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첫 촬영
(13/110)
13. 첫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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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첫 촬영
2022.07.13.
혜윤이 대기실에 도착해 막 교복을 갈아입고 나온 참이었다. 장난스럽게 박수를 치는 민주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던 것도 잠시.
“혜윤이도 이러네…….”
민우가 성큼 걸어오며 뜻 모를 말을 던졌다.
“네? 뭐가요?”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감탄이라기엔 어딘지 곤란하다는 표정이었고, 탄식이라기엔 눈빛이 반짝였으니.
“그게…… 일단 세트장 가서 이야기하자. 지호 씨는 아까 도착했으니까.”
“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지호의 이름 앞에 날아가 버린다. 혜윤은 앞서 걷는 민우의 뒤를 바짝 따르려다 잠시 멈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봤다. 교복을 입은 모습이 아주 어색하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방송국 외부에 있는 세트장은 크진 않았지만 종수네 집 거실, 부엌, 작은방, 큰방 등 여러 가지 구역이 나뉘어 알차게 지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한 달 동안 실내촬영을 한 뒤, 다음 한 달은 부산에서 야외촬영이 진행될 것이다.
“혜윤아, 화장은 안 한 건가?”
“네. 립밤만 발랐어요. 더 해야 하는 건지 몰라서…….”
“응. 잘했어.”
민우가 옆에서 걷는 혜윤을 가볍게 훑었다. 또 조금 전 같은 표정이었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
“저기요, 선배. 혹시…… 너무 실망하셔서 그런 걸까요? 솔직히 말씀해 주셔도 괜찮아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민우는 이번에야말로 명확하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혜윤을 봤다. 그녀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눈이 한껏 휘어지더니 복도 끝에 닫힌 문에 힘을 싣는다.
끼익-
문이 열리자 본격적으로 세트장만 있는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가벽으로 각 방을 나눠 놓은 모습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도, 혜윤의 눈엔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아, 지호 씨. 마침 혜윤이 만나서 같이 왔어요.”
그리고 민우가 저 멀리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뒷모습에 말을 건넸다. 얇은 교복 셔츠 밑에 힘 있게 펴진 넓은 등이 그 인기척에 뒤돌아 혜윤을 바라봤다.
“지호 씨가 일단 제일 큰일인데…… 아무튼 둘 다 문제야.”
“아…….”
혜윤의 작은 입술 새로 놀라움이 튀어나왔다. 자신을 보는 지호의 매끄러운 머리카락, 초연한 눈빛, 느릿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민우가 무엇을 큰일이라고 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저런 외모의 고등학생은 말이 안 된다. 정말 큰일이었다.
지호 역시 혜윤을 올려다보다 낮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눈꼬리에 맺힌 흐뭇함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 역시 혜윤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보통 여고생이 저 정도로 귀엽나?’
간지러운 의문이 들었다. 혜윤의 구석구석, 눈을 두고 싶은 곳은 넘쳐났지만 사람들이 많았기에 다 누릴 순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가을이 한껏 물든 눈.
혜윤이 어색한 기분에 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했다. 그 행동이 부끄러움에서 나온 것이란 걸 이젠 잘 알기에, 그는 눈을 가늘게 휘었다.
“지호 씨, 화장은 안 한 거죠?”
“네.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당연하지. 머리도 빗지 마. 얼굴에 뭐 지저분한 거라도 좀 발라야 하나?”
“뭘 그렇게까지.”
민우가 보통의 남자보다도 큰 키의 지호를 가까이서 올려다봤다. 같은 사람이 맞나 확인하는 것처럼 모난 구석을 찾으려다가 도저히 없었는지 고개를 설설 저었다.
“아무튼 둘 다 최대한 안 꾸미는 걸로.”
“네.”
어딘지 우스운 말을 비장하게 하는 민우 때문에 지호가 실소하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혜윤에게로 내려앉는다.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듯이.
“그런데 작가님은 정말 고등학생 같네요.”
“지호 씨는 정말…… 고등학생 같지 않은데요.”
“진짜? 나 예전에 교복 모델도 했었는데. 그렇게 별로인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는지 지호가 흥미를 보였다. 민우 또한 재미있는 눈치였다. 지난 한 달 동안 대한민국을 흔든 대표 연인들의 사담이었으니 재미있을 만도 했다.
“……이렇게 잘생긴 고등학생이 어디 있어요. 말도 안 돼.”
“아, 그런 뜻으로?”
지호는 이럴 때마다 혜윤이 신기했다. 가끔 지금처럼, 부끄러워하면서도 제 눈을 피하지 않고 자신을 올려다볼 때.
주춤거린다 한들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진심을 고스란히 전해 줄 때.
“지호 씨 학교 다닐 때 엄청 인기 많았겠다. 그렇죠?”
그리고 바로 지금처럼, 순전히 호기심만 가득해서 또랑또랑 빛나는 눈동자를 보일 때에는 이상하게도 갈증이 나는 것 같았다. 지호가 혀로 입술을 훑었다.
“그냥 뭐, 그때도 일할 때라. 신기해서 쳐다보는 건 있었죠.”
“에이, 신기해서 본 거 아닐 거예요. 정말 멋져서 본 거지.”
제법 어른스럽게 미간을 좁힌 혜윤이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보송한 얼굴에서 어렵게 만들어 낸 단호함일 텐데 겨우 저런 말에 써버리다니. 지호는 그마저도 혜윤과 어울리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큭큭. 그러는 작가님은?”
“저야 딱 봐도 평범해 보이잖아요. 학생 때도 당연히 그랬죠.”
“어딜 딱 봐야…… 평범해 보이지?”
“네?”
하지만 지호의 단호함이란 굳이 어딘가에 힘을 실을 필요가 없었다. 눈꺼풀이 한번 깜박거리는 찰나만으로 그의 눈빛이 단숨에 깊어진다. 입가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미소 속에서도 그녀를 보는 눈은 끝없이 진지했다.
따스한 의문이 오가는 눈길, 그리고 조용히 지켜보던 한 사람.
“둘이…… 지금 뭐 하는 거야? 시작부터 염장 질러?”
결국 민우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배, 그게 아니라…….”
“지호 씨, 작가님이라고는 왜 불러요. 원래 하던 대로 이름 불러도 돼.”
민우는 이쯤 되니 작가님이라는 호칭마저 가식적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민우가 둘을 번갈아 흘기자 혜윤이 두 사람 몫의 당황스러움을 혼자 표현했다.
“아니에요! 절대! 그러면 안 돼요.”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 그가 제 이름을 불렀을 때 얼마나 심장이 뛰었는지를 생각하면 이런 반응이 과한 것만은 아니다. 혜윤은 주먹을 꼭 쥐고 민우를 노려봤다.
“뭘 그렇게까지 무섭게 말하냐.”
같은 사람을 두고 민우는 묘하다는 표정으로, 지호는 이유를 안다는 듯 즐거운 표정으로 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을 보인 민우에게 지호가 자연스럽게 말을 더했다.
“작가님 말이 맞아요. 일은 일이니까요.”
“말만 그러면 뭐 해요. 둘 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그런가…….”
민우의 투덜거림에 지호와 혜윤의 시선이 얽혔다. 천연덕스럽게 한쪽 눈썹을 실긋 기울이며 혜윤을 보는데, 그녀의 눈에 억울함이 넘칠 것처럼 그득해 보여 웃음이 났다.
말할 수 있는 입은 놔두고 말 못 하는 눈, 미간, 코, 턱들이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런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기폭제인 걸 이 아이 같은 여자는 당연히 모르는 것 같아서 문제지만.
“배려해 주신 마음만 받을게요. 촬영장에서 혜윤이 지위도 있으니까요.”
역시나 저런 표정은 몇 번을 봐도 질릴 틈이 없다.
지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혜윤이 아랫입술을 톡 내밀었다. 그 모습에 지호도 슬쩍 고개를 숙이고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다잡는다. 둘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민우만 제일 씁쓸한 순간이었다.
“감독님, 촬영 준비 다 됐습니다.”
“그래?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요?”
솜털같이 가벼웠던 셋의 공간에 조연출의 말 한마디가 물처럼 스몄다. 젖은 솜처럼 조금씩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이곳에 함께 모인 이유를 증명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첫 촬영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었다.
<씬 7. 종수네 집 현관. 거실.
종수. 집에 돌아와 현관에 놓인 희수 신발 바라보는. 희수에게 시선 옮기는.
희수. 소파에서 일어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종수 바라보는.>
대본에 적힌 간단한 장면 설명은 이게 전부였다. 단 세 줄의 문장을 세 시간 이상의 여운이 가도록 표현하는 건 온전히 지호와 혜윤의 몫이었다.
“이야, 투 샷 너무 좋다. 미쳤네, 아주.”
리허설 중인 둘의 모습이 카메라 모니터에 담기자 조연출이 민우의 옆에서 작게 말했다. 말을 하는 건지 감격을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 둘이 조금만 꼬질꼬질했으면 싶기도 한데.”
“저게 기본값인 걸 어떻게 해요. 그건 포기해. 시청자들이 알아서 필터 끼고 봐주겠지.”
“지호 씨는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큭큭. 감독님은 지호 씨 볼 때마다 이러시더라? 익숙해져야지.”
이미 몇 해 전 작품을 함께 해놓고도, 민우는 지호의 얼굴에 영 적응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 종수가 현관문 열고 들어오면 희수가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서로 딱 쳐다보는 거!”
“네.”
민우가 큰 목청으로 이번 촬영 장면에 대해 설명했다. 혜윤은 촬영이 시작되면 자신도 희수로 불리게 된다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하아…….”
주위가 고요해지자 작은 몸 안에 갇혀 있던 여린 떨림이 새어 나왔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하죠?”
“네? 어떤…… 말이요?”
그런 그녀를 곁눈으로 본 지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혜윤의 두근대는 마음을 달랬다. 지호를 올려다보는 눈이 긴장감으로 부드럽게 물결쳤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던.”
“아…….”
“뭐든 받아줄 테니까.”
고개를 까딱 숙이며 저를 내려보는 지호의 눈이, 집요하게 자기를 쳐다보라고 외치고 있다.
제 마음을 읽으라고. 믿으라고.
혜윤은 그 기운에 압도된 사람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지호가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웃자 그제야 그녀도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 무언의 속삭임을 끝으로 지호는 현관 밖으로, 혜윤은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레디…… 액션!”
민우의 신호와 함께 혜윤은 종수의 집이 낯설고, 아닌 척해도 주눅 들어 있는 희수를 연기했다. 그게 며칠 동안 혜윤이 분석한 희수였다.
그리고 그 기조를 유지하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지호를 볼 수 있었다.
순간 혜윤은 교복 치마 밑 종아리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뱃일로 일주일에 두어 번쯤 오는 아빠를 기다리는 종수가, 아빠와 단둘이 사는 집이 비는 날들이면 학교에서 시간을 때우다 늦게 돌아오는 종수가, 그곳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종수 왔구나. 둘 다 뭘 그렇게 서 있어. 가족끼리. 희수 누나 알지? 누나 기숙사 들어가기 전까지 당분간 같이 지낼 거야. 아빠 없을 때도 누나 잘 챙겨주고. 말 잘 듣고.”
“안 그러셔도 돼요, 삼촌.”
“아니야. 저놈 숫기가 없어서 그렇지 순해.”
“아빠, 알았으니까…… 그만하라고.”
아빠의 말에 희수를 힐끔 쳐다보고는 차오르는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는 얼굴까지. 그 공간 안에 지호는 없었다.
“컷! 좋아요. 다음 씬 넘어갈게요.”
물론 컷 소리와 함께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 땐, 언제나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지호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