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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름을 부른다는 건 (11/110)


11. 이름을 부른다는 건
2022.07.06.



“혜윤 씨, 교복 너무 잘 어울린다.”

“키가 작아서 그런가 봐요.”

“에이, 그럴 리가 있나. 예쁘니까 잘 어울리는 거지.”

 
거울 앞에 서있는 혜윤의 몸 위로 여러 개의 교복이 올려졌다. 옆에 선 실장은 자그마한 몸 위에 새로운 교복을 얹을 때마다 말긋말긋 흐뭇하게 바라봤고, 혜윤은 그런 그녀의 환한 표정을 눈에 담았다.

진심 어린 호감이란 건 이렇듯 거울을 통해서도 쉽게 보였다.


“교복은 정말 다 잘 어울려서 취향대로 고르면 될 것 같고…… 사이즈 좀 재볼까요?”

“네.”

 
교복을 내려놓은 실장의 손에 긴 줄자가 들렸다. 그녀의 가벼운 손짓마다 혜윤은 몸을 움직이며 호흡을 맞췄다.


“오, 볼륨감이 제법 있네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는데…….”

 
혜윤의 가슴에 둘린 줄자가 스르륵 풀린다. 밖에서 떠들던 여자들의 목소리는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았다. 혜윤은 아마 그들도 다른 숫자가 적힌 방에 들어갔을 거라 생각했다.


“혜윤 씨처럼 작은 골격에서 이 정도면 예쁘게 볼륨 있는 편 맞아요.”

“사실은요…… 속옷의 도움도 있어요.”

“하하하. 그래? 충분히 감안해도 예쁜 몸인 건 확실해. 골반 사이즈도 그렇고.”

 
단둘뿐인 방, 그럼에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제 옆에 바짝 붙어 전하는 수줍은 고백. 실장은 혜윤이 뿜어내는 기운들이 하나같이 깜찍하게 느껴졌다. 이런 딸이 있었다면 평생 끼고 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럼 교복은 제일 작은 사이즈에서 라인만 살짝 잡을게요. 수수한 학생 역할이라고 했으니까 꾸민 티는 안 나게끔.”

“네. 잘 부탁드려요.”

 
내려놓은 가방을 주섬주섬 들며 혜윤이 방을 나설 채비를 했다.


“나중에 드라마 방영하면 꼭 볼게요. 둘이 얼마나 잘 어울리려나.”

 
콧노래가 섞인 목소리에 문 앞까지 간 혜윤이 뒤돌아 눈을 끔뻑거렸다. 그런 식의 기대는 부끄럽다는 마음의 소리가 퐁퐁 뿜어져 나왔다.

실장은 조금 더 활짝 웃었다. ‘혜윤 씨, 정말 깜찍하네.’라는 말을 해 주려다 그저 웃어주는 걸로 대신했다. 온 세상에게 달달 볶였을 저 귀여운 여인에게는 아무리 좋은 평가라 한들 짐이 될 것 같아서.

혜윤이 문을 열자 곧장 대기실의 빛바랜 갈색 소파가 보였다. 그런데 사람이 여럿 더 늘어 있었다.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건만 심지어 자신을 수군거리던 여자들도 그대로 앉아 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소파에서 시선을 떼려던 참이었다.


“……어?”

“이제 끝?”

 
절대 시선을 뗄 수 없는 사람이 있어서 계획은 흔적 없이 녹아버렸지만.

지호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네이비색 캡모자와 하얀 스웨트셔츠, 적당히 바랜 청바지, 경쾌한 스니커즈. 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착장이 이렇게 이목을 끌 일인가 싶었다. 그 정도로, 너무 화사했다.

그의 넓은 어깨에 맞춘 티셔츠가 쇄골을 지나 가슴까지는 골격을 겨우 잡은 듯 팽팽했지만, 군살 없는 허리춤은 여유로워 보였다. 단단한 허벅지 근육이 청바지를 쥐었다 놓는 것처럼 그의 걸음에 맞춰 움직였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열렬한 관심이 느껴졌다. 어디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들어보자는 듯한.


“어머, 지호 씨 오랜만이네요?”

 
그 달갑지 않은 관심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때, 혜윤의 뒤에 붙어 선 실장이 지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호도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잘 지내셨죠?”

“그럼요. 지호 씨는 정말 외모에 한계가 없구나. 더 이상 잘생겨질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런데 무슨 일로? 교복 때문에?”

“네. 겸사겸사.”

 
딱 한 걸음 거리까지 다가온 지호에게서 익숙하고 포근한 향이 났다.

지호의 집에서 바라본 청명한 하늘, 다이아가 뿌려진 한강의 빛이 눈앞에 어른댔다. 그때 제 몸에서 났던 바디워시 향과 같았다. 혜윤은 괜스레 부끄러워져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 혜윤 씨랑 약속하고 온 거구나? 그럼 온 김에 사이즈만 얼른 재보게 들어와요.”

“네.”

 
실장이 뒤돌아 다시 들어갔고, 이제 문 앞에 남은 건 한 걸음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사람뿐.


‘지호 씨한테 인사를 하고 가야겠지?’

 
혜윤은 다양한 생각을 했다. 관객이 이리 많은데 안 친한 티를 내자니 눈치가 보였다. 이 상황에서 ‘그럼 먼저 갈게요.’도 이상한 것 같고, ‘다음에 뵐게요.’는 더 이상해 보였다.

어떤 연인이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할까.

생각이 많아져 무거워진 혜윤의 머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눈을 높일수록 시야에 환히 솟아나는 그림 같은 외모. 흰 티셔츠 위에 지호의 얼굴이 어딘지 즐거워 보였다.


“생각도 이제 끝난 것 같고…….”

 
지호는 살짝 접은 검지로 아랫입술을 슬슬 문지르며 미소를 가렸다.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혜윤은 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게 분명한데, 왜 똑같이 여유롭게 굴지 못할까 싶어 조금 억울했다.

순간, 그가 혜윤의 손에 쥐여 준 무언가.


‘……스마트키 아닌가?’

 
혜윤이 의문스럽게 지호의 눈을 마주했다. 모자 챙이 만들어 낸 작은 어둠 속에서, 오로지 한 사람만 바라보는 깊은 눈동자가 사뭇 묵직해 보였다.


“차에 먼저 가 있어요. 금방 내려갈 테니까.”

 
눈빛만 짙어진 줄 알았는데 어느새 목소리도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대충 알겠다고 하고 이곳을 벗어나야 하건만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만 벌어질 뿐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지호가 슬쩍 몸을 옆으로 비켜준다.

대답할 필요 없으니 걷기만 하면 된다고.

뚜벅뚜벅 걷는 발걸음을 열 번은 더 쪼갠 속도만큼 혜윤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두근 뛰었다.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눈들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지호가 쥐여준 키가 뜨끈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인 의상실 출입문에 손이 닿았을 때.


“혜윤아.”

 
그가 참 다정히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혜윤은 어떻게 돌아보는 게 자연스러운 건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짧은 호흡을 내쉬며 머뭇. 머뭇. 머뭇.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는 동안 저녁 뭐 먹을지 생각해보라고.”

 
그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 또 이렇게나 제 마음을 끌어당기니. 지호는 장난스레 그녀를 조금 더 몰아붙였다. 어쩔 수 없었다. 우는 아이는 때론 너무 사랑스러워서 조금 더 골려주고 싶은 법이니까.

뒤 돌아 방 안으로 들어가는 지호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했다.

***



“지호 씨는 2년 전보다 몸이 더 좋아졌구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서 그런가 봐요.”

“응. 어깨도 더 넓어졌고, 가슴둘레도 그렇고. 오길 잘했네.”

 
실장은 종이에 재어둔 수치를 적었다. 그녀는 기대됐다. 그의 5년, 10년, 그보다 더한 미래의 모습이. 분명히 이 이상은 불가능이라 느껴지는 지금의 외모를 뛰어넘을 것이다. 해마다 그래왔으니까.


‘중년 즈음까지 가면 남성미까지 농밀해질 텐데, 상상이 안 되네.’

 
그녀가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참, 지호 씨도 교복 좀 볼래요? 혜윤 씨도 고르고 갔어. 둘이 다른 학교 설정이라 디자인이 달라야 한다고 해서 샘플이 여러 개거든.”

“가장 단조로운 걸로 주세요. 눈에 잘 안 띄게끔.”

 
‘눈에 잘 안 띄는 걸 원했으면, 지호 씨는 최고의 미스 캐스팅 아닌가?’ 같은 의문이 솟구쳤지만 그 생각 역시 고개를 저으며 털어냈다. 그녀의 눈이 남자 교복 중에 제일 어둡고 밋밋한 디자인을 향한다.


“아, 역할이 그런 거예요?”

“네. 제 건 물려받은 것처럼 사이즈도 조금 어긋나고 헐렁하게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최대한…….”

 
느긋했지만 막히진 않던 그의 말이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저 말고 혜윤이가 돋보일 수 있는 디자인으로요.”

“이야, 이렇게까지 해? 지호 씨 연애 스타일이 엄청 남자답구나?”

“역할이 그래요.”

 
실장이 눈을 흘겼지만 실제로 영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그는 조금 당당히 굴었다.

지호는 입 안에 담긴 혜윤의 이름이 너무 달게 느껴졌다. 계속 부르는 것도, 부르기 전 입 안에 머무는 그 잠깐도, 모두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지호 씨 오기 전에 말이야. 다들 혜윤 씨 두고 하도 수군대는 통에 헛기침 좀 해 주면서 들어왔거든.”

“……그렇군요.”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의상실에 들어왔을 때, 그가 온 줄도 모르고 길게 늘어진 이야기를 끝맺지 못한 사람들. 비로소 눈이 마주친 뒤에야 입을 닫아버렸으니 없을 땐 더 했겠지.


‘그 작은 여자가 어떻게 참아냈을까.’

 
지호의 시선이 먼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이 달콤한 기분이 어쩌면 혼자만 느끼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마음 한편에 조금씩 쓴맛이 퍼졌다.


“아이고, 문을 열었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

“울었나요?”

 
지호가 고개를 홱 돌리며 대꾸했다. 이성이 감정을 누를 틈이 없었다. 그녀가 울었다는 상상에.


“아니. 나도 그럴까 싶어서 들어왔는데 웬걸? 귀를 쫑긋 세우고 조심조심 다 듣더니 막 화내던데? 주먹도 불끈 쥐고, 바닥도 발로 탕탕 치고?”

“아…….”

 
그는 조용히 입술을 말아 물었다. 너무 훤히 그려졌다. 그 아이 같은 여자가 얼마나 눈을 크게 떴을지, 가뜩이나 작은 손을 얼마나 더 작아 보이게 꼭 쥐었을지, 도톰하게 내민 아랫입술이 얼마나 귀여웠을지.


“……화난 다람쥐 같았겠네요.”

“맞다. 딱이네, 그 표현.”

 
두 사람은 웃으며 방을 나섰다. 데이트 앞둔 사람들을 오래 붙잡는 건 민폐라며 실장은 지호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꾸벅 인사를 하며 건물에서 내려오는 그의 발소리가 가뿐했다.

탁-

차 문이 열림과 동시에 행복이 코끝을 스쳤다. 지호는 역시 사람은 시각보단 후각이 더 빠르다고 생각했다. 차 안 가득 넘실거리는 혜윤의 향. 단 20분 만에 은은히도 깊이 뱄구나 싶어 기특했다.

원래 차 시트가 이렇게 컸었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몸이 가녀려 보였다.


“아, 이거…….”

 
어색해서인지 공손한 두 손이 키를 소중히도 주기에 손가락을 스치며 건네받았다.


“아까 놀랐어요? 너무 건방졌나.”

“아니요! 저도 뭐라고 말은 해야겠는데 입이 안 떨어져서…….”

 
안 놀랐다는 거짓말 한 번, 입이 안 떨어졌다는 바른말 한 번. 절반만 맞춰대던 대기실 사람들을 흉내 내듯 혜윤은 반만 솔직했다.

지호는 시동 버튼을 누르고 음악을 틀었다. 적당히 리듬감이 있는 음악에, 혜윤이 긴장이 풀린 건지 나른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래서 생각은 해봤어요?”

“……뭘요?”

“저녁 뭐 먹을지.”

“네? 그거 진짜였어요?”

 
그러고는 몇 마디 대화에 고개가 똑 하고 멈춘다. 놀란 눈이 생기 있게 지호를 향했다.

밀폐된 차 안, 남자를 달뜨게 만드는 향기, 고작 한 뼘쯤 되는 거리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갈색 눈. 낮은 볕이 일렁이는 그 눈에서, 가을이 절정을 맞이했지 싶었다.

이번엔 지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더 보고 있다간 선을 넘을 것 같았다. 마음이든, 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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