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D-1 (7/110)


7. D-1
2022.06.22.



“자, 친구야. 잘 들어봐.”

“응.”

 
지호와 거짓 연애를 시작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한국인들의, 아니 온 지구인들의 태풍 같은 관심도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 이제 남은 건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를 정리하는 일이다.


“드라마 때문에 안지호를 만났다가 장혜윤이 술을 먹고 뻗었다. 그래서 안지호가 하는 수 없이 자기 집에서 장혜윤을 하루 재워주었다?”

“그렇지.”

 
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 안 가득 시원한 유자차를 머금었다. 민주가 그런 그녀를 찬찬히 흘겼다. 이미 전화로 모든 상황을 보고 받았으면서도 얼굴을 마주하니 다시금 궁금한 것들이 쏟아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이것부터 말이 안 되잖아.”

“뭐가 말이 안 돼?”

“소주 1병은 거뜬한 장혜윤이 술을 먹고 뻗은 것.”

“하아…… 내 말이. 나 완전 거짓말쟁이 됐어. 술 세다고 자랑하다가 기절했으니 얼마나 우스운 사람으로 생각했을까?”

 
혜윤은 두 손바닥에 보송보송한 얼굴을 폭 묻었다. 양 뺨을 손으로 문지른다 한들 그날의 민망함이 지워질 리 만무하다. 술이 약한 편이 아님에도 달콤한 복분자주에 정신을 놓았다는 게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이쯤 되니 그날 술이 아닌 지호에게 취한 건 아닐까 싶었지만, 당연히 민주에게 말할 수는 없다. 절대로.


“그리고 하는 수 없었던 게…… 진짜 맞겠지?”

“응? 무슨 말이야?”

 
민주의 미간이 어렴풋한 기억에 쪼글쪼글 구겨졌다.


‘많이 취했나요? 지금 당장 가기 힘든데 어떡하지…….’


‘오늘은 제집에서 재우겠습니다.’


‘네?!’

 
그날, 혜윤의 핸드폰 너머로 들린 낯선 남자의 목소리. 그녀를 제집에서 재우겠다는 말에 잠시 당황했지만.


‘재울 만한 방이 충분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

 
당황의 싹을 단숨에 뽑아주었기에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만 안도한 것 같진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에서도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통화의 끝에 더해진 그의 말이 떠오른다. 깨어나면 아침을 먹여서 보내겠다던. 정말 그럴 수 있게 돼서 안도한 건가 싶었다. 그게 안도의 이유라면, 민주는 ‘하는 수 없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면 모를까.


“너 몰라? 내가 그날 1시쯤 전화했었어. 지금 보니까 그 목소리가 안지호였네. 어쩐지…… 감미롭더라. 그 말이 마치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달까.”

 
탐정처럼 매섭게 추리하던 민주의 눈가에 슬며시 아련함이 감돌았다.


“아무튼. 재우는 것도 그렇지만, 아침을 먹여서 보내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런 말은 안 해?”

“응…….”

“뭐야.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네. 왜 말 안 했을까?”

“에이…… 별거 아니니까 그랬나 보지.”

 
혜윤은 빨대로 애꿎은 얼음들만 괴롭혔다. 뒤늦게 전해 들은 그날의 이야기들은 조금 부끄럽고, 조금 더 따뜻했다.


“아무튼 아무튼. 그래서 하룻밤을 재워줬는데 파파라치가 그 모든 걸 찍었다. 안지호는 말할 것도 없고, 동화책 사진까지 찍혀서 장혜윤도 난처해졌다. 그래서…… 사진을 공개 안 하는 조건으로 열애를 인정해버리자?”

“그렇지.”

“근데 왜 네가 드라마에 출연해? 가뜩이나 필명 공개되는 것도 오들오들 떠는 애가.”

“지호 씨가 그걸 원했거든.”

“……왜?”

 
매서운 민주의 눈빛이 혜윤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그러게.”

 
혜윤은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민주가 단 20분 만에 파악한 핵심적인 의문을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날 지호에게 취한 게 확실한 것 같았다. 모든 게 다 이상했는데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걸 보면.


“그럼 안지호는 이 드라마 왜 하는 거야? 출연료도 거의 없고, 대작도 아니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시나리오가 좋았다고 하긴 했는데…….”

“아무렴 난다 긴다 하는 작가들 것도 다 받았을 텐데 그중에 제일 좋았다고? 기사 보니까 안지호 해외 러브콜도 장난 아니라던데. 그럼 전 세계에서 온 시나리오 중에 신인 작가 데뷔작이 제일 좋았다고?”

“……그러게.”

 

 
빨대로만 괴롭히는 거로는 부족했는지 혜윤은 컵에 든 얼음을 입에 물었다. 볼록 튀어나온 뺨이 들쑥날쑥 움직였다. 아무리 씹어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얼한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뭐, 이런 거야 전화로 물어보면 금방 해결되는 거니까 상관은 없지. 연락처를 모르는 건 아닐 거잖아. 그래도 전략적 연애 관계인데.”

“……그러게.”

 
와작와작.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꼭 제 마음이 깨져 나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오늘은 ‘그러게’만 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그러게.”

“멍청한 놈. 그럼 그날 이후로 둘이 한 번도 연락을 안 했단 거?”

 
민주가 혀를 끌끌 차며 컵에 꽂힌 빨대를 빼고 잔을 들이켰다.


[작가님, 지호 매니저 마봉기입니다. 앞으로 연락할 일 있으면 이쪽으로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후 8:43)]

 
혜윤은 지호의 집을 나섰던 날을 떠올렸다.

봉기의 배려도 고사하고 혼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내일을 준비했던 날. 내일이면 문밖의 세상이 달라질 걸 훤히 아는지라 도통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던 날. 그날 늦은 오후에 온 메시지였다.

그 간결한 문장에는 감사의 마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일종의 협조 요청이랄까. 다른 일을 더 만들지 말고 꼭 나를 통해서 연락하라는 은근한 압박까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지호 씨 매니저님이 네 번호를 묻더라고? 알려주긴 했는데. 매니저랑 배우가 안 친한가? 나한테 묻길래 조금 재밌었달까.’

 
그리고 며칠 전, 민우와의 통화에서 봉기가 어떻게 자신의 번호를 알아냈는지 알 수 있었다. 재밌지 않냐며 혜윤의 반응을 기다리는 민우에게 ‘지호 씨도 제 번호를 모르니까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제 온 세상이 안지호와 장혜윤을 연인으로 아는 마당에, 여자친구 전화번호를 모르는 남자친구는 우스우니까.


“대본리딩은 혼자 가?”

“우준이랑. 아기도 아니고 혼자 가도 괜찮은데…….”

“오올, 김우준 이럴 땐 쓸모가 있군.”

 
민주는 자신의 카페인 양 빈 컵을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멀리서 세게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처럼, 혜윤은 어딘가에 이 애매한 답답함을 쏟아내고 싶었다.

혜윤과 민주, 우준은 유치원 때부터 친한 친구들이다. 언제, 어떻게 친해졌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된 사이. 가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장윤이란 필명을 아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23센티미터>는 수정 없이 그대로 가는 거야?”

 
민주가 허벅지에 손을 쓱쓱 문질러 물기를 닦았다. 혜윤은 그녀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민주는 처음부터 <23센티미터>의 결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에. 아쉽지만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말은 단순하다. 종수는 좋아했지만 표현하지 못했고, 희수는 눈치챘지만 서울로 떠난다. 그러니 종수에게 희수는 영원히 사촌 누나로 남게 될 것이다.

비록 다시는 못 본다고 하여도.

민주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안타깝다. 따지고 보면 생판 남인데.”

“에이, 둘은 가족이지. 남이라고 하는 게…… 더 슬프다.”

 
민주의 말처럼 <23센티미터> 속 종수와 희수는 사촌이라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다. 심지어 양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으니 더 이상 희수에겐 종수를 가족이라 부를 명분도 사라져가는 상태.

그래도 희수에게 가족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희수에게 가족이란 버려져서도, 버려서도 안 되는 소중한 것이라고.


“그래…… 아무튼 작품 속 종수와 희수는 아련하지만, 그래도 현실에서 둘은 누릴 게 많아 보여서 다행이긴 해.”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작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는 혜윤을 보며 민주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좋은 놀잇감의 등장으로 한껏 신이 난 표정이었다.


“종수가 은근슬쩍 희수 손도 잡고, 꿈속에서 뽀뽀도 하잖아?”

“아…….”

 
폭풍 같은 일주일은 혜윤이 자신의 글 내용도 잊게 할 만큼 대단하긴 했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다물리지 않는 입 모양에 민주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너 촬영하는 동안 내가 스타일리스트의 자격으로 함께 한다는 거 잊으면 안 된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

“응. 나야 고맙지. 돈은 많이 못 주지만 대신 추억을 선사할게.”

“웬만하면 추억 말고 돈으로 달라고 했을 텐데, 이게 또 촬영지라고 하니까…… 아주 만족스럽네요. 운 좋으면 다른 남자 배우들도 볼 거니까? 흐흐.”

 
조금 커 보이는 쿠키를 손으로 똑똑 자르며 민주가 헤프게 웃어 보였다. ‘정말 퇴사하길 잘했어.’라며 쿠키를 오물거리는 모습이 개구쟁이 같았다.

띠리링-


[혜윤아, 내일 2시에 대본리딩 잊지 말고 와. 도착해서 못 찾겠으면 연락 줘. (오후 10:10)]

 
산뜻한 알림과 함께 도착한 민우의 당부. 그렇다. 내일은 공식적인 드라마 제작의 첫 시작일이다.

지호의 출연 확정으로 제작에 엄청난 속도가 붙었다. 광고와 협찬 모두 경쟁이 붙어 제작비는 넉넉해졌고, 방송사 측은 기존 드라마스페셜의 방영 시간인 월요일 밤 12시를 특별히 금요일 밤 10시로 변경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판에서 그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요즘은 매일 느낄 수 있었다.


“혜윤아, 그런데 나 진짜 진짜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

 
꿈틀거리는 눈썹과 번쩍이는 눈빛. 민주의 표정에 혜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제발 자신이 거짓말을 해야 하는 질문이 오지 않길 바라며.


“우리 20년 우정 걸고. 정말…… 정말로 그날 아무 일도 없었어?”

“응!”

 
혜윤이 꽤 괜찮은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론 ‘아무 일’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속옷만 입고 있던 그날의 아침이 떠올라 고개를 설설 흔들기도 했다.


“어? 뭐야 지금! 고개 왜 흔들지? 거짓말 같은데?”

“아니야. 그냥 다른 생각이 나서 그랬어. 진짜로!”

“……그래. 장혜윤이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으니까. 그런데 미심쩍단 말이지…….”

 
혜윤은 저보다 조금 더 세게 고개를 흔드는 민주가 어딘지 모르게 귀여웠다. 작은 웃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속인 건 아니고 말을 안 한 것뿐이라 위안 삼으며.

영업이 끝난 카페 유리창 너머로는 온통 새까만 밤이었다. 이제 이 밤이 지나면 일주일 만에 지호를 다시 만난다. 혜윤이 혀로 도톰한 입술을 쓱 적셨다. 입술에 남은 유자차 때문일까. 왠지 단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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