를 감출 수는 없을 거라고.
이런 게 아우라라는 거구나.
“안녕하세요. 장혜윤 작가님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외모와 아주 잘 어울리는 저음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녹아든 자신의 흔한 이름이 특별하게 들릴 만큼. 혜윤은 많이 두근거렸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에 살짝 떨듯이 답한 건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지만.
“제가 늦은 건 아니죠? 아직 6시가 안 된 것 같은데.”
“네. 제가 일찍 도착했어요.”
가벼운 끄덕임과 함께 지호는 손에 쥐고 있던 <23센티미터> 시나리오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말려 올라간 모서리와 손때 묻은 표지. 혜윤은 제 글이 사랑받은 흔적을 보며 잠시 행복을 누렸다.
그렇지만 그 행복을 누리는 건 정말 잠시였고, 그 뒤로는 입술만 오물오물 뭉개기 바빴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호가 너무도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봤기 때문에.
그녀도 상대의 눈을 잘 바라보는 편이었지만 지호는 눈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을 어루만지는 녹진한 눈빛이 끝날 줄을 몰랐다. 떨리는 티를 안 내려고 했는데 점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커, 커피! 달라고 할까요? 제가 말씀드리고 올게요.”
“말해놨어요. 곧 올 거예요.”
숨을 돌릴 틈을 마련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지호는 가볍게 쳐냈다. 시선은 거두지 않은 채로. 거기에 살짝 미소까지 얹어서.
지호는 혜윤을 보며 문득 어느 비 오는 봄날의 촬영을 떠올렸다. 그날 빗방울이 맺힌 채 하늘하늘 떨어지던 벚꽃잎들이 꼭 혜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작고 하얀 얼굴에 은은한 홍조를 띤 두 뺨이 그랬고, 대답하거나 몸을 움직일 때 어깨맡에서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물이 맺힌 것처럼 촉촉한 눈빛이 그 봄의 젖은 벚꽃잎을 상기시켰다. 맑고 깊은 눈에 호기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게 작가들의 보편적인 눈빛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리지만 자유로워 보였고, 아이처럼 해맑지만 우주처럼 심원해 보였다. 꽤 이색적이었다. 그래서 그날처럼 똑같이 입 밖으로 소리를 내고 싶었다. ‘참 예쁘네.’라고.
글을 많이도 잘 쓰나 보다. 저런 얼굴로 배우를 안 하는 걸 보면.
탁-
“저녁 시간이라 디카페인으로 준비했어요.”
“감사합니다.”
지호의 감상은 여직원의 등장으로 멈출 수 있었다. 그 틈에 혜윤은 고개를 돌려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다시 단둘이 남게 되자 그의 묵직한 목소리가 넓은 공간을 채운다.
“시나리오 잘 봤어요. 일단 이 인사를 꼭 하고 싶어서 뵙고 싶다고 했어요. 첫 내레이션부터…… 인상 깊었어요.”
“좋게 봐주셨다니 고마워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픽션인가요? 아니면 약간의 경험담?”
지호가 질문을 던지며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여전히 시선은 한 사람에게 꽂혀 있는 채로. 턱이 슬쩍 들릴 때마다 감질나게 보이는 눈빛이 매혹적이었다.
혜윤은 누구에게 어떤 질문을 해도 저런 눈빛이라면, 원하는 답을 얻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가상의 이야기예요. 저는 종수처럼 호사스러운 라면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호사?”
“네. 꽃게 라면 귀하잖아요.”
“그런가…….”
지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호사라는 표현이 조금 의아했다.
선장인 아빠와 단둘이 사는 종수, 그 집 식탁에 종종 올라오는 꽃게 라면. 좋은 게들은 당연히 팔았을 테니 구경도 못 했고 팔지 못하는 안 좋은 것들로만 차려진 밥상의 연속. 그중 하나가 다리가 2개 없는 꽃게였을 텐데.
“왜요? 제 말이 조금…… 이상했나요?”
“호사라는 표현이 재밌어서요. 다리가 몇 개는 없는 꽃게를 호사처럼 여겼을까 싶어서.”
그가 커피 속에서 천천히 작아지는 얼음을 보다가 혜윤을 응시했다. 여전히 옅게 웃는 표정이었지만, 혜윤은 자신의 말이 그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단 걸 바로 간파했다.
그건 뭐든 유심히 바라보는 작가의 이점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본래 타고난 것이기도 했다.
혜윤은 마음이 가는 사람이라면 단 몇 마디 대화로도 그 속내를 들여다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게 있다면 지호 또한 그 부분에선 꽤나 고수라는 것이다. 알아채는 쪽으로나, 막아내는 쪽으로나 모두.
고요함이 흐르는 가운데 둘의 눈빛이 부딪혔다. 누구도 먼저 굽히지 않아 잠깐 동안 틈 없이 얽혀 있었는데 먼저 눈꼬리를 부드럽게 푼 건 혜윤이었다.
“아마 종수라면 그랬을 것 같아요. 종종 아빠의 하루 끝을 그려봤을 테니까요.”
“……하루 끝?”
“네. 크고 좋은 게들은 차곡차곡 빠져나가고…… 조업이 끝날 때쯤엔 몸통이 잘리거나 여기저기 깨진 게들만 갑판 위에 남아 있었겠죠. 아빠는 그중에 제일 깨끗한 걸 골라 오셨을 거예요. ……한 사람을 위해서.”
그 한 사람이 자신이라도 된 것처럼 혜윤이 눈을 곱게 휘었다. 왕연히 반짝이는 눈동자는 분명 행복을 그리는 것 같았다.
지호는 그녀가 전해 주는 이야기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 여린 목소리가 귀가 아닌 가슴으로 흘러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깨닫게 된 것도 있었다.
잔잔한 마음에 파동을 일게 하는 건 그리 큰 힘이 필요치 않다는 걸.
오직 한가운데, 딱 한 방울이면 충분하다는 걸.
“그래서 다리가 2개 없는 꽃게가 아니라, 다리가 8개나 있는 꽃게가 식탁에 올라온 날엔…… 와, 이렇게 귀한 아침밥을 먹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면서 웃었을 거예요.”
그녀의 해사한 웃음에 지호는 잠깐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혜윤은 정확히 종수의 이야기인 양 제 어린 시절을 읽어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자신을 불쌍히 여겼던 주변 사람들이 그에겐 와닿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시간이 정말 소중했고, 더없이 행복했으니까.
“……지호 씨?”
“아, 네.”
잠시 오래된 기억 속에서 헤매던 지호를 깨운 건 혜윤이었다. 곧장 정신을 차리고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창밖으로 쓸쓸한 가을 저녁이 내려앉았건만 그녀 주변만 봄처럼 밝고 따뜻해 보였다.
당장 그 옆으로 가고 싶을 만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글이 좋아서 질문이 많아지네요.”
“네. 괜찮아요.”
그가 흔들리는 마음을 눌러가며 다시 대화를 이었다.
“작가님이 생각하시기에…… 종수에게 희수는 어떤 존재죠?”
<23센티미터>의 내용은 간단하면서도 약간 복잡하다.
배경은 2000년대 초반. 남자 주인공 종수의 고모 부부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사이에서 입양되어 자란 딸 희수가 한 달 동안 종수의 집에 함께 살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종수는, 어찌 보면 남이라고 할 수 있는 사촌 누나 희수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살짝 기울어진 고개와 저 너머 종수의 마음을 헤아리려는지 현실을 놓은 눈빛. 지호는 그런 혜윤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봤다.
따뜻하게, 조금은 애틋하게.
“비슷한 아픔이 있는 누나? 아니면…… 첫사랑?”
그리고 그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눈빛으로 살짝 채근을 보태기도 했다. 종수의 시간을 실제로 살아온 자신에게 유일하게 없던 존재가 희수 같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종수에게 희수가 어떤 의미일지.
연민이라기엔 너무 부족하고 그나마 첫사랑이라면 좀 더 묵직해지려나. 하지만 역시, 그걸로도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궁금했다. 가상의 이야기라며 순수하게 웃던 혜윤이 정말 자신과 같은 눈으로 이 작품을 바라보는지. 자신이 못 찾은 답을 줄 수 있는지.
그때, 종수를 들여다보던 혜윤의 눈이 지호를 향했다. 창 너머로 들어온 석양빛이 그녀의 뺨 위에 예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보다 더 예쁜 미소로 입술을 움직인 것도 그때였다.
“……구원자 아닐까요?”
지호의 얼굴이 경이로움에 굳어버린 것도 그와 동시였다.
“종수에게 희수는…… 구원자였을 거예요. 새로운 세상으로 데리고 나와 준 사람.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
혜윤은 생각지도 못한 단어로 그의 머리를, 가슴을 쾅쾅 부숴대기 시작했다. 잠시 밭은 한숨을 쉰 지호가 또렷해진 초점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 아빠랑은 다른 건가?”
“음…… 예를 들면 아빠는 종수가 슬퍼할까 봐 엄마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잖아요. 그렇지만 희수는 단번에 말해요. 누군가를 엄마라고 부르는 기분은 참 따뜻하고 좋다고.”
“…….”
“종수의 마음을 아는 거죠. 무얼 궁금해하는지, 왜 궁금해하는지. ……어떤 답을 원하는지.”
가녀린 목소리였지만 망설임은 조금도 없었다. 지호는 혜윤의 눈을 깊게 들여다봤다. 지나치게 촉촉한 갈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제 눈에도 물기가 맺힐 것 같았다.
그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은 혜윤이 마지막 대답을 더했다. 대답 같은 정답을. 어쩌면 그에게 그녀 자신이 갖게 될 의미를 새겨주듯이.
“네. 같은 시선으로 서로를 꿰뚫어 보는…… 완전한 내 편.”
지호는 평생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