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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일 하고 싶은 한 마디 (12/110)


12. 제일 하고 싶은 한 마디
2022.07.10.



 
두 사람은 넓고 간결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긴 간격을 두고 자리한 테이블마다 노란빛의 조명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골목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그럼 저 때문에 온 거예요?”

“아마도?”

 
지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기울어지는 햇살이 그의 쇄골을 지나 바닥을 때린다. 굳이 얼굴까지는 비춰줄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저리 눈부시니.


“세상에. 오래 기다렸어요?”

 
맞은편에 앉은 혜윤이 그런 지호를 시무룩해진 눈으로 바라봤다.


“얼마 안 기다렸어요. 시간이 조금…… 느리게 가는 것 같았지만.”

 
혜윤은 다행이지 싶어 마음이 놓였다. 그제야 음식점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2층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실내에 흐르는 재즈에 어깨가 살랑였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2층 창밖의 도시 풍경에도 시선을 나눠주고.

하지만 결국엔 지호를 봤다. 이 계절, 이 순간, 제일 눈이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혜윤이 기웃거림 끝에 그를 바라볼 때면 항상 알 수 있었던 건.

그는 언제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그 시선이 부끄러워, 그녀는 허벅지 위에 올려둔 두 손으로 죄 없는 바지만 괴롭혔다.


“그렇죠. 의상실이 너무 조용했어요. 음악도 없고…….”

 
너무 조용해서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았던 그곳. 그래서 모르고 싶은 말들까지 다 들렸던 그곳. 혜윤은 의상실을 떠올리며 다시 지호와 눈을 마주했다.

그에겐 그런 말들이 안 들렸길 바라는 착한 마음도 잠깐, 실장과의 대화가 쌩 스쳐 간다.

쾅!


“으앗!”

 
느닷없이 혜윤의 꽉 쥔 주먹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왜 그래요?”

“지호 씨! 거기서 얼마나 있었어요? 몇 분?”

 
그녀의 행동에 지호가 놀라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길고 시원한 눈매가 조금 더 커진 채로.


‘오, 볼륨감이 제법 있네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는데…….’


“혜윤 씨처럼 작은 골격에서 이 정도면 예쁘게 볼륨 있는 편 맞아요.”

 
안에서 밖의 말들이 다 들렸다면 밖에서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했다. 곧바로 지호를 바라보는 눈에 간절함이 들끓는다. 그는 그녀의 새로운 표정을 재미있게 지켜봤다.


‘사실은요…… 속옷의 도움도 있어요.’

 
아, 뭐 때문인지 너무 알겠네 싶은 마음에 속으로만 귀여워하고 티를 안 내려다가도.


“몇 분이면…… 마음에 들겠어요?”

“아…….”

 
결국엔 또 이렇게 마음이 동하고 만다. 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한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어서.

지호의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에 혜윤이 작게 탄식을 했다. 다 들었구나 싶었다. 왜 그에겐 이렇게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게 될까 싶기도 한데, 참 희한했다. 어쩐지 저 사람이라면 그래도 될 것 같다는 안도감이 생기는 게.


“……지호 씨가 5분 정도만 기다렸다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냥 원하는 걸 솔직하게 말하고 싶기도 했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떼쓰는 아이처럼.


“큭큭. 그래요, 그럼 5분. 딱 그 정도 기다렸던 것 같네.”

 
미려한 지호의 눈가가 보기 좋게 휘었다. 혜윤은 대답까지 하기엔 너무 뻔뻔한 것 같아 만족스러움을 비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합의하에 주고받은 귀여운 거짓말이었다.

곧 멀리서 쿵쿵대며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직원 두 명이 각각 라자냐와 파스타, 샐러드와 음료를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주,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혜윤은 직원의 떨리는 말투를 예상하고 있었다. 테이블로 걸어오는 걸음걸이부터 너무나 어색했으니까.


“저기요. 그런데 저희가 저, 정말 안지호 씨 팬이라서…….”

 
남직원이 라자냐와 파스타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사이, 옆에 서 있던 여직원이 쭈뼛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지호는 그녀를 보며 예의 바른 미소를 보였다.


“펴, 편안하게 식사하세요. 두 분 내려오시기 전엔 2층에 손님 안 받을게요. 요즘 손님이 없기도 하고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을게요.”

 
모든 세팅을 마치고 뒤돌아 내려가는 직원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제야 지호의 시선이 혜윤에게 돌아간다. 아무도 안 올려보낸다고 하니 더 고마웠다. 해야 할 이야기들이란 게 하나같이 아무도 안 들었으면 하는 것들뿐이라서.

그래서 차 안이 적당하다고 생각했건만, 고작 30초 만에 심장이 치솟는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이야.

지호가 고개를 내두르며 라자냐를 적당히 잘라 건넸다.


“고마워요.”

 
혜윤의 인사에 미소로 답한 뒤, 똑같이 자신의 접시에도 라자냐를 덜었다. 흰 접시는 음식의 색감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넓은 면 사이사이에 미트소스가 얇고 균형 있게 섞여 있는 모양새.


“전에 매니저 형이 말한 건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접시에 놓인 라자냐를 보던 눈을 혜윤에게 옮겼다. 해야 할 말들 사이에, 하고 싶은 말들이 균형 있게 섞이길 바랐다.


“어떤 거요?”

“개인 스탭이요. 초반 한 달이야 여기서 찍는다지만, 후반 한 달은 부산 촬영이잖아요.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텐데.”

“아, 그거라면 괜찮아요. 친구들이 해 주기로 했어요.”

 
가볍게 대답을 한 혜윤이 음식에 포크를 댔다. 입에 넣자마자 콧소리를 내며 눈이 커진다. 그 모습에 지호도 살짝 웃었지만.


“친구라면…… 그때 그 주차장에서 본?”

 
곧 시선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이 순간만큼은 마음을 읽는다는 여자를 정면으로 보기 조금 그래서.


“네. 그런데 지호 씨도 우준이를 봤어요?”

“……멀리 있는 것만.”

 
속내를 들킬까 싶어 내렸던 눈이 다정히 불린 우준이란 이름에 차갑게 올라갔다. 그녀는 입에 맞는 음식 때문인지 다른 생각이 없어 보여 다행이긴 했다.


“맞아요. 그 친구도 가끔 도와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친한 친구 한 명은 항상 함께할 것 같아요. 마침 일을 쉬는 친구라.”

 
지호는 작게 수긍했다. 혜윤의 확고한 생각을 알았으니 더 이상 권하는 것도 무리였다.


“종영 때까지는 계속 이래야 할 거예요. 물론…… 그 전에 헤어졌다고 하면 작품이야 더 주목받겠지만.”

“아…….”

 
그리고 말하기 싫은 주제를 어렵게 꺼내놓았다. 어쨌든 짚고는 넘어가야 할 일이었으니. 입 안이 씁쓸해져 음료로 목을 축이며 혜윤을 보는데, 오물오물 먹던 입이 동그랗게 벌어진 채 멈춰 있었다.

하필 이럴 때, 기대하고 싶게.

그가 올라오는 감정을 쳐내려 고개를 툭 털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주목받는 건 작가님도 원치 않을 거예요.”

“…….”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재수 없지만…… 왜 내가 쏟아지는 시나리오 중에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를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작가님의 글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와…… 감동.”

“응?”

 
멈춰 있던 혜윤의 입이 뭐라고 작게 웅얼거리길래 그가 되물었다.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너무…… 감동받았어요.”

“큭큭. 그렇게까지?”

 
포크를 삼지창처럼 꼭 쥐고는 혜윤의 눈이 그렁그렁했다.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데 잠깐이나마 무거웠던 주변의 공기가 붕 떠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역시 벌써 다가오는 아쉬움을 모른 체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종영 때까지는…… 이렇게 지내기로 해요.”

“네. 저는 좋아요.”

“다행이네.”

 
아직도 포크를 거꾸로 쥐고 있는 혜윤에게 슬쩍 턱짓을 했다. 다시 귀엽게 오물거리라고. 그제야 그녀가 지호에게 꽂힌 눈을 거뒀다.

혜윤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다. 이럴 땐 자신의 눈이 고마웠다. 진짜 울 뻔했단 걸 들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을 때는 아까처럼 적당히 넘어가요. 자연스럽게 건네고, 받아주고.”

“아까 제가 너무 어색하게 굴었죠.”

“네.”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지호를 보며 혜윤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배우라 그런지 모든 상황에서 자연스러운데, 그걸 따라가는 건 앞으로도 벅찰 것이다.


“그래서…… 예뻤어요. 더 놀려주고 싶게.”

 
지호가 덜어낸 샐러드를 건네며 말했다. 처음 봤던 순간부터 늘 입 밖으로 내고 싶었던 말이었다. 예뻤단 말에 걸맞은 따뜻한 시선이 혜윤을 포근히도 바라봤다.


“으으, 지금도 놀리려는 거 알아요.”

 
샐러드를 받자마자 포크로 푹푹 찔러대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지호의 입매에 흐뭇함이 걸렸다.


“작가님은 하고 싶은 말이나 궁금한 거 없어요? 너무 나 혼자만 이래라저래라 한 것 같은데.”

 
그는 제 앞에 놓인 접시를 살짝 옆으로 밀었다. 사실 처음부터 식사는 핑계이기도 했다.


“음…….”

 
샐러드를 못살게 굴던 혜윤의 포크가 멈추고, 그녀는 지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사실 묻고 싶은 말은 많다. 이 작품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는지, 왜 내가 희수로 출연하길 원했는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거짓 열애를 어쩜 그렇게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안고 가는지. 그런데 이제 와서 제일 궁금한 건 하나였다.

원래 사람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지. 그렇게 사랑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눈인데…….”

 
지호는 언제나처럼 쉽게 그녀의 마음을 헤아렸다.


“음…… 실은 아주 많아요. 지호 씨랑 이야기하다 보면 1분마다 한 개씩 늘어나는 기분이에요.”

 
아, 솔직해서 예뻐라. 지호는 그 얼굴을 가만히 음미했다.


“그럼 밤새 여기서 얘기할까요?”

 
혜윤은 보드라운 지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말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이 말만 꼭 하고 넘어가야겠어요.”

“네. 말해요.”

 
창밖에 쌓여가는 낙엽처럼 하고 싶은 말은 넘쳤지만, 제일 하고 싶은 한 마디를 신중히 골랐다.


“고마워요, 지호 씨.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함께 지켜줘서.”

 
혜윤은 의문을 풀기보다 진심을 전하는 쪽을 선택했다. 생각해보니 가장 고마운 그에게 한 번도 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물기 어린 눈이 간절함을 담아 한 사람에게 집중한다. 그 눈에 귀여운 장난기는 있을지언정 티끌만큼의 거짓은 없다.


“아…… 나도 조금 감동인데.”

“진심인 거 알죠?”

“알아요. 괜한 말 하는 여자 아닌 거.”

 
예쁜 말만 하는 여자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지호는 저무는 석양의 아쉬움이 물결치는 눈 안에 혜윤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눈앞의 여자로 인해서.


“지호 씨,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두 달 동안.”

“……그래요.”

 
따뜻한 말을 주고받았음에도 둘 다 마음 한구석이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서운했다. 그래서 더 웃어 보였다. 이번만큼은 누구도 제 진심을 보이지 않았다.


 

***

그리고 열흘 뒤, 첫 촬영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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