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그에 관한 소문 (16/110)


16. 그에 관한 소문
2022.07.24.


영원 같은 몇 초가 흘렀다. 그 끝에 먼저 눈을 돌린 건 지호였다. 혜윤은 본인도 모르게 그의 자제력을 끊어놓고 있었다. 단지 여린 눈빛 하나로.

맑고 깨끗한 연갈색의 눈. 자신이 어떤 생각들을 외면하려 시선을 피한 줄 안다면, 그래도 지금 같은 눈으로 바라봐줄까. 지호는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뭐, 당연하잖아요. 꼭 말이 필요한가?”

“뭐, 뭐가요?”

 
혜윤 역시 떨리는 마음을 꼭 쥐고 그의 시선을 받아냈지만 짧은 한마디도 매끄럽게 나오질 않았다. 그의 속내를 모르니, 다시 평정을 찾고 웃는 지호에게 샘이 날 정도였다.


“당연히 첫눈에 좋아했겠죠.”

 
혜윤의 어깨를 쥐었던 그의 큰 손이 스르륵 멀어졌다. 하지만 떨어져 나간 온기에 어깨 끝을 살짝 움츠리는 것도 잠시였다.


“누가 봐도 작고 귀여우니까.”

 
어느 틈에 지호의 한 손이 혜윤의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문지르는 느낌이 마치 제 머릿속의 이성을 다 지워내는 것 같았다.


 


“내가 이 말, 전에도 했었는데…… 하나도 기억 못하나 보네.”

 
쓰다듬던 손은 소리도 없이 바지 주머니로 사라졌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었다.

혜윤은 그를 더 보고 싶었지만 고개를 숙였다. 두 뺨이 붉어지는 게 생생히 느껴지기도 했고, 지호도 생각을 읽는 쪽으로는 상당히 고수라는 걸 이젠 잘 알기에.

그날 저녁,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그가 읽을 것 같아서.


‘처음 봤을 때부터…… 내가 귀엽다고 생각했죠?’


‘네.’

 
지호는 숙여진 머리 밑에 교복 치마를 꼭 쥐고 있는 작은 손을 봤다. 모든 게 작은 여자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감정은,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벅차다.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음, 아닌가. 기억을 하는 건가?”

 
그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눕혀 그녀를 살피려 들자 혜윤이 서둘러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기억하는 것도 맞고, 부끄러운 것도 맞고. 뭐든 다 맞으니 그만해달라고.

지호의 수려한 얼굴에 행복이 물들었다.


“그렇구나…… 항상 잊지 마요. 진심이니까.”

“…….”

“그때처럼 잘하던 거 해야죠? 대답.”

“……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요. 저 얼굴 엄청 빨개져서 고개도 못 들겠어요.”

“큭큭. 그래요, 여기까지.”

 
주머니에 가둬놓은 손이 다시금 그녀의 동그란 머리로 가려는 걸 겨우 참았다. 참기 힘든 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부터 늘어나고 있었다.


“저기…… 두 분, 저희 이제 들어가도 될까요? 점심시간도 끝나서.”

 
멀리서 주저하는 목소리에 지호가 곧게 관심을 옮겼다. 스태프들 여럿이 이미 들어와 두 사람을 지켜본 눈치였다.


“아, 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지호는 동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혜윤은 넌지시 그를 올려봤다. 스태프들을 향하는 그의 눈과 행동엔 예의가 배어 있었지만 어딘지 낯설었다.

민우가 말하는 벽이 뭔지, 그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 선을 넘지 않는 친절. 혜윤에게는 보인 적이 없으니 낯설 수밖에.


“작가님은 촬영 들어가기 전에 친구분 만나고 와야 할 것 같은데.”

“……얼굴이 너무 빨갛죠.”

 
다가오는 스태프들에게 거둬들인 시선을 몽땅 혜윤에게 쏟자 그녀가 다시 고개를 폭 숙였다. 지호의 입장에서야, 어차피 공개적으로 연인인 줄 아는 터라 굳이 눈이 가는 걸 숨길 필요는 없었다.

물론, 마음이 가는 것도.


“조금요. 나는 좋은데 괜히 오해 살 수도 있으니까.”

“오해요?”

“응. 둘이 대화만 했다고 생각들 안 할까 봐.”

 
입술을 실긋거리며 웃는 저 여유를 반만 흉내 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혜윤은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뒤섞인 마음에 조금 어지러웠다. 괜한 심통에 지호를 힘껏 째려보았다.


“큭큭. 알았으니까 얼른 대기실 다녀와요. 진짜 여기까지.”

“언젠가 꼭…… 복수할 거예요.”

 
볼록 튀어나온 입술을 하고는, 몇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혜윤의 눈은 여전히 지호에게 있었다. 그 시선이 따끔하고 따뜻해 지호 역시 미소를 참지 못했다.

***



“김 PD님이 신입 아나운서랑 뭐 있다나 봐.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건 아닌데 금방 그럴 것 같은 분위기?”

“우와, 그런 건 어디서 들었어?”

“어디서 듣긴. 촬영장에서 들었지. 너 일하는 동안 내가 미안할 정도로 재밌게 보내고 있다니까?”

 
촬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민주는 오늘도 일터가 꽤나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어김없이 지호보다 먼저 퇴근한다는 게 미안한 혜윤이지만, 잠시나마 그 마음을 잊을 수 있었다.


“너 PD님이랑 친하잖아. 그런 낌새 못 느꼈어?”

“글쎄…… 그냥 요즘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인다는 건 있었어.”

“그렇지? 역시 연애만큼 사람 행복하게 만드는 게 어딨어.”

 
혜윤도 동의의 눈짓을 보냈다. 어두운 하늘과 라디오에서 나오는 잔잔한 음악이 몸을 이완시키는 저녁. 미뤄놨던 피로가 눈꺼풀을 누르는 느낌이었다.


“혜윤아, 그리고 내가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응…….”

 
민주는 제 옆자리에 긴장이 풀린 혜윤을 빠르게 훑었다. 노곤한지 대답에 졸음이 섞여 있었다.


“……안지호 연기하는 거 보고 괜히 착각하고 그러지 말라고.”

“어?!”

 
혜윤은 전기가 통한 사람처럼 소스라치며 민주를 바라봤다. 잠이 확 달아났다.


“아니, 벌써부터 안지호 연기할 때 보면 너 좋아하는 느낌이 나더라고. 아, 너 말고 희수.”

 
너무 티 나게 놀랐나 싶어 괜히 눈치가 보였지만, 다행히 민주는 운전에 열중이었다.


“연기랑 현실이랑 착각해서 나중에 맘고생 할까 봐 그러는 거야. 더군다나 카메라 밖에서도 연기를 하고 있으니까.”

“에이, 안 그래…….”

 
부정했지만 혜윤은 속이 뜨끔했다.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다가 머리를 만지는 척, 이마를 가렸다. 혹시 자신의 머리도 투명해서 생각이 비치나 싶었던, 며칠 전의 엉뚱한 상상이 떠올랐기에.

아니라기엔 민주가 너무 정곡을 찔렀으니.


“아니면 다행이고. 안지호 전 여자친구가 채재희랑 전지나래. 어떤 취향인지 감 오지?”

“아…….”

“완전 자기 같은 사람들만 만난 거잖아. 절세미인들.”

 
그리고 민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힘이 풀린 손을 떨어뜨렸다. 작은 입에서 탄식 같은 알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왔다.

채재희, 전지나라면 한 해에 광고로만 몇십억을 번다는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들이었다. 더군다나 전지나는 모델 출신이기에 혜윤이 늘 부러워했던 키 크고, 몸매 좋은 배우였고.

다리 위로 털썩 내려진 손이 주인을 따라 기분이 안 좋아진 모양이다. 손톱을 세워 가만있는 허벅지를 집요하게 꼬집었다.


“그런 건 누가 말해 주는 건데. 다들 확실한 것도 아니면서…….”

“누구긴. 오늘 여자 스탭들 말하는 거 슬쩍 껴서 듣고 왔지. 채재희랑 만난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데? 안지호 전에 영화 찍을 때 채재희가 매일 촬영장에 와서 기다리고…… 그래서 소문 쫙 난 거래.”

 
혜윤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리고 전지나는…… 아, 그런데 나 이렇게 막 말해도 되나?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친구 남자친구라니까 신경 쓰이네.”

“응. 말해도 돼.”

 
말투에 감정이 보일까 싶어 혜윤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막힘없는 민주의 대답이 매끄럽게 이어진다.


“응. 전지나랑은 둘이 드라마도 찍었었잖아. 벤 앞에서 키스하는 거 본 스탭도 있다고 하고.”

“…….”

 
‘그렇구나.’라는 짧은 말조차 나갈 틈이 없었다. 이를 너무 꽉 깨물었기에. 혜윤은 뚱한 표정으로 사이드미러를 쳐다봤다. 거울 속에서 얼굴에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은 여자가 저를 응시했다.

이 감정은 너무 분명해서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 서운함이 섞인, 질투였다.


“그 드라마는 인기도 많았지만 한동안 시끄러웠잖아. 전지나 오빠 때문에 뉴스까지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너도 알지?”

“…….”

“혜윤아?”

“…….”

“장혜윤.”

“……어? 미안. 딴생각 좀 하느라. 뭐라고 했어?”

 
마음속에 커다랗게 적힌 질투라는 단어를 지우고 보니, 남은 게 하나도 없는 기분. 너무나 명백하게 지호의 진짜 연인들을 질투하고 있었다. 시무룩한 얼굴이 민주에게 향했다.


“아이고, 우리 혜윤이 큰일이네. 설마 설마 했는데.”

“민주야…… 지금 내 얼굴 너무 못생겼지? 막 심술 나서 울퉁불퉁할 것 같아.”

“큭큭. 알긴 아네?”

 
민주는 옆자리에 앉아 본심을 깜찍하게도 털어놓는 혜윤을 곁눈질했다. 같은 여자가 봐도 혜윤은 귀여웠다. 지금처럼 미운 마음을 털어놓을 때조차 그랬다.


“그런데 민주야.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한테 귀엽다고 하면…… 그건 조금 마음이 있다는 거 아닌가?”

 
특히나 귀여운 건 이럴 때였다. 너무 속이 훤히 보이는 말을 할 때. 속마음은 감추고 싶고, 거짓말은 못 하겠고. 바로 지금 같을 때 말이다.

신호에 걸린 차가 서서히 멈췄다. 그러자 곧장 눈이며 입이며 웃음이 잔뜩인 민주가 혜윤을 직시했다.


“왜? 안지호가 장혜윤 보고 귀엽다고 했어?”

“…….”

“저렇게 한번 떠보는 건 어디서 배웠어?”

 
입술을 쭉 내민 혜윤이 할 말이 없는지 눈만 꿈뻑거렸다. 민주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역시, 장혜윤이랑 거짓말은 안 어울리지.


“혜윤아, 너 내 눈에도 귀여워. 그러니까 의미 두지 마.”

“……아닌데.”

“아니기는. 너 귀엽다는 말 평생 지겹도록 듣고 살았어. 내가 알아. 단지 상대가 안지호라서 조금 다르게 느끼는 것뿐이야. 알았지?”

 
혜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주가 정면으로 눈을 돌리며 액셀을 밟았다. 대답을 받아낸 쪽이나 고개를 끄덕인 쪽이나, 의미를 두지 않는 게 쉽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민주의 말대로, 상대가 지호라면 뭐든 어려우니까.


“내일이 이번 주 마지막 촬영이지?”

“응…… 민주 넌 이틀 동안 뭐 할 거야?”

“일단 하루는 집에서 뒹굴거릴 거야. 넌?”

“나도 새 책 조금 끄적이다가, 우준이 잠깐 만나고 쉬려고.”

 
공통의 관심사가 나오자 대화가 술술 이어졌다. 이제 내일 촬영이 끝나면 이틀의 휴식이 주어진다. 혜윤은 그 이틀 동안 자신도 자신이지만 피곤해 보이는 지호가 푹 쉬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기도 했다.

전연인, 질투, 착각. 그런 자극적인 것들과 싸워 이겨낸 그녀의 진심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