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보고 싶었어요 (8/110)


8. 보고 싶었어요
2022.06.26.



 


“우준아, 너 요즘 사람들한테 맞고 다녀?”

 
이젠 낮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날이 선선해졌다. 우준은 황당한 눈으로 혜윤을 쳐다봤다. 맞고 다니냐는 말이 너무나 생경했기에. 한낮의 햇빛이 스민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유독 더 투명해 보인다.


“어디를 어떻게 봐야 이 덩치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너무 많이 맞아서 이렇게나 부은 거 아닐까? 몸이 더 빵빵해졌어.”

 
저런 독특한 상상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저 작은 머릿속엔 집채만 한 곰인형 배 위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곱슬머리 꼬맹이가 살고 있을 것이다. 악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천진난만한 꼬맹이가.


“빵빵이 아니라 딴딴이야.”

 
우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우스꽝스러운 상상을 알 리 없는 혜윤은 작은 주먹으로 운전하는 우준의 굵은 팔뚝을 툭툭 쳐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맞는 사람은 아무 느낌도 없건만 때리는 사람만 아픈, 이상한 타격.

그을린 피부에 굵은 골격과 근육으로 가꿔진 몸매.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우준은 운동하는 사람인 티가 났다.


“오늘은 수업 없어?”

“응. 다섯 개 있는 거 사정 설명하고 미뤄놨지.”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단막극이라도 나름 여배우 첫 일정이잖아. 혼자 가면 쓰나.”

 
어깨를 으쓱하며 운전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독 남자답게 느껴졌다.

우준은 혜윤의 카페와 같은 건물에서 1:1 피트니스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서로 매일 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못 본 기간이 일주일을 넘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일주일이 좀 어마어마했어야지.


“그런데 넌 별로 안 궁금한가 보다. 질문이 하나도 없네?”

 
내 딸의 첫 연애를 보듯 수백 가지 궁금증이 끊기지 않던 민주를 생각하면, 둘의 반응이 너무 극적이었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음악에 고개를 까딱거리는 그를 바라봤다. 서글서글한 눈가에 동요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궁금할 게 뭐 있어? 어쩌고저쩌고해서 사귀는 척하기로 한 거라며. 진짜 사귀는 건 아니고.”

“큭큭. 어쩌고저쩌고.”

 
복잡한 건 딱 질색하는 김우준답다 싶어 혜윤은 웃음이 났다. 마음이 넓은 건지, 둔한 건지.


“나도 일 없는 날은 최대한 도울게. 그래봤자 몇 번 안 되겠지만. 민주는 스타일리스트 하기로 했다며. 그럼 나는…… 매니저?”

“음,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려나.”

“고마우면 다음에 그 가짜 남자친구 사인이나 받아 와. 회원 유치할 때 써먹어야지.”

 
벌써 늘어날 신입 회원들 생각에 신이 났는지 이젠 어깨까지 들썩인다. 그 모습이 바보 같다며 타박했지만, 혜윤은 사실 많이 고마웠다.


“다 와 가는데 그냥 지상 주차장으로 가면 돼?”

“아니. 지하 주차장 쪽으로 가자.”

 
혜윤의 눈이 핸드폰에 적힌 깔끔한 문장을 읽었다.


[작가님, 지상에 취재진이 많습니다. 지하 주차장 E 출입구로 들어오세요. (오후 1:31)]

 
지호의 매니저, 봉기였다. 10분 전쯤 온 메시지인 걸 보니 지호도 아마 도착한 듯싶었다. 아닌가. 이미 안 봐도 훤히 알고 있는 건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기까지 어려움은 없었다. 운전과 방향감이 탁월한 우준 덕분이었다. 단지 약간의 당혹스러움은 있었는데, 방송국 출입구에서 수위 아저씨의 눈빛이 그랬다.

본인 확인을 한다기보다는 끓어오르는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샅샅이도 훑던 눈빛. ‘아, 장혜윤 씨구나.’라는, 누구인지 너무 잘 안다는 듯한 혼잣말. 50대의 아저씨에게도 이제 혜윤은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 이제 저기로 들어가면 돼. 데려다줘서 고마워.”

“응? 나 안 갈 건데?”

 
의아한 듯 눈이 동그래진 혜윤을, 우준이 더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탁탁 두드렸다.


“이렇게 큰 건물에 길치를 놓고 가면…… 다음 주는 돼야 집에 오겠지.”

“그 정도는 아니거든?”

“너 그 정도야. 큭큭. 일 다 보고 천천히 내려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예상도 못 했던 우준의 배려에 감동한 티를 내볼까 했지만, 그는 낯간지러운 장면을 빠르게 차단했다.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빨리 가.’라고. 역시 이마저도 김우준답지 싶어 혜윤은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에 도착한 혜윤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회의실에 도착할 때까지 스쳐 간 세 명의 여자에게서, 조금 전 수위 아저씨의 눈빛이 겹쳐 보였다.

똑똑-


“안녕하세요.”

“아이고, 장 작가님 오셨구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일 처음 보이는 건 민우였다. 민우의 추임새 같은 인사에 방 안에 10여 명쯤 되는 사람들이 문 쪽을 쳐다봤다. 혜윤도 괜히 뒤를 돌아봤다. 혹시 제 뒤에 대단한 사람이 서 있어서 쳐다보는 게 아닐까 싶어서.

어색한 얼굴로 천천히 뒤를 보는 모습이 꼭 그릇을 깨 먹고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 같았다. 삐그덕 소리가 날 것 같기도 했고.


“우리 장 작가는 여전히 귀엽네.”

“으아, 선배 그만 해요.”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23센티미터>의 출연진이었다. 드문드문 낯익은 얼굴의 배우들과, 앉은 자리마다 놓인 이름패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혜윤도 자연스럽게 제 이름을 찾아 움직였다.


“원래는 내 옆자리에 앉는 게 맞거든?”

 
두리번대는 혜윤을 눈치챈 민우가 대본 표지를 보며 말을 이었다.


“감독이랑 작가가 리딩 보면서 의견 교류하는 게 좋으니까. 그런데 배우도 겸하니 굳이.”

“아…….”

 
작가 겸 배우가 된 혜윤을 어디에 앉히는 게 좋을지 민우도 고민이었던 모양이다. 그 말에 발을 멈춘 혜윤이 민우를 바라봤다.


“사실 출연진이 많은 드라마도 아니라서 중요하지 않긴 해. 혜윤이 넌 지호 씨 옆에 앉는 게 좋겠지?”

“저는 아무 데나 괜찮아요.”

“에이, 벌서 지호 씨 자리에 서 있구만 뭘.”

 
민우의 말에 고개를 낮춰 테이블을 보니 <종수 역/안지호 배우>라고 적힌 종이 이름패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희수 역/장혜윤 배우>까지. 민우는 이미 이렇게 앉히기로 생각을 굳힌 듯싶다.

지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래서 혜윤은 조금 더 편안하게 이름패를 감상할 수 있었다. 새하얀 종이에 검은색으로 적힌 지호와 혜윤의 이름. 나란히 놓인 두 이름이 어딘지 모르게 산뜻했다.


‘이 회의실에 아무도 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뭐라고.’

 
더 오랫동안, 더 진득하게 보고 싶었다. 스스로도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생각에 혜윤은 아주 작게 코웃음이 났다. 나비가 앉은 듯 살짝 간지러워진 입술을 달싹였다.


“혜윤아, 여기 보는 눈이 이렇게나 많은데. 계속 그렇게 티 낼 거야?”

“네?”

 
딱히 엄청 좋아서 그랬던 게 아니었는데. 혜윤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민우를 돌아봤다.

그녀의 어깨맡에서 머리가 찰랑, 사람들의 눈빛도 반짝. 단숨에 방 안에 활력이 솟는다. 다들 한마디씩 얹고 싶은지 말을 참는 입들이 꿈틀꿈틀했다.


“좋을 때다. 막 이름만 봐도 애틋하고, 보고 싶고 그런 거지?”

“아, 아니에요!”

 
애틋한 것까진 몰라도 보고 싶은 건 맞았다. 괜히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혜윤은 병아리처럼 삐약거렸다.

그리고 그때, 복도에서 느껴지는 웅성거림에 모두가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순간 문이 열리며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지호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닫혀가는 문 틈새로 방송국 여직원들이 발을 동동거리거나 손으로 벌어진 입을 가리는 게 보였다. 민우는 문밖에 동료들을 보다 지호를 훑었다. 체면 버리고 매달릴 만한 외모가 맞지 싶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역시 주인공은 등장하는 타이밍을 아는군요.”

 
네이비색 셔츠와 검은 슬랙스를 입은 지호는 남성미가 농후했다. 두 개쯤 풀린 셔츠 단추 사이로 굵은 목울대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괜히 야하게 느껴져, 혜윤은 눈을 살짝 피했다.


“제 이야기하고 계셨나 봐요.”

 
지호는 한족 눈썹을 올리며 민우의 말의 의미를 찾듯 제 자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마침 혜윤도 서 있었으니.

일주일 만에 본 혜윤은 여전히 몸짓이 가벼워 보였고, 귓불에 올려진 작은 진주 귀걸이처럼 얼굴이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입 안에 공기를 가득 불어 넣어 볼을 빵빵하게 만들더니 눈을 피한다. 그걸 보고 있자니 너무 마음이 말랑해지고.

또 뭐가 저리 부끄러울까.


“아니, 장 작가가 너무 연애하는 티 내잖아요.”

“우와! 이렇게 몰아가기 있어요?”

 
혜윤은 억울한 표정으로 민우를 노려봤다. 그리고 지호는 시야를 넓혀 방 안의 배우들을 천천히 훑었다. 모두가 들뜬 채 즐거워 보였다. 특히나 다들 혜윤을 눈여겨보는 것 같다.

왠지 조금 아쉬웠다. 이 여자 귀여운 거 이제 다들 알아버렸네 싶은 생각에 괜히 샘도 나는 것 같고.


‘이 정도로 유치했나…….’

 
그녀를 통해서 느끼는 감정들이 하나같이 낯설어서, 지호는 신기할 지경이었다.

큰 키에 걸맞은 보폭은 어느덧 혜윤의 등 뒤까지 와 있었다. 혜윤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일주일 만에 본 그는 여전히 수려했다.


“장 작가가 지호 씨 보고 싶어 하길래 조금 놀려봤어요.”

“진짜 그런 거 아닌데…….”

 
지호와 눈이 마주치자 뾰족했던 말들이 웅얼대며 사라진다. 그래도 더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 속엔, 늘 머물고 싶은 따뜻함이 넘실거렸기에.


“알았어요. 일단 앉아요.”

 
지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가녀린 한쪽 어깨를 안마하듯 꾹 쥐었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론 의자를 당겨 혜윤에게 눈짓을 했다.

하나둘 의자를 고쳐 앉는 소리, 부스럭대며 종이를 넘기는 소리로 회의실 안이 조금씩 부산스러워진다. 이제 곧 대본리딩이 시작될 거란 암시처럼 느껴져 혜윤은 살짝 긴장됐다.


“그런데…….”

 
그리고 모두가 더는 둘에게 시선을 주지 않을 때쯤, 지호의 인기척이 혜윤의 귓가에 낙엽처럼 내려앉았다. 평소보다 작고 낮은 목소리에 조용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본을 보고 있는 옆얼굴이 반듯했다.


“난 보고 싶었어요.”

“…….”

 
대답을 원하는 말도 아니었지만 할 수도 없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만큼 혜윤의 뺨도 서서히 붉어졌다. 심장이 콩콩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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