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냥 어디 가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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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냥 어디 가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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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냥 어디 가지 마요
2022.06.08.
“사실 오기 전부터 출연은 마음먹고 왔어요. 그런데 작가님이랑 이야기하다 보니까 뭔가…….”
“……뭔가?”
지호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혜윤은 말을 망설이는 게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당연했다. 지호 스스로도 뭔가를 망설여 본 기억이 거의 없었으니.
“제 출연을 담보로 제안을 하고 싶어졌어요. 원래 이렇게 치사하게 굴지 않는데.”
“제안이라면 뭘까요?”
“작가님이 희수로 출연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김 PD님이 왜 작가님을 여주인공으로 원했을까 싶었는데…… 이젠 나도 간절해져서.”
혜윤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고함치듯 되물었다. 조용한 공간을 쨍하게 가로지르는 소리에 본인은 금세 당황했지만 지호는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다.
“대학 때 연극부도 하셨다면서요. 별반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건 어떻게…….”
“김 PD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글도 잘 쓰고 연기도 잘해서 배우 할 줄 알았는데 안 하더라고.”
“와, 말도 안 돼.”
지호는 글과 연기 앞에 ‘예쁜 얼굴에’라는 언급은 빼고 전했다. 다른 남자의 외모 칭찬까지 전해 주기엔 이유 모를 부아가 치미는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삐죽이며 미간을 찡그린 혜윤의 시선이 테이블에 꽂힌다. 뭔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는데 어찌나 생동감이 넘치는지. 지호는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얼른 두 입술을 꾹 붙였다.
“죄송하지만 그건 거절할게요. 조금…… 힘들 것 같아요.”
“……아쉽네요.”
거절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아쉬울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그녀의 억울해 톡 나온 아랫입술을 보면 마냥 아쉽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있어야 저런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거라면 제 아쉬움이 조금은 위안이 됐다.
“대신 지호 씨가 출연한다면 좋은 배우들이 많이 관심 가질 테니까…… 민우 선배께 전해둘게요. 제일 잘 어울리는 여배우로 캐스팅해달라고.”
“……그래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제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했지만 그래도 괜찮지 싶었다. 지호가 테이블에 놓인 <23센티미터> 시나리오를 쥐었다.
“그럼 일어날까요?”
혜윤이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자 그가 그녀의 작은 몸짓을 지켜보았다.
느릿한 걸음마다 온온하게 내려앉는 눈빛, 부드럽게 올라붙은 입꼬리. 혜윤은 그가 자신을 아이처럼 귀여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마주 앉아 있을 땐 거리라도 있었지. 지금은 조금만 뒷걸음질 치면 지호의 한쪽 가슴에 등이 닿을 수 있겠다 싶어, 볼에 열감이 확 올랐다.
더군다나 대체 무슨 향수를 쓰는지 코끝엔 시원함이 감도는데, 느낌은 참 포근하고 따뜻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마치 꿈결 같지 않을까.
“……맞다!”
“음?”
그러다 문득 혜윤이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사실 대화가 끝날 무렵부터 머릿속엔 ‘선물’이라는 단어가 뱅글뱅글 돌아다니고 있었다.
허점투성이인 제 글이 좋다고 출연을 희망한 대한민국의 톱배우. 그의 손에 쥐어진 예쁨 받은 흔적이 가득한 시나리오. 주고받은 말속에 찐득하게 배어 있던 <23센티미터>에 대한 고심.
‘이렇게 고마울 줄 알았으면 뭐라도 준비해 오는 건데…….’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선물에 기분 좋게 고개를 들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까지만 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지호가 그녀의 목덜미로 상체를 푹 숙였기 때문에. 너무 순식간이었다.
“향수 쓰는 거예요? 되게 좋다…….”
“아…….”
대체 누가 할 소리를.
태연하게 고개를 들며 혼잣말을 하는 지호가 여전히 등 뒤에 서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꼭 깨물었다. 잠시 숨을 고른 혜윤이 뒤돌아 손을 뻗는다.
“저기 이거…….”
작은 주먹으로 꼭 쥐고 있었기에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호는 일단 손바닥을 내밀었다. 웅얼거리는 말끝에 뿌듯함이 보여서 많이 귀엽기도 했고.
‘……이게 뭘까.’
지호는 혜윤이 손바닥에 올려준 뿌듯함을 몇 초 동안 쳐다봤다. 알록달록 손톱만 한 곰돌이 여러 마리.
정말 자기처럼 생긴 것들만 가지고 다니는구나.
“고마워서 뭐라도 드리고 싶은데…… 지금 가진 게 젤리밖에 없어서.”
“아…… 감사합니다.”
“100원밖에 안 하지만 그래도 하나씩 먹으면 7번은 행복할 수 있어요.”
“큭큭. 네.”
아쉬움이 방울방울 맺힌 목소리에, 애쓸 틈도 없이 웃음이 새어나갔다. 특히나 ‘아까 하나 먹지 말 걸.’ 같은 혼잣말은 숨소리처럼 작았음에도 기억에 오래 머물겠지 싶었다. 진심으로 하나를 더 주지 못해 속상해하는 저 얼굴 또한.
‘나보다 2살이 많다고 들었는데 잘못 들었나?’
그녀의 외모와 행동을 봤을 때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두 사람은 더 작은 공간으로 함께 들어갔다. 지호는 곰돌이 젤리와 그녀의 옆얼굴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작은 여자가 더 작은 걸 건넸을 뿐인데 그런 것 치고는 송두리째 흔들려버렸으니. 답은 하나였다.
이 시간이 여기서 끝나게 놔둘 수 없다는 것.
“그럼 받기만 할 순 없으니까.”
“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지호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장 뒤돌아 혜윤을 마주 바라봤다.
“저녁 살게요. 먹고 가요.”
웃음을 살짝 거둔 그는 ‘꼭이요.’라는 말을 덧붙이려다 참았다.
***
“이런 곳 너무 무드 없나? 여자들이 안 좋아할 것 같긴 한데.”
“아니요. 정말 좋아요! 내공 있는 맛집 분위기.”
혜윤은 허름한 노포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긴 팔로 여유롭게 고기를 굽는 지호를 봤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을 때만 해도 그와는 많이 동떨어진 곳이라 여겼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화면 속에서 작정하고 꾸민 모습은 조각처럼 멋있었지만, 지금은 딱 보통의 20대 남자처럼 청량했다. 물론 아무리 안 꾸몄다 한들 저 외모 앞에 ‘보통’이란 단어를 붙일 수는 없겠지만.
그러니까 보통이 아닌, 이 어마어마한 남자와 함께 밥을 먹게 되었구나. 맙소사.
“이것도 같이 먹어봐. 내가 직접 담근 건데.”
“이게 뭐예요?”
“복분자주. 달달하니 아주 맛있게 됐어.”
주인 할머니가 테이블 위로 검붉은 병 하나를 내려놓았다. 지호가 종종 이곳에 왔었고 주인 할머니도 그를 특히나 예뻐한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벽지처럼 온 벽에 발라둔 연예인들의 사인과는 달리 지호의 사인만 계산대 쪽에 자랑스럽게 놓아둔 모습이 그랬고, 그저 그의 지인이라는 이유로 자신까지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것도 그랬다.
‘으아, 나 좀 봐. 안 지 몇 시간 됐다고 지인이래…….’
아무도 모를 혼자만의 생각일 뿐인데도 혜윤은 괜히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더워요? 내 쪽은 시원한데.”
“아, 아니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거예요. 진짜 그냥.”
“응? 색시는 그럼 이거 마시면 안 되겠다. 술 마시면 더 열 오를 텐데.”
지호의 말에 대꾸하기 무섭게 주인 할머니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혜윤을 바라봤다.
“아니에요. 맛있게 잘 마실게요.”
“색시 술은 마실 줄 알고?”
“……저한테 물어보시는 거?”
분명 잘 마시겠다고 대답한 건 혜윤인데 주인 할머니는 희한하게도 지호를 바라보며 그녀를 걱정했다. 둘이 지인 이상의 사이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그걸 눈치 못 챌 만큼 두 사람이 마냥 어리숙한 편도 아니었다.
“글쎄요. 아직 같이 술은 안 마셔봐서. 오늘 보겠네요.”
“그려? 아이고 좋을 때야. 정말 둘이 너무 고와.”
지호가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혜윤을 향해 웃었다. 탁 트인 전망이 보이는 자리를 제게 양보해 줬지만, 사실 혜윤의 눈에 야경은 들어오지 않았다.
가을, 밤, 바람, 그리고 이 남자. 이토록 모든 게 완벽한 장면은 그녀가 쓴 동화 속에서도 나온 적 없는 것이었다.
혜윤은 또 한 번 손부채질을 하려다 제 행동의 이유를 지호가 알아챌 것 같아, 뺨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열꽃을 고스란히 참아냈다.
“여기는 야경도 잘 보이지만 알지? 구석져서 소란만 안 피우면 다들 온 줄도 모를겨. 재미나게 데이트하고 가. 술도 더 있으니까 부족하면 말하고.”
“네. 감사합니다.”
“색시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참 좋아. 자주들 와. 알았지?”
주인 할머니는 두 사람의 어깨를 번갈아 가며 두드리고는 자리를 옮겼다. 할머니의 말에서 수정해야 할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는 받아내기만 했다. 데이트 같은 단어가 특히 그랬다.
“걱정하지 말고 밥만 먹어요. 술은 안 마셔도 되니까.”
잘 구워진 고기 몇 점을 혜윤의 접시에 놓아주며 그가 술병을 테이블 끝으로 치웠다.
그 매너에 보답하듯 그녀는 곧장 고기를 예쁘게 오물거렸다. 맛있는 음식과 잔잔한 밤공기에 ‘오늘 처음 본 사이’가 주는 긴장감이 느슨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에이, 절대 그럴 순 없죠. 직접 담그신 귀한 술을.”
“술은 마실 줄 알고요?”
“그럼요! 잘 마시고 주사도 없어요. 취할 것 같으면 딱 멈출 줄 알고.”
“오, 의외네.”
뭐가 재미있는지 지호는 연신 웃으며 잔에 술을 따랐다. 이제 술마저 들어가면 모든 긴장감이 풀릴 것 같아, 혜윤은 어서 저 붉은 복분자주를 들이켜고 싶었다.
***
“아…… 뭐가 이래. 벌써 없다니!”
깨끗하게 비워진 술병 3병을 보며 혜윤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복분자주는 갓 짜낸 주스처럼 시원하고 상큼하기까지 했다. 달콤함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그 얼굴을 지호가 턱을 괸 채 다정한 눈으로 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가며 정말 다 비워진 게 맞는지 한 병 한 병 유심히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눈꺼풀이 두 시간 전보다 한참은 무거워 보였다.
“작가님.”
“네.”
“어디 가서 술 잘 마신다는 말 하지 마요.”
“네.”
“그냥 어디 가서 술 마시지 마요. 괜한 놈들이랑은.”
“네.”
열심히 끄덕이는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조금 더 진하게 바라보는 걸로 대신했다.
달다며 속도를 낼 때부터 알아봤다. 원래 이런 술이 제일 위험한 건데. 취하는 줄도 모르고 웃으면서 나가떨어지니까. 반병도 안 마신 것 같은데 저렇게 느슨해질 줄이야.
“그냥…… 어디 가지 마요.”
“……네에.”
“하아…….”
기분이 좋은지 혜윤이 히죽거리며 대답하자 지호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이었지만 다른 술자리에서도 이럴 거라는 생각에 속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