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서로의 존재를 찾아낸 순간
(15/110)
15. 서로의 존재를 찾아낸 순간
(15/110)
15. 서로의 존재를 찾아낸 순간
2022.07.20.
불 꺼진 방, 침대 위의 뒤척임이 지호의 메시지로 멈추었다. 짧은 한 문장이 혜윤의 방만 밝힌 건 아니었다.
“나 아직 안 자는데…….”
마음보다 앞선 손가락이 ‘이제 끝났어요?’라고 빠르게 글자를 적었지만 차마 전송까지는 누르지 못했다. 다음 말을 이을 수 없게 만드는 답장 같아서.
“네…… 지호 씨도 잘 자요.”
전하지 못한 마음이 그냥 사라지긴 아쉬웠는지 혼잣말처럼 흘러나왔다.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됐지만 조금 서운했다. 핸드폰 화면이 꺼지자 다시 혜윤의 방도 어두워졌다. 그녀의 마음처럼.
***
며칠의 촬영이 계속됐다. 그 며칠 동안 혜윤은 조금씩 이곳에 적응했고 지호는 조금씩 얼굴에 피곤함이 비쳤다.
다음은 지호의 개인 촬영 장면. 혜윤이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민우에게 쭈뼛쭈뼛 다가섰다.
“선배, 그런데 지호 씨는 저보다 스탠바이 시간이 빨라요?”
“아니? 똑같지.”
두 사람 모두 카메라 모니터 속에서 움직이는 지호를 봤다.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한들 그의 아우라까진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건 왜?”
“항상 저보다 먼저 와 있는 것 같아서요.”
“응. 그건 지호 씨 원래 작업 스타일이 그런 것 같더라고. 거의 7시쯤 온다는 것 같던데. 넌 8시까지 오지?”
“……네.”
“나도 그래.”
민우가 웃으며 카메라 화면 속 지호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혜윤을 위한 배려인 양. 아우라뿐만 아니라 미세한 피곤함도 담기진 않은 것 같아 그건 다행스러웠다. 아니, 피곤해 보였으면 또 그것대로 매력 있었겠지만.
“세상 바쁜 사람이 저러는 거 보면 대단해. 물론 우리야 좋지. NG 내는 걸 거의 못 봤으니까. 자기 성에 안 차서 다시 가자고 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러게요. 피곤할 텐데…….”
“응. 완벽주의야. 그런데…… 남자친구로는 괜찮고?”
“네?”
혜윤은 화면을 가득 채운 지호를 바라보다 급히 민우에게 고개를 낮췄다. 낮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보는 표정이 그리 장난스럽지만은 않다.
“원래 본인한테 엄격하면 타인한테도 그렇잖아. 사람 본성이 어디 가? 누른다고 해도 예민해지면 튀어나오는 법이니까.”
“음…… 엄청 너그러워요. 다른 사람들 챙기듯이 다정하고요.”
혜윤은 대답에 뜸을 들였다. 다시 돌이켜본 지호의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제 맘을 살랑거리게 했기에, 떠오르는 마음을 눌러야 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는 제게 빈틈없이 다정했다.
“……누가 그래?”
“네? 뭐가요?”
그렇지만 그녀의 대답이 끝나자 도리어 민우가 반문을 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생각해보라는 듯이.
“지호 씨가 사람들 잘 챙기고 다정하다고 누가 그러냐고.”
“그냥 항상 보면 그랬던 것 같은데…….”
조금은 무정한 말투에 순간 혜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당황스러움이 민우에게도 보였는지 그가 표정을 유하게 풀었다.
“뭐, 지호 씨 예의 바르고 친절하지. 그런데 딱 거기까지잖아. 그 이상 절대 마음 쓰지 않아. 남이 마음 쓰는 것도 못 하게 하고. 벽 있는 거 못 느꼈어?”
“…….”
“이 바닥에서, 그것도 십 년 내리 탑티어가 작은 스캔들 하나 없으려면 방법은 딱 하나잖냐. 벽 높이 쌓아두고 그 안에서 혼자 사는 거.”
모니터의 클로즈업을 푼 민우가 완전히 본래의 웃음기 짙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생각에 치여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혜윤을 보며, 그가 고개를 한껏 치켜들었다.
“아무튼 다행이네. 네 말대로라면 지호 씨가 너만 챙기고 너한테만 다정했다는 거니까.”
“……그런가요.”
“응.”
이거야말로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눈꼴사납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늘어뜨리는 모습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혜윤은 모니터 밖에 서 있는 진짜 지호를 바라봤다. 이런 말까지 들은 이상, 단지 연인인 척 연기하기 위해 그랬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기 어려웠다.
‘설마…….’
작은 기대감이 자라날까 무서웠다.
***
“그만 먹어야겠다.”
“응? 아직 반밖에 안 먹었는데?”
점심시간. 먹음직스러운 도시락에 밥과 반찬이 절반은 넘게 남아 있었다. 민주는 수저를 내려놓는 혜윤을 향해 걱정을 보였다. 먹는 속도는 느려도 늘 주어진 식사는 깨끗하게 비우는 혜윤이었기에 더 눈이 갔다.
“응. 많이 먹으면 촬영할 때 부담되더라고.”
“컨디션 안 좋아서 그런 건 아니지?”
“그럼 그럼. 적당히 배불러서 기분도 좋아.”
혜윤이 젓가락질을 멈춘 민주의 손을 톡톡 건드렸다. 다시 움직이는 손을 확인한 뒤에야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도시락을 먹는 모습들. 아마 테라스가 아닌 대기실도, 세트장 건물 뒤편도 비슷하겠지 싶었다.
“민주야, 나 먼저 들어가서 대본 좀 볼게.”
“응. 나도 먹고 금방 갈게.”
“아니야. 천천히 와. 꼭꼭 씹어 먹고 산책도 하고.”
교복 치마를 살포시 턴 혜윤이 착한 아이를 바라보듯 민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혜윤은 대본을 들고 세트장으로 향했다. 대기실 역시 식사 장소로 사용되는 것 같았고, 차로 가자니 조금 답답했다.
끼익-
무거운 문이 힘겹게 열리자 적막이 감돈다. 모두가 떠나 텅 빈 세트장.
“……어?”
그리고 그곳에 오직 한 사람.
몇 안 켜둔 조명으로 빛과 어둠의 경계에 놓인 세트장에 지호가 있었다. 혜윤의 인기척을 아직 못 들었는지 여전히 거실 세트장 소파에 기대앉아 대본을 보는 데 열중이었다.
살짝 벌어진 셔츠 옷깃 밑으로 느슨하게 풀어둔 타이. 펜을 돌리는 긴 손가락이 부드러운 선율을 타는 것처럼 우아해 보였다. 꼬아놓은 긴 다리 끝에 발끝이 느릿느릿 까딱까딱.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발을 뗐다. 안 그러면 계속 볼 것 같아서. 다가오는 음영에 비로소 지호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등장임에도 크게 놀란 기색이 없어 보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음…… 뭐지?”
하지만 얼굴에 어른대는 차분한 빛과는 달리 말투는 장난스럽게 놀란 척을 하고 있었다.
“아, 그게…… 대기실로 가려다가…… 차로 갈까 생각도 했는데…….”
“큭큭. 장난인 거 알면서 힘 빼지 마요.”
혜윤이 어설픈 문장들로 우물거리자 지호가 그녀의 노력을 달랬다. 정말 장난인 걸 다 알고 있었음에도 또 이렇게 대답에 열심이었다. 쑥스럽게 움직이는 고개를 그가 흡족하게 지켜보았다.
“밥은 먹었어요?”
“……네.”
“생각보다 체력 소모도 큰 일이니까 잘 챙겨 먹어요.”
숲처럼 고요한 공간에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 은연히 번지는 미소. 혜윤은 입술을 꼭 모아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입술 새로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새어나갈 것 같았다.
‘……누가 그래?’
‘네? 뭐가요?’
‘지호 씨가 사람들 잘 챙기고 다정하다고 누가 그러냐고.’
그랬기에 민우의 말들이 다시 그녀를 괴롭히는 건 당연했다.
복잡한 혜윤의 머릿속을 알 리 없는 지호가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며 눈짓했다. 머무적머무적하는 그녀의 작은 발이 길 잃은 아기 오리 같아, 지호는 살짝 웃었다.
“와…… 지호 씨, 이렇게까지 해요?”
그러나 머뭇거렸던 발걸음과는 다르게, 가까이 지호의 대본이 보이자 그녀가 단번에 다가선다. 대본의 여백마다 글씨가 빼곡해 보였다. 지문과 대사 밑에 자신의 감정이나 동선들을 적어둔 것이었다.
그 노력에 놀라 많은 것들을 잠시 모른 체할 수 있었다. 제 호기심의 크기처럼 바짝 다가선 탓에 맞붙을 듯 가까워진 무릎도, 자신을 올려다보는 깊은 못 같은 그의 눈빛도.
“좋은 글 써줬는데 이쪽도 노력해야죠.”
“그래도 이건 너무…… 너무 굉장한데요.”
“다들 이 정도는 해요.”
“아니에요. 누구도 이 정도는 안 해요.”
대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무안한 모양이었다. 지호가 자연스럽게 펜을 대본 사이에 꽂은 뒤 접었다. 혜윤은 더 보고 싶었는지 대본이 접히는 마지막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흐음…… 저 많이 반성해야 할 것 같아요.”
“응? 갑자기?”
호기심이 보글보글 끓더니만 혜윤은 금방 시무룩해져 고개를 푹 숙였다. 지호가 그런 그녀를 지긋이 바라봤다.
“지호 씨는 종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희수한테 너무 미안해졌어요.”
“그랬어요…….”
또한 풀 죽은 혜윤이 더 칭얼거리도록 추임새를 보태기도 했다. 못됐단 걸 알아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여자에 한해서라면 반듯한 생각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지호의 눈에 애정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종수가 왜 희수를 사랑하게 됐는지 보는 사람들도 확 느낄 수 있게 표현하고 싶은데…… 욕심만큼 실력도 없고요. 노력도 부족하고요.”
작은 턱에 뽈록뽈록 우울함이 돋아난 것 같았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미 다 표현됐으니까.”
“……저 기죽지 말라고 그러는 거 알아요.”
“음, 진짠데.”
지호는 교차시킨 다리를 풀었다.
“작가님은 마지막에 희수가 기숙사로 떠나고, 현관에서 사라진 희수의 신발을 생각하다가 종수가 울었다고 했잖아요.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런데 저는 그 반대예요.”
진중한 목소리에 고집이 느껴졌다. 혜윤은 지호를 봤다. 무엇이든 믿고 싶게 만드는 남자에게 고이 눈을 내렸다.
“종수는…… 희수가 집에 온 첫날부터 사랑했을 거예요. 현관에 놓인 희수의 230mm 운동화를 본 그 첫날, 첫 순간부터.”
“……첫눈에요?”
그가 덮어둔 대본을 소파 옆자리에 내려놓는다. 마치, 지금부터는 <23센티미터>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처럼.
“네. 잘해 줘서도 아니고, 서서히 정이 들어서도 아니고.”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붙을 듯 가까웠던 무릎을 이제야 알았는지 혜윤이 급히 뒷걸음질 쳤다. 두 발이 멈추자 언제나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호를 볼 수 있었다.
지호는 잠시 고민했다. 진심을 전하려면 어떤 방법이 제일 좋을까. 눈빛과 말로도 부족하다 느껴질 땐 서로의 체온이 닿는 게 제일일지 모른다고.
“멀리서 이렇게…… 딱.”
그가 길게 뻗은 두 손으로 혜윤의 양쪽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따뜻한 말캉함이 손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 마음을 전하려 했건만, 배로 받은 기분이었다.
“서로의 존재를 찾아낸 순간.”
“…….”
“사랑한 거죠.”
텅 빈 세트장에서 둘의 시선이 얽힌다. 서로의 눈 속엔, 오직 자신의 얼굴만 가득 차 투명하게 여울치고 있었다.
혜윤은 세차게 뛰는 가슴을 참아내면서도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 다정함의 진짜 주인을 찾고 싶었다. 종수인지, 가짜 연인인 척하는 배우 안지호인지.
아니면 정말 남자 안지호인지.
작은 기대감은 벌써 싹을 틔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