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짧은 답장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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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짧은 답장의 의미
2022.07.17.
이어지는 촬영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모든 게 처음인 혜윤이었지만, 그 옆에서 모든 걸 챙겨주려는 지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 서 있는 게 좋겠어요. 아직 둘이 서먹하니까.”
“네.”
잠든 갓난아기의 머리를 감싸듯 조심스럽게 제 손목을 잡았다 놓아주는 그의 손가락, 반걸음쯤 옆에서 오직 한 사람만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 촬영 내내 지호가 보여준 모습이다.
‘스탭들이 모여서 하는 말이 뭔 줄 알아? 장혜윤이 생각보다 너무 잘한대. 동선이며 시선 처리며.’
점심시간에 민주가 해 준 말이 다시금 혜윤의 머릿속을 스쳤다. 지호의 잠잠한 배려를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봤다.
배려하는 방식 또한 배려가 넘치는 이 남자는, 대체 얼마나 큰 바다를 가슴에 품고 사는 걸까.
“내가 여기서 우물쭈물할 거니까 털털한 말투로 해도 좋을 것 같은데.”
“네. 해볼게요.”
남자들만 사는 집이었으니 여자인 희수의 눈에 여기저기 허술한 게 보였을 것이다.
세탁기 앞에서 엉망인 빨랫감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희수에겐 누군가에게 해보는 첫 잔소리였고, 종수 역시 처음 받아보는 생소한 관심. 어쩌면 듣고 싶었을 잔소리.
“어쩐지…… 여기 다 있잖아. 앞으론 섬유유연제도 꼭 넣어. 빨래도 널기 전에 탁탁 털어서 널고.”
“……네.”
혜윤이 다용도실 세트장에 놓인 세제 통을 들여다보다 작은 대답에 홱 뒤돌아 그를 바라봤다. 조금은 불만이 섞인 눈으로.
“너 대답만 잘하는 거 아니지? 믿는다?”
“큭큭. 네.”
“……응? 여기서 종수가 웃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호흡을 잘 맞춰주던 지호가 예상치 못한 웃음소리를 냈다. 혜윤은 불만이 섞인 눈가를 스르르 풀고 의아함을 건넸다. 지호가 입술을 맞물며 웃음을 삼켰다.
“미안해요. 갑자기 웃음이 나서.”
“왜요?”
혜윤이 고개를 까딱이며 그를 올려봤다. 목을 가다듬으면서도 여전히 눈가가 시원스레 휘어 있었다.
“그렇게 귀엽게 말해서 종수가 알아듣겠어요?”
문득 혜윤은 촬영 시작 전 민우의 말이 떠올랐다.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지금 지호를 보며 절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두 뺨 위로 발그레한 꽃물이 드는 건 한순간이었다.
오늘 온종일 함께 지냈으면서 이제 와서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와 함께일 땐 감정의 순서조차도 엉터리였다. 대뜸 눈치 없는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아 오히려 더 힘을 줘 대답했다.
“에이, 나 지금 엄청 단호한 누나 느낌으로 말했는데?”
“단호하다는 뜻이 나 모르게 바뀌었나?”
그 어색한 말투에 지호가 조금 더 온기를 더해 그녀를 바라봤다. 저런 게 희수의 단호함이라면, 종수는 아마 평생 집안일을 엉망으로 해놨을 것이다. 그래야 계속 혼날 수 있을 테니까.
“이 씬 끝나면 작가님은 퇴근이겠네요.”
지호는 덮은 대본을 살짝 말아 쥐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자의 위치에 흩어져 제 일에만 집중하다 보니, 카메라 밖은 조용하면서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네. 지호 씨는 많이 늦게 끝나요?”
“많이는 아니고.”
제 몫을 다 하고 가는 건데 뭐 저리 미안하게 바라보는지. 지호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항상 늦게 끝나는 건…… 아니죠?”
“뭐, 거의. 그런데 제 상황 봐주느라 다들 고생하시는 거니까요. 감사히 생각하고 한 컷에 가도록 해야죠.”
지호는 계획에 없던 <23센티미터> 출연으로 인해, 연말까지 두 달가량의 스케줄이 꼬여버린 상황이었다.
그나마 방송사 측은 그의 출연 자체가 황송한 입장이라 최대한 일정을 맞춰 주었다. 촬영 일수를 줄여주는 대신 하루의 촬영 양은 늘어났지만.
“영화 홍보 때문에 바쁜가 봐요.”
“일단은요. 이달 말에 개봉이니까 슬슬 준비해야 해서.”
지호가 말아 쥔 대본으로 어깨를 툭툭 치며 반걸음쯤 혜윤의 옆으로 다가갔다. 닿을 듯 닿지 않은 거리에서 혜윤의 향이 났다. 조금 뒤, 혼자 남겨질 때를 대비하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폐부에 감동이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영화 개봉하면 꼭 보러 갈게요.”
“……같이 보는 건 싫고?”
장난스럽게 툭 던진 말에 혜윤이 잔뜩 커진 눈으로 지호를 올려봤다. 곧 서둘러 고개를 낮추었지만, 그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기에 예쁜 얼굴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었다.
“……좋아요.”
부끄러워해도, 매번 솔직함이 그걸 이겨내서 더 예쁘다는 걸 본인은 모르겠지.
“그래요. 그때 시간 맞으면.”
어느덧 촬영 준비가 끝나고 둘을 주시하는 눈들이 많아지자 지호가 부드럽게 대화를 멈췄다.
“자, 촬영 다시 들어갈게요!”
그리고 아침보다 조금 가라앉은 스태프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걸음을 뒤로 물렀다. 다가설 땐 몰랐는데 떨어지려니 발이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
“진짜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고생했어, 혜윤아.”
“기다리느라 네가 더 고생했지.”
창밖은 오늘 새벽 풍경과 흡사했다. 저녁의 끝에서 밤으로 넘어가려는 하늘이 더욱더 캄캄해지고 있었다.
“고생이라니. 이렇게 운전이라도 해야 도와준 느낌이 날 것 같아. 너무 수다만 떨다 온 것 같아서.”
“대기하는 동안 괜찮았어?”
“완전!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재밌었어.”
혜윤은 늦은 시간임에도 들뜬 목소리의 민주가 다행스러웠다. 입 안에 웃음을 숨겨둔 사람처럼 입꼬리를 씰룩이며 운전하는 모습에 자신도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내일 봐요.’
하지만 진짜 웃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지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처럼 되울려왔기에. 내일 보자는 말이 이렇게 설렐 일인가 싶다가도, 그게 지호라면 설렐 일이 맞지 싶었다.
지호와 내일도 볼 수 있는 사이, 내일도 봐야 하는 사이. 일이라고 달래보아도 마음속에선 커다란 막대사탕을 선물 받은 아이가 행복한지 콩콩 뛰어다니고 있었다.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아?”
“응? 뭐라고 했어?”
혜윤은 콩콩대는 아이를 겨우 붙잡고는 민주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실실 웃어? 누구? 안지호?”
“에이…… 갑자기 지호 씨가 왜 나와.”
진실을 숨기려 들자 글자들이 저마다 이상한 음을 탔다. 당황한 눈이 어색하게 창문으로 향했다. 창에 비치는 얼굴처럼, 혹시 제 머리도 투명해서 생각이 비치나 싶은 황당한 상상이 돋아났다.
“이렇게 티 나게 속이려 들다니.”
“아니, 그냥…… 상대 배우잖아. 그래서 잠깐 생각이 났어.”
강하게 부정해봤자 어차피 들킨 것 같았다. 손가락이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돌돌 꼬았다.
“하긴. 그런 조각이랑 종일 붙어 있었는데 여운이 없으면 그것도 이상한 거지. 그렇지?”
질문 같지만 동의 따위는 중요치 않았는지 민주는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안지호 진짜…… 잘생긴 게 아니라 미쳤더라. 얼굴이며 몸매며.”
“……그러게.”
“어떤 느낌이냐면 내가 이제 집에 가서 안지호 봤다고 자랑을 할 거란 말이지? 근데 이게 설명이 안 돼. 내가 본 이 느낌이! 나 뼛속까지 문과 감성이잖아. 알지? 그런데 표현할 방법이 없다. 하아…….”
“큭큭. 난리 났네 아주.”
“언어로 담지 못할 미모라는 게 정말 있구나.”
핸들을 손바닥으로 탕탕 쳐가며 말하는 모습에 혜윤이 피식 웃었다. 재미난 표현이었어도 공감이 갔기 때문에 고개가 조금 끄덕여지기도 했다.
“누려, 혜윤아.”
“뭘?”
“이 전략적 연애 관계 말이야. 온 세상 여자들이 다 부러워하잖아. 그런 경험 한 번쯤 있어도 좋지. 뭐…… 결국에 끝난다고 해도.”
“……응.”
신나게 말하던 민주의 목소리에서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혜윤의 목소리도 아주 작아져 있었다. 뭐든 끝이라는 단어가 주는 감성은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지호 씨, 장혜윤이에요.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그럼 첫 촬영일에 봐요. (오후 8:12)]
[네. 그날 봐요. (오후 11:48)]
혜윤은 지호와 주고받은 유일한 메시지를 조금은 애타는 눈으로 바라봤다. 열흘 전, 의상실에서 만나 함께 저녁을 먹은 날 주고받은 메시지였다.
‘우리 서로 연락처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나.’
‘아…….’
‘불편한 거면 굳이 안 그래도 돼요.’
‘아니요. 불편하긴요.’
집 앞에 정차한 그의 차 안에서 혜윤은 잠시 망설였다. 봉기의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절하기엔 봉기를 향한 미안함보단 지호를 향한 마음이 더 컸다.
결국 마음이 시키는 대로 번호를 교환했지만, 그녀는 그 잠깐의 망설임을 지호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을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뭐 해? 메시지?”
“……응. 오늘 너무 도움을 많이 받아서.”
“안지호 연락처가 저장된 핸드폰이라…… 완전 부적 같겠다. 가지고만 있어도 든든하고.”
혜윤은 문장 몇 개를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길 반복했다. 너무 집중한 탓에 민주의 농담에 작은 웃음도 건네지 못했다.
[아직 촬영 중이겠네요. 오늘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요. 내일 봐요. (오후 7:25)]
마음을 전하듯 꾸욱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덩그러니 주고받은 두 개의 메시지 밑에 노란색 말풍선이 하나 더 늘어난다. 답장을 바라는 모습이 꼭 봄을 기다리는 개나리꽃 같았다.
***
“지호야, 피곤할 텐데 눈 감고 있어. 차 안 막히니까 금방 가.”
“응.”
그의 촬영은 자정이 넘어서 끝이 났다. 지호는 차에 타서야 몸을 늘어뜨렸다. 자신 때문에 늦게까지 고생하는 스태프들이 있으니 피곤함을 느끼는 것조차 건방진 것 같았다.
육체든 정신이든, 참는 건 도가 텄기에 어려울 건 없었다.
눈을 감으려다 옆자리에 놓인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관심도 없었을 텐데.
[아직 촬영 중이겠네요. 오늘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요. 내일 봐요. (오후 7:25)]
‘그래. 평소 같았으면 참는 건 도가 텄는데…….’
짐작하건대 참을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피곤한 눈이 쉽게 감기질 않고 메시지를 한참 들여다봤다.
‘불편한 거면 굳이 안 그래도 돼요.’
‘아니요. 불편하긴요.’
그리고 번호를 주던 아주 잠깐, 불안함에 흔들리던 혜윤의 눈빛이 글자 사이사이를 칼바람처럼 할퀴었다.
혜윤은 봄을 기다리듯 메시지를 보냈지만 지호 역시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읽은 그녀의 불안함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을 달랠 방법으로 답을 할 수밖에.
괜한 연락은 않겠다는 식의 짧은 답장을 주는 것이 그것이었다.
[네. 잘 자요. (오전 0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