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주고받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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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고받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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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고받은 비밀
2022.06.12.
휘- 휘-
혜윤이 빈 술병 입구에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려 입바람을 불었다. 잘 마시고, 주사도 없고, 취할 것 같으면 딱 멈출 줄 안다더니. 이렇게 철저한 거짓말은 또 처음이라 지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에요. 오해예요, 그건.”
“……음?”
그러다 퍼뜩, 불던 입바람을 멈추고 그녀가 생뚱맞은 말을 뱉었다. 느리게 끔벅이는 눈엔 여전히 호기심이 비쳤다.
“지금 저 여자 술 못 마신다고 생각했잖아요. 맞췄죠?”
“큭큭.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실은요. 사람 눈을 이렇게…… 이렇게 보면, 대충 그 사람 속마음을 알 수 있거든요.”
별안간 혜윤이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세우고 작은 턱과 말랑한 볼을 두 손바닥으로 받쳤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지호와 같은 눈높이에서 그를 빤히 바라봤다.
둘이 얼추 비슷한 포즈였지만 손 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라기엔 그 분위기의 간극이 너무 컸다.
지호는 긴 눈매 끝에 낭만을 담아 혜윤을 보았다. 유독 촉촉한 그녀의 눈엔 장난이 서려 있다. 그 눈이 예뻤다. 더군다나 아이 같은 눈으로 조금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그 씩씩함이 예뻤다.
그래서 의자를 조금 더 당겨 앉았다. 깜찍한 주장에 호응도 할 겸.
“아, 그래요?”
바짝 당겨 앉은 의자 덕에 둘의 시선이 두 뼘 정도로 훅 가까워졌다. 혜윤은 흠칫 놀랐지만 취기 때문인지 몸이 날쌔게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 실은 몸을 뒤로 무르기 싫었다. 이 그림 같은 남자와 마주 보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
지호가 드라마에 출연해 준다고 한들, 자신과 만날 일이 또 뭐가 있다고.
“그럼 또 말해봐요. 내가 무슨 생각 하는 것 같은지.”
보고 싶을 것 같은 남자가, 온 우주에 단둘이 있는 것처럼 저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술에 취한 건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했는데 저 눈빛까지 더해지니 이젠 정말 아득해진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내가 귀엽다고 생각했죠?”
쭉 궁금했던 질문을 해놓고는 혜윤은 조금씩 이성의 끈을 놓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녀를 아는지 최대한 외우기 쉽게 대답해 주려는 매너가 그에겐 있다.
“네.”
그리고 온전한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을, 다음날의 그녀를 위한 응원도 잊지 않았다.
“지금 내 대답까지는 내일 꼭 기억해내요. 잘못 들었겠지, 하면서 헤매지 말고.”
“…….”
“그런 거 안 해도 충분히 귀여우니까.”
밤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좀 더 낮았고 울림이 깊었다. 술 때문일까. 어쩐지 마음이 일렁였다.
“아까처럼 잘하던 거 해야죠? 대답.”
“……네.”
“착하네.”
괜히 목이 메어 혜윤은 겨우 대답했다. 제 모습이 고스란히 지호의 휘어진 눈가에 담겨 거울처럼 비쳤다. 밤바람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시원하게 훑고, 나른한 기분에 몸이 흔들. 마음도 따라 흔들. 흔들. 흔들.
‘그래, 적어도 이 장면 하나는 꼭 잊지 말자…….’
탁-
그리고 그녀의 완벽히 끊긴 이성을 알려주듯 옆자리에 놓아둔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방 안에 있던 책, 노트, 파우치 따위가 바닥에 촤락 펼쳐졌다.
“앉아 있어요.”
“에이, 취한 사람 취급하…… 으앗!”
쾅! 쨍그랑!
혜윤이 괜한 고집을 피우며 몸을 일으키다 순식간에 휘청이며 넘어졌다. 테이블에 세게 부딪힌 탓에 그 위에 올려진 술잔과 병, 접시들까지 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병이 깨지지도 않았고 휴대용 버너는 오래전에 치웠기에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요란한 소리에 수십 개의 눈들이 이쪽을 향했지만 지호의 눈엔 다른 건 들어오지 않았다.
“괜찮아요?!”
“흐음, 괜찮아요.”
정작 당사자는 덤덤하건만 지호는 튕겨 나가듯 재빠르게 그녀의 곁으로 갔다. 이보다 빠를 순 없었음에도 속으로는 더 말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하지만 소란스럽게 굴지는 않았다. 상대가 더 놀랄까 봐.
툭툭. 툭툭. 작은 손바닥을 손뼉 치며 터는데 팔목에도 불긋불긋 핏기가 보였다. 혜윤은 오늘 처음으로 지호의 미간이 구겨진 걸 볼 수 있었다. 화를 삭이는 것 같았다.
“아이고! 색시 괜찮아? 바닥에 있지 말고 둘 다 얼른 의자에 앉아. 빨리 치워줄 테니까.”
주인 할머니가 서둘러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접시들을 치웠고, 주위의 계속되는 관심을 유하게 환기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하나둘 시선들이 거두어진다.
지호는 혜윤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바닥에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바지에 묻은 먼지들을 살살 털어주었다. 청바지가 살짝 찢어져 있고 천에 붉은 기가 배인 걸 보니 무릎도 다친 것 같았다.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아, 왜 더 빨리 잡아주지 못했을까.
“……화내지 말아요.”
그리고 마음을 읽을 줄 안다는 여자는, 사실 마음을 어루만져줄 줄 알았다.
“화 안 내요.”
“에이, 거짓말…… 알잖아요, 나는 못 속이는 거. 흐흐.”
한숨도 나오고 저 애교 섞인 말장난에 웃음도 나오고.
“약국에 다녀올 테니까 잠깐 여기 있을래요?”
“아니요. 그냥 조금 더 있다가 일어날래요. 약은 집에도 잔뜩 있어요.”
바닥에 앉아 올려다본 혜윤의 눈빛이 형형했다. 지호는 제 옆에 여전히 엉망으로 흐트러진 가방과 짐을 챙겼다. 파우치와 노트와 펜과 동화책.
선인장과 아기 동물들이 그려진, 동화책.
“동화책을 읽어요?”
“아, 그거는 읽은 거 아니고…… 쓴 거.”
“쓴 거?”
되묻는 목소리와 눈길 속에 가득 들어찬 다정함. 혜윤은 잠시 그의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깊은 눈이 헤아리려는 게 제 마음이라는 확신이 든 순간, 한 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네. ……내가 쓴 거.”
또 넘어질까, 지호는 아예 혜윤의 옆자리에 앉았다. 혜윤이 앉은 쪽은 가게 외벽만 보이는 제 자리와는 다르게 탁 트여 전망이 좋았다. 잘 챙겨둔 가방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동화책을 손에 쥐었다.
<선인장과 친구들/글, 장윤>이 적힌 알록달록한 표지를 뭉근한 눈으로 보다가 긴 손가락으로 찬찬히 넘겨본다.
큰 글씨에 그리 길지 않은 글은 따뜻하고 친절했다. 책 속에 그려진 아기 종달새를 보다가, 옆에 앉은 여자를 보다가. 한 장 넘겨 아기 토끼를 보다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를 보다가.
눈에 보이는 거라곤 온통 귀여운 것들뿐이었다.
“……어때요?”
“좋은데요.”
“진짜 솔직하게. 상처 안 받아요.”
“이상하다. 내가 못 속이는 여자 아니었나?”
“그렇죠, 참.”
혜윤은 지호의 대답에 정말 환하게도 웃었다. 오히려 짧은 칭찬을 건넨 지호가 미안해질 정도로.
“하아…… 이런 기분이구나.”
따뜻한 숨을 길게 내쉰 그녀가 작은 두 손을 가슴 언저리 위로 포갠다.
“뭐가요?”
“내가 쓴 책이라고 말하는 기분이요.”
“아……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는 아니고. 가족들이랑, 가족 같은 친구들 두 명만 알아요.”
굽이치는 마음은 두 손으로 아무리 누르려 해도 쉽게 고요해지지 않았다. 술김에 내뱉은 최악의 실수였지만 상황 파악이 될 리 없었다.
혜윤은 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지호를 봤다. 여유롭게 꼬아둔 긴 다리 위에, 이제 곧 출간을 앞둔 자신의 열한 번째 동화책이 펼쳐져 있다.
입을 열면 슬쩍 내린 눈동자로 그녀에게 집중해 주었고, 제 입이 멈추면 다시 동화책을 관심 있게 들여다봐 주었다.
술은 훨씬 더 마신 것 같은데 지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자신만 몸이 흐물거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나까지 알아버렸네요.”
“응…… 그렇지만 지호 씨는 비밀 지켜줄 거잖아요.”
“……과연.”
“우와아아! 다 소문내고 다닐 거예요?”
“소문 안 낼 테니까 얼른 기대요. 또 넘어지면 안 일으켜 줄 거니까.”
지호는 긴 팔로 혜윤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곧장 그의 큰 손바닥이 가녀린 목선을 타고 올라 작은 머리를 제 쪽으로 포옥 눌렀다. 어깨 끝에 진한 온기가 퍼지고 나서야 겨우 손을 뗐다. 손끝에 아쉬움이 남아 저릿했다.
“지호 씨…… 지호 씨도…… 다른 사람한테 말 못 한 이야기 같은 거 있으면…….”
그런 마음을 전혀 모르는 이 여자는 이제 서서히 오늘을 지워가는 듯했지만.
“알았어요. 이제 집 주소 알려줘요. 데려다줄게요.”
“아니이…… 지호 씨는 몰라요. 나도 지금…… 알았잖아요. 생각보다 훠얼씬 좋아요…… 마음에 가둬둔 말을 내뱉는…… 기분…….”
“서로 비밀 하나씩 주고받자는 거예요? 나만 당할 수는 없다, 뭐 이런?”
“큭큭. 맞아요…… 안 그럼 집 주소 말 안 할 거예요…….”
어깨에 기대 느리게 종알거리는 혜윤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서 지호는 한참 동안 혜윤을 내려다봤다. 몰려오는 잠과 싸우느라 눈썹이 쉴 틈 없이 찡그려지고 부드럽게 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그냥 버리고 가면 어쩌려고.”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순간 저도 모르게 왼손이 그녀의 분홍빛 뺨 쪽으로 가려다 겨우 멈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붉은 입술을 조금 더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바라보면 안 될 것 같아서.
“빨리요…… 빨리.”
밤공기에 온몸이 휘감긴 채 바라보는 야경은 집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지금 옆에서 아이처럼 칭얼대는 여자는 마음을 간지럽힌다. 오래 묵혀둔 이야기를 꺼내게 할 만큼.
“……12살 때까지 아버지랑 살았어요. 단둘이.”
“아…….”
“어부셨으니까 한번 나가면 며칠은 못 오셨죠. 그러다 돌아오는 날엔 상처가 잔뜩인 오징어나, 깨진 조개 같은 걸 가져오셨어요. ……다리가 없는 꽃게라던가.”
“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죠?”
혜윤은 가까스로 얇게 눈을 떴다. 고개를 들고 더 가까이 그를 보고 싶었지만 몸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았다. 어렴풋이 올려다본 지호는 먼 야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웃는 것 같은데 쓸쓸해 보였고. 그 모습도 이젠 희미해진다.
“돈도 없었고 엄마도 없었고. 그런데 행복했어요. 아버지가 많이 사랑해 줬으니까…… 나도 그랬고.”
“나…… 진짜…… 더 듣고 싶은…….”
결국 혜윤은 잠이 들었다. 스르르 힘이 빠져나가는 그녀의 몸을 지호가 눈치챈 듯 세게 감쌌다. 품에서 잠든 혜윤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따스했다.
“걱정 마요. 그 뒷이야기는 더 듣고 싶을 만큼…… 아름답지만은 않아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에 꽂아주며 지호는 잠든 혜윤을 안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