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마음을 보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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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음을 보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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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음을 보이는 일
2022.06.15.
“으으, 머리야.”
깨질듯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혜윤이 잠에서 깼다. 뿌연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자 숙취보다 더 머릿속을 괴롭히는 건 눈앞에 보이는 낯선 공간이었다.
‘뭐야…… 여기가 어디야?’
거실만큼 넓은 방이었다. 흰 대리석 바닥과 벽. 정면엔 벽 한가득 큰 TV가 걸려 있었고 그 옆에 기하학적으로 생긴 유리 테이블과 디퓨저. 보이는 건 그게 전부다.
바스락-
“세상에, 이게 무슨…….”
그제야 몸을 일으킨 그녀가 제 몸을 감싼 이불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이불의 촉감이 살갗에 닿은 듯 생생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바닥에 잔뜩 구겨진 채 던져진 베이지색 옥스퍼드 셔츠. 그리고 이불 속에 속옷만 입고 있는 맨몸.
‘장혜윤, 너 진짜 미쳤구나.’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됐지만 일단 옷부터 입어야 했다. 누군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고, 문밖에선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것 같아 혜윤은 이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서둘러 엉망인 셔츠를 낚아채려 했을 때, 손목 여기저기와 무릎에 붙여진 습윤밴드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침대 밑에 가지런히 접힌 청바지와 낯선 흰 티셔츠.
그 위에 짧은 메모도.
[일어나면 입고 나와요. 샤워실은 TV 옆 방에 있어요.]
재빠르던 행동이 멈춰졌다. 어쩐지 그 메모가 ‘불안해하지 말아요.’처럼 보여서. 그래서 혜윤은 이 상황에 어이없게도 느긋하게 방을 나섰다.
어제 입었던 청바지는 새 옷처럼 깨끗했고, 그 위에 올려진 흰 티셔츠는 많이 크고 포근했다.
‘그래. 어제 밥을 먹다가 술을 마셨고…….’
방문을 열고 나오자 넓은 침실과 어울리는 실내 복도가 쭉 뻗어 있다. 긴 복도를 따라 닫힌 방문과 그림들이 번갈아 가며 자리하길 여러 번. 복도 저 끝엔 햇살을 튕겨낸 바닥이 눈부신 걸 보니 거실인 듯했다.
눈은 집 여기저기를 훑기 바쁘고, 머릿속은 어제 지호와의 마지막 기억을 쥐어짜기 바쁘고. 그 와중에 걸을수록 선명해지는 음악 소리, 맛있는 냄새.
“우와…….”
거실에 다다른 혜윤이 걸음을 멈췄다.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한강이 황홀했다. 맑은 하늘 밑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강물.
제 몸을 감싼 낯선 바디워시 향은 아늑했고 큰 티셔츠는 살결처럼 부드럽다. 고층이라 그런지 더더욱 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거 꿈 아닐까?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눈을 뜬 순간부터 현실감이 있는 거라곤 한 개도 없었다.
“잘 잤어요?”
그리고 그중에 제일인 이 남자의 목소리.
“내 옷 중에 제일 작은 건데도 크네.”
“……지호 씨?”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돌아보니 편안한 옷차림의 지호가 다이닝룸에 서 있었다. 혜윤은 지금이 살면서 제일 놀란 순간이라 생각했다. 첫째로는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놀라웠다. 대한민국 최고 남자 배우의 집에서 눈을 뜬 아침.
그리고 둘째로는.
“아…… 이거 왜 다쳤는지는 기억나요?”
넓은 보폭으로 훅 다가와, 상처 난 손을 조심히 잡는 그 남자의 외모였다. 사실 이 이유가 제일 컸다. 어제저녁 내내 본 얼굴임에도 그랬다. 그 경이롭던 외모가 사실 모자에 가려진 반쪽짜리였다니.
“…….”
“아파서 그래요?”
놀라서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입을 닫고 있기엔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이 너무 간절했다.
“넘어졌던 것 같은데…….”
“네. 제 실수로 다쳤어요. ……미안해요.”
조각난 기억들이 뒤섞여 모든 게 불분명해도, 스스로 넘어져서 다쳤던 건 너무나 명확하게 기억난다. 그런데도 사과를 하는 저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혜윤은 그를 올려봤다. 다정한 눈을 바라봤다. 그 눈 속에 조금은 멍한 제 모습도 보이고.
“궁금한 건 밥 먹으면서 얘기해요.”
그런 그녀를 다 안다는 듯, 손을 이끌어 식탁 의자에 앉혀주는 지호에게서 자신과 같은 향이 났다.
***
“그렇게 직접 벗을 줄 알았으면 조금 기다려 볼걸.”
“하아…….”
혜윤은 고개를 숙인 채 양 손바닥으로 붉어지는 뺨을 눌렀다. 멍과 상처 때문에 옷을 벗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반쪽짜리 정답이었다.
도통 바지가 무릎 위까진 올라가지 않아 이불을 덮인 채로 벗긴 뒤 약을 발라준 건 맞지만, 셔츠는 스스로 벗은 거라고 했다. 그가 방에서 나간 뒤에 갑갑함에 벗은 것 같은데, 그래서 셔츠는 세탁을 못 해 놓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기요. 지호 씨…….”
“네.”
혜윤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계란국만 휘휘 저었다. 그릇 안에서 정신없이 흐트러지는 모양이 꼭 지금 제 마음 같았다. 주눅든 목소리가 끝을 모르고 작아진다.
“……저 좀 그만 쳐다보면 안 될까요. 그렇게 안 봐도 엄청 민망하니까요.”
지호의 낮은 웃음소리가 집안에 흐르는 음악과 잘 어우러졌다. 그녀가 입은 것과 비슷한 흰 티셔츠는 그의 깨끗한 피부를 더욱더 돋보이게 했다.
팔짱을 낀 두 팔 밑으로, 단단한 가슴근육이 얇은 티셔츠를 뚫고 굵은 곡선을 그렸다.
“그런데 그걸 다 믿어요?”
“뭘요?”
“지금 내가 한 말. 상처 때문에 벗긴 거지,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말.”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능청스레 말했다.
“지호 씨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그런 사람? 어떤?”
혜윤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장난이 그득한 말투고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음에도 이상하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건 어제부터 쭉 느꼈던 것이다. 그의 말은 그런 힘이 있었다.
특히 저 긴 눈매까지 더해지면 입이 스르르 열리는 기분이었다. 암흑 같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듯이.
“무슨 뜻인지…… 다 알잖아요.”
더 직접적으로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오히려 제 얼굴이 익어버릴 것 같아 돌려 대답했다.
“작가님, 그렇게 사람 잘 믿지 마요. 다른 데서도 이럴 거라고 생각하니까 조금…….”
“…….”
뜸 들이며 대답을 준비하는 그 몇 초 사이에 그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온도가 극명하게 달라졌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조금 화가 나네.”
자신의 상상력을 확신하며 연기하는 배우답게 순간적으로 지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말만 조금이었지, 눈빛과 표정은 지옥을 떠올리게 했다.
“음, 지호 씨.”
그리고 그 말의 의도를 파악한 혜윤은 살짝 미소 지었다. 냉기가 폴폴 날 것 같은 눈빛의 의미가 또렷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다칠까 봐 걱정돼요.’라고.
물론 상대방은 몇 수 위였다. ‘그러니까 내 옆에만 있어요.’라는 것까진 못 읽게끔 교묘히 숨겨놓았으니.
“저 그렇게 사람 잘 안 믿어요. 제 감을 믿는 거예요. 제 느낌에 지호 씨는 분명 좋은 사람이에요.”
“그 감도 앞으로는 너무 믿지 마요.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니까.”
“아…….”
표정과 말투는 저리 나긋하면서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니. 제 앞에 놓인 음식을 가리키는 그의 턱짓에 혜윤은 조용히 밥을 오물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등지고 지호는 정수기 쪽으로 걸어갔다.
컵을 받치고 온수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잠시 허공에서 멈칫.
‘제 느낌에 지호 씨는 분명 좋은 사람이에요.’
조금 전 혜윤의 말에, 어젯밤 자신의 행동이 떠올라 자조적인 헛웃음이 나왔다. 어떤 좋은 놈이 술 취한 친구 데리러 올까 봐 걱정한다고.
‘많이 취했나요? 지금 당장 가기 힘든데 어떡하지…….’
‘오늘은 제집에서 재우겠습니다.’
‘네?!’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생각난다. 되묻는 말투에 황당함이 가득했는데 충분히 이해가 갔다.
스스로도 낯설고 황당했으니까. 통화가 길어지면 혜윤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깨어나면 전해 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글쎄, 뭘 전해줘야 할까. 잠든 모습이 예뻐서 참고 참다가 머리를 두어 번쯤 쓰다듬어 준 것? 그래서 까닥하면 그런 놈 아닌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한 놈이 될 뻔했다는 것?
전해 줄 수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혜윤의 감과는 동떨어진 것들뿐이었다. 지호는 고개를 내둘렀다.
“혹시요…….”
엉큼한 마음은 이쪽에서 품었건만 오히려 눈치는 저쪽에서 보고 있으니. 지호가 따뜻한 물을 혜윤에게 건네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제가 뭐 더 실수한 건…… 없죠?”
“……네. 없어요.”
나름 무던하게 대답해 줬건만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있네…… 실수한 거 있네.”
“응?”
“지금 그 눈빛이요. 숨겨주려는 눈빛이잖아요.”
“아, 이럴 땐 진짜 감이 좋구나.”
“하아…….”
“큭큭. 장난이고. 진짜 대화 조금 더 한 게 전부예요.”
기죽은 강아지의 표정으로 쥐었던 수저를 내려놓는 모습에 지호는 피식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안 지 하루밖에 안 된 이 여자는, 내가 나를 미워할 틈을 주지 않았다.
“별거 없어요. 원래는 동화 작가라고 말한 거랑.”
“네?!”
“새 책 이야기 조금.”
“서, 설마요. 지금 다,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시는 것 같아요.”
“<선인장과 친구들>이 다음 달 출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깊이가 가늠도 안 되는 짙은 눈동자가 혜윤의 얼굴을 세세히도 살폈다. 지뢰를 밟은 사람처럼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이었다.
역시 표정 하나하나에 감정이 확확 비춰서, 그게 너무나 제 취향이라. 굳이 안 보태도 될 말까지 얹게 된다.
“이걸 아는 사람이 몇 안 되니까 비밀이라고. 뭐, 그게 전부예요.”
그게 진짜로 혜윤에게는 전부였다. 평생 밝히고 싶지 않은 전부.
지호는 조금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노래 부르듯 덜덜 떨리던 목소리도 뚝 끊겼고, 갈색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져가는 것 같아서.
저 작은 머리로 자신의 우주가 멸망하는 상상을 하는 것 같아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별거 없어요.”
“……네?”
“비밀을 지켜주는 것과 작가님이 저 말을 하면서 엄청 행복해했다는 걸 알려주는 것. 나도 뭐, 이게 전부예요.”
지호는 혜윤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마음을 읽는다는 여자를 위해 잠시 두꺼운 장벽을 거둬 주었다. 이쪽은 읽는 법만큼 읽히지 않는 법도 잘 아는지라. 사실 티끌 하나 없이 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건 지호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혜윤도 그 눈을 피하지 않고 꾸욱 누르듯 바라보았다.
삐. 삐. 삐. 삐. 철커덕-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번호를 누르는 소리부터 다급함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