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믿고 싶은 남자
(9/110)
9. 믿고 싶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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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믿고 싶은 남자
2022.06.29.
혜윤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꼭 깨물며 눈을 돌렸다. 가슴께부터 모락모락 김이 나는 것 같은 느낌에 더는 지호를 바라보기 힘들었다.
“그날 잘 들어갔어요?”
“…….”
지호는 여전히 대본을 보며 말을 건넸다. 이번엔 대답이 필요한 질문이었건만 옆에선 기척도 없다. 조금 더 기다리다 고개를 돌렸다. 핑계 삼아 얼굴도 한 번 볼 겸.
‘또 그러네. 아기 복어 같은 건가?’
혜윤은 아까처럼 얼굴에 공기를 가득 넣은 채 빵빵해진 볼을 하고 있었다. 어딘지 자신을 보호하려고 몸집을 부풀리는 것 같았다. 숙여진 고개가 대본 쪽이긴 했지만 표지도 펼치지 않은 걸 보니 정신은 딴 데 있는 것도 같고.
조용히 그녀의 대본에 손을 댔다. 그제야 눈치 보듯 제게 시선을 준다. 빵빵해진 양 볼이 여리여리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껏 방어의 자세를 취해 놓고 저리 사랑스러우니. 위협이나 될까 싶다.
“대답 안 해 줄 거예요?”
그가 대본의 표지를 넘겨 건넨다. 물론 다정함도 함께.
“……잘 들어갔어요.”
스르르 바람이 빠져나간 혜윤의 입이 작게 속삭였다.
“그래요.”
지호는 씨익 웃으며 다시 제 대본을 봤다. 더 욕심내기엔 이곳은 일터였다.
***
대본리딩은 큰 잡음 없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때로는 시끄러움보다 고요함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 때가 있다. 혜윤에겐 지금이 그랬다.
“장 작가, 그 부분 한 번만 다시 해보자. 초반에 13번 씬.”
“네.”
한 시간 동안 별말 없이 관망하던 민우가 돌연 혜윤을 불렀다. 그것도 오래전 지나간 첫 대사였다. 희수가 종수네 집에 온 첫날, 종수에게 처음 말을 건네는 장면.
“저기…… 불편하면 삼촌께 말씀드릴까? 내가 거실에서 자도 돼.”
“응. 그 부분부터 말이야. 연기도 그 톤으로 쭉 갈 거야?”
민우의 손가락이 제 턱을 그러쥐었다.
“희수가 지금 대사 치는 것처럼 그렇게 눈치 보는 성격인가?”
“아…… 제가 잘못 짚은 건가요?”
“아니, 진짜로 궁금해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장 작가는 다른 해석이 있는지 물어본 거야.”
강압적이진 않았지만 묵직한 의문이 담긴 말투였다. 민우의 눈에도 더 이상 장난기는 없었다. 대본리딩이 시작된 후부터 꾸준히 혜윤을 작가로 칭했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가령 그 호칭에 걸맞은 무언가를 보여달라는.
처음 느껴보는 민우의 뚝뚝함에 혜윤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유독 촉촉한 그녀의 눈은 이럴 땐 정말 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고. 단순하게 물어본 거였어.”
“안 무서워요, 선배. 틀린 부분 있으면 계속 알려주세요.”
그 눈에 민우가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곧이어 턱을 쥔 손이 자연스럽게 내려와 손뼉을 탁탁 쳤다.
“그럼 우리 10분만 쉬었다 합시다.”
휴식을 알리는 민우의 목소리 뒤로 조용했던 회의실 안이 잠시 시끄러워졌다. 민우는 그 잠깐 동안 다시 한번 두 사람을 주시했다.
“뭘 그렇게 봐요. 왜? 아무리 봐도 투샷이 너무 예술이야?”
이미 옆자리에 서 있는 조연출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 질문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응.”
“큭큭. 나도 같은 생각이라 반박을 못 하겠네.”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1시간 동안 지켜본 둘의 조합이 상상 이상으로 환상적이었다.
“사실 지호 씨 캐스팅해놓고 조금 걱정했거든. 사촌 누나 짝사랑하는 가난한 고등학생인데, 저렇게 잘생긴 게 말이 되나 싶어서.”
“그렇죠. 좀…… 많이 과해, 지호 씨는.”
“근데 혜윤이가 옆에 앉으니까…… 어라? 이게 그림이 되네? 잘 어울리네? 진짜 저렇게 생긴 종수였어도 희수한테 빠질 법한데? 싶은 거지.”
“진정해요. 광대 승천한 거 내리시고.”
회의실을 나서는 민우와 조연출의 발걸음이 바람에 떠다닐 듯 가볍다.
“어쩌지? 너무 대박 나면 안 되는데.”
“아주 별걱정을 다 하셔.”
한 시간쯤 진행된 대본리딩의 중간 휴식 시간. 감독과 조연출은 벌써부터 시청률 내기를 하고 있었다. ‘금요일 밤 10시의 시청률 1위를 <드라마스페셜>이 하게 된다면.’ 같은 상상은 두 사람을 흥분시키고도 남을 만했다.
물론 연출진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혜윤은 의자에서 꼼짝 않고 다시 대본을 들여다봤다. 생각의 무게에 짓눌려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희수는 정말 어떤 아이일까.’
연기라는 벽보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제 느낌이 가는 대로 희수를 표현했지만 정답이 아닐 것만 같은 불안함이 피어올랐다.
“분명 눈치 보고 있었을 거예요.”
“네?”
잠잠히 스며드는 말에 혜윤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보니 회의실엔 어느새 지호와 자신만 남아 있었다. 유독 깊게 울리는 이 남자의 목소리는 입이 아니라 가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아닌가. 목소리가 아니라 마음이 들리는 건가.
“희수 말이에요. 어른들 앞에서야 항상 강한 척했겠지만, 기억이 시작될 무렵부터 눈치로 자란 아이잖아요.”
“아…….”
“어디서든 티가 났겠죠.”
지호는 덮어놓은 대본 위로 반듯하니 남자다운 두 팔을 올렸다. 그리고 상체를 살짝 숙여 혜윤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바라봤다. 밝은 형광등 밑에 그의 넓은 어깨가 만든 그림자가 그녀의 몸집만 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고민하지 말고.”
민우가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다면, 지호는 확신을 건넸다.
“작가님만큼 희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눈치 보는 느낌이다 싶으면 눈치 보고, 당당할지도 모르겠다 싶으면 당당하게 굴어요. 그때그때 하고 싶은 대로.”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요. 매번 바뀌면 캐릭터가 설득력이 사라질 텐데…….”
혜윤이 지호의 짙은 눈동자로 시선을 모았다. 광활한 우주의 고요가 담긴 눈동자. 저 눈을 들여다보면 꼭 우스운 질문에도 꼬박꼬박 대답했었다. 왜 그랬을까 싶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걱정 마요. 설득력은 내가 만들어줄 테니까.”
믿고 싶어서 그랬나 보다. 뭐든 다.
그의 말이 진심이란 게 너무도 선명하게 읽혀서, 눈가에 대뜸 열이 올랐다. 계속 보고 싶기도 하고, 진심을 들키기 싫기도 하고. 혜윤이 겨우 찡해진 코를 두어 번 찡긋거린다.
지호는 그런 혜윤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상체를 쭉 물렀다. 그녀의 촉촉한 눈이 예쁘다 한들 절대 울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말 위에 장난을 보탰다.
“배우 남자친구 뒀다 뭐 할 거예요. 이렇게라도 써먹어야지.”
“네?”
역시나. 언제 울먹였냐는 듯 바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리 이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해야 될 텐데.”
“……그렇죠.”
혜윤 역시 공감하는 바였다. 급한 불 끄듯 일단 열애 인정을 해버린 게 전부였다. 그 외엔 아무것도 말을 맞춘 게 없는 상태. 심지어 열애설 이후 오늘이 첫 만남이었으니.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지호에게 초점을 바로 잡았다. 겹쳐 끼워둔 팔짱 사이로 단추가 열린 셔츠 자락 안의 탄탄함이 고스란히 보여 순간 눈을 홱 돌렸다.
“오늘 끝나고 약속 있어요?”
갑자기 혜윤의 시선이 거둬진 틈으로 그의 질문이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수런거리는 소리가 둘의 공간으로 밀려들었다.
“저기…… 다시 리딩 이어갈게요. 이제 두 분 이야기 끝난 거면 우리 들어가도 되죠?”
“으아, 얼른 들어오세요. 다들.”
두 사람을 놀리는 재미가 쏠쏠한지 민우와 조연출이 배우들을 데리고 우르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혜윤이 저리도 당황하고 눈치를 보니 더 그러는 것 같았다.
지호는 눈가에 닿을 듯한 머리를 이마 뒤로 스르륵 넘겼다. 종일 묻고 싶었던 말이 길을 잃고 흩어진 게 조금 아쉬웠다.
***
“오늘 여기까지 할게요. 그럼 2주 뒤, 첫 촬영 때 뵙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모두가 박수로 서로를 격려했다. 혜윤도 출연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동화 속 이야기에도 일러스트레이터가 활기를 불어넣어 줬지만 드라마는 또 다른 세계였다.
정말 살아 숨 쉬는 이야기. 두 발이 닿아 있는 현실에서 펼쳐지다 보니, 벌써 촬영이 시작되면 어떻게 이 벅찬 감동을 감당할는지 떨릴 정도였다.
“참, 지호 씨랑 혜윤이는 이번 주에 의상실 한번 가줘요. 각자 교복 디자인도 좀 보고, 간 김에 사이즈 재고 맞춰도 좋고요. 힘들면 통화만 해도 되긴 해.”
“제가 갈게요. 저 금요일에 시간 돼요.”
“그럼 내가 메시지로 주소 알려줄게.”
“네. 감사해요, 선배.”
민우는 수시로 오는 전화 때문에 서둘러 회의실을 나섰다.
원래대로라면 방송국 내에 있는 기성 교복을 사용하는 건데, 하다 하다 교복까지 협찬이 들어왔다니. 혜윤은 옆자리에서 일어난 지호를 보며 입술을 샐쭉거렸다.
“뭐가 또 뾰로통해서 그럴까.”
내려다보는 기색이 없었음에도 지호는 혜윤의 표정이 다 보인다는 듯 웃었다. 혜윤이 따라 일어나며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했다.
“그냥 음…… 너무너무 대단한 사람이랑 일하는 것 같아서요.”
“그렇구나.”
여전히 재미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지호를 따라 그녀도 함께 회의실 문 쪽으로 걸었다. 문이 열리자 방송국 여직원 네댓 명이 지호를 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참긴 해야겠고, 좋아 죽겠고. 그 감정이 혜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아, 매니저님.”
그리고 그들보다 앞에 서서 기다리던 봉기가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사실 지호와 봉기에게 이런 상황은 일상이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작가님, 이제 촬영 시작되면 개인 스탭들이 필요할 거예요. 저희가 지원해 드렸으면 합니다.”
봉기가 고마움과 미안함에 이런 제안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혜윤은 더욱 생긋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요. 도와줄 친구들이 있어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음…… 그럼 언제든 필요한 일 있으면 말해 주세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혜윤의 머릿결이 지호의 팔에 스치며 제 자리를 찾았다. 팔을 간지럽힌 머리카락이 가슴에도 들어간 건지, 지호는 마음이 자릿해져 슬며시 웃었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도착했다. 혜윤은 세 시간 전에 본 지하 주차장을 낯선 행성을 보듯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에 지호가 말을 걸려던 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새로운 메시지로 환해진다.
[거기서 왼쪽 끝에 봐봐. 바보야. (오후 4:46)]
“왼쪽…….”
혼잣말을 하는 혜윤의 고갯짓에 지호와 봉기 모두 혜윤과 시선을 함께했다.
저 멀리 이쪽을 향해 신호를 보내는 비상등, 그리고 운전석 옆에 서서 혜윤을 바라보는 남자. 지호는 그를 바라봤다. 우준도 그 눈을 피하진 않았다.
지호의 눈빛에 날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