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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마음을 숨기는 일 (17/110)


17. 마음을 숨기는 일
2022.07.27.


드디어 첫 주의 마지막 촬영일. 점심을 먹는 얼굴마다 피로와 즐거움이 경계 없이 섞여 있었다. 혜윤은 이곳 사람들과 상황들에 제법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시간 동안 익숙을 넘어 화합의 장을 만들어 버린 재간둥이도 있었다.


“민주 씨, 커피 마시러 가요? 괜찮으면 같이 갈까요?”

“오, 좋아요. 저는 커피차 이번에 처음 봤는데 진짜 맛있더라고요.”

“여기 오는 커피차가 고급인 것도 있어요. 지호 씨 쪽에서 하는 거라고 들었는데…… 생색을 안 내셔서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혜윤은 자신보다 이곳 사람들과 유하게 어우러지는 민주를 보며 웃었다. 제게는 호기심 어린 눈길과 조용한 묵례가 전부였던 여자 스태프들이 민주와는 익숙하게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혜윤 씨는…… 여자가 봐도 참 예뻐요. 자꾸 눈이 간달까.”

“에이, 늘 예쁜 배우들만 보시다가 평범한 사람을 봐서 눈이 가는 걸 거예요.”

 
가까이 다가설 명분이 없어서 못 했던 말이었는지, 모두가 혜윤과 함께 걷는 짧은 시간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그 말을 디딤돌 삼아 일행들은 그녀를 조금 더 오래 힐끔거렸다.


“어쩜 말도 예쁘게 하시고.”

“그렇죠? 원래 타고나길 그래요, 혜윤이는. 친구인데도 귀여운 동생 같은.”

 
과한 칭찬에 눈만 동그랗게 뜬 혜윤을 보며 민주가 가볍게 끼어들었다.


“맞아요. 혜윤 씨 너무 귀여워요. 교복 때문인가, 더 아이 같고.”

 
하나둘 칭찬이 쌓여 가자 민주와 혜윤이 서로를 바라봤다. 민주가 고개를 까딱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거봐, 누가 봐도 귀엽다니까?’라고 의기양양한 말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어? 작가님도 오셨네. 식사는 하셨어요?”

“네. 매니저님.”

 
커피차 앞에 도착하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 스태프와 이야기를 나누는 봉기가 있었다. 혜윤은 조금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봉기의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보고 싶은 얼굴을 찾을 수는 없었다.


“커피랑 빵은 들고 가시기 편하게 담아드릴까요?”

“네.”

 
미련이 남은 혜윤의 눈이 봉기의 주변을 서성이는 동안, 커피차 직원이 봉기에게 작은 종이 캐리어를 건넸다. 지호는 공개 연애라는 장치를 적절히 이용하며 혜윤을 보살폈지만 혜윤은 그럴 만한 용기도, 자연스러울 자신도 없었다.


“아, 지호 씨 가져다주려고?”

“네. 피곤하다고 잔다는데 조금이라도 먹이려고요.”

“그렇지. 오늘 아직 반도 더 남았는데 굶으면 쓰나.”

 
그를 찾지 못해 길을 잃을 뻔한 눈이, 귀에 꽂힌 그의 이름에 즉각 두 사람을 바라봤다. 더군다나 지호가 피곤함에 밥도 걸렀다는 이야기라면 어떻게든 용기를 내고 싶었다.


“저기, 매니저님. 그거 제가 가져다줘도 될까요?”

“네?”

“마침 세트장 가서 대본 연습 하려고 했어서. 아…… 혹시 차에서 자는 건가요?”

“아니요. 세트장에서 쉰다고 하긴 했는데…….”

 
주변을 둘러싼 모든 사람이 부럽고 흐뭇한 얼굴로 혜윤을 바라봤다. 물론 대답의 권한을 지닌 한 사람, 봉기만 예외였다. 봉기도 이 업계 내공이 있으니 나름 표정을 감췄지만 혜윤의 눈엔 쉽게 보였다.

‘네가 굳이? 왜?’라는 물음이.

하지만 그런 마땅치 못하단 얼굴에도 혜윤은 대답을 기다렸다. 피곤한 지호를 위해서라면 저런 표정에도 눈을 피하지 않는 용기 또한 낼 수 있었다.


“봉기 씨, 뭐 해? 빨리 줘야지. 지호 씨가 누가 와주길 더 바라겠어.”

 
애매하게 말을 멈춘 봉기를 재촉한 건 중년의 남자 스태프였다. 눈치가 그렇게 없냐면서 봉기의 어깨를 툭 치자, 그가 분위기에 떠밀려 혜윤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게요. 내가 눈치가 없었네.”

“감사합니다. 잘 전할게요.”

 
뒤늦게 슬며시 웃음을 지었지만 봉기와 혜윤 사이에 오간 눈의 대화는 명확했다. ‘일 크게 만들지 마세요.’와 ‘지호 씨가 걱정돼서요.’ 정도로.

여기까지가 쥐어짠 용기의 한계인 듯, 혜윤은 캐리어를 소중히 쥐고 뒤를 돌았다.


“어? 혜윤아, 네 커피는 안 가져가?”

“응. 나중에 마실게.”

 
다시 뒤돌아 제 커피를 시키고, 기다리고. 그러자니 여전히 자신에게 꽂힌 사람들의 눈빛이 따가웠다. 혜윤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제 몸의 몇 배는 되는 세트장 문도 가뿐히 연 혜윤은 어제처럼 거실 세트장을 살폈다. 하지만 지호는 보이지 않았다. 소파가 아니면 어디에서 쉬고 있을까 싶다가, 자연스럽게 종수의 방이 떠올랐다.


“아…….”

 
그리고 종수의 방 안, 책상 옆 침대에 누워 잠이 든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낡고 작은 침대에 옆으로 누워 있는 청아한 자태. 어둠에 길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드문드문 켜져 있는 조명에도 지호의 얼굴은 은은하게 빛을 뿜고 있었다.

이마 위에 여러 갈래로 놓인 그의 머리카락이 행여 긴 속눈썹을 건드릴까, 그래서 잠이 깰까, 혜윤은 조마조마했다.

그의 머리에 손을 뻗다가 멈칫, 주위를 둘러보았다. 들키면 안 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처럼 눈치가 보였기에.


 


“……잘 자네.”

 
안도의 혼잣말을 속삭이며 그녀의 작은 손이 지호의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졌다. 책상 위에 놓아둔 커피와 빵을 쳐다보다 다시 그의 얼굴로 눈을 옮겼다.


‘이렇게 곤히 자는데…… 그냥 놔두는 게 좋겠다.’

 
이미 차분히 정리된 머리카락에 더는 손댈 필요가 없었지만 딱 한 번 더 욕심을 냈다. 많이도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와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자들의 이름도 불쑥 스쳤다. 가령 채재희라거나, 전지나라거나.

또 얼굴에 심술이 달라붙을까, 혜윤은 서둘러 손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있는 책상에 앉아 대본을 펼쳤다. 초반 한 달은 세트장 촬영을 몰아서, 후반 한 달은 야외촬영을 몰아서 하는 탓에 촬영 순서가 대본 순서와 다른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러니 감정의 흐름이 들쑥날쑥했고, 혜윤은 그게 조금 힘들었다. 예를 들면 다음 주 촬영의 경우 거의 극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희수가 떠나기 전날, 잠이 든 종수를 바라보는. 진심을 끝까지 숨기고 떠나려는 애틋함.


“하아…….”

 
대사 없이 오롯이 눈빛만으로 표현을 해야 하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걱정이 쌓여 갔다.


‘유난히 어른스러운 희수였어도, 좋아하는 마음을 참기 힘들었을 텐데…….’

 
어차피 주인을 잃어버린 것 같아 혜윤은 커피에 입을 댔다. 조금 식은 커피가 씁쓸해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지만, 대본에 정신이 팔려 맛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금방 식는구나…….”

“……뭔데요.”

“응? 커피.”

“……커피?”

“……응.”

 
누가 건넨 말인지도 모른 채, 입속말하듯 웅얼거리며 대꾸를 했다. 혜윤은 그 후로도 쭉 대본을 봤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건 5분쯤 지났을 때.

‘그런데…… 아까 내가 누구랑 말을 한 거지?’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에.


“……으앗!”

 
설마 싶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잠에서 깬 지호가 눈만 뜬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경악에 느릿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가늘게 뜬 눈엔 여전히 잠이 가득해 보였다.


“깜짝이야. 언제 깼어요?”

“……아까?”

 
많이 당황했는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혜윤을 보며 지호도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적어도 30분은 누워 있었을 텐데 얼굴에 베개 자국도 하나 없는 게, 그대로 촬영을 시작해도 될 정도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이쪽저쪽으로 목을 늘이던 지호가 천천히 혜윤에게 걸어왔다.


“내 건 없나 보네.”

 
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매우 낮았고, 어딘지 쇳소리가 섞인 듯해 기분이 많이 이상했다. 그 야릇한 기분을 떨치고자 혜윤은 커피로 눈을 내렸다.


“아, 이거 사실 지호 씨 건데 다 식은 것 같아서 마셨어요.”

“그렇구나.”

“제가 다시 가져다줄까요? 빵이랑 같이 먹을 수 있게…….”

 
혜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옆까지 바짝 다가온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놓인 커피를 들이켰다. 옅은 립밤 자국이 남은 컵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많이 식었는데…….”

“괜찮아요. 나 주려고 가져온 거라며.”

 
잠이 그득해 무거워 보이는 입매가 나른하게 올라갔다. 한 모금을 더 마시던 그는 컵을 내려놓곤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툴툴 털었다. 가까이에서만 맡을 수 있는 지호 특유의 기분 좋은 향기가 혜윤의 코를 간지럽혔다.


“이제 좀 잠이 깬다.”

 
다시 침대에 걸터앉은 지호가 혜윤을 올려봤다. 그 노곤한 눈빛이 꽤 매력적이었지만 피곤해 보이는 그가 걱정스러웠다. 혜윤도 도로 의자에 앉았다.


“지호 씨, 이틀 동안 쉴 때도 스케줄 있어요?”

“네. 미리 약속해둔 일들이 있어서.”

“……그렇게 안 쉬고 일하면 힘들지 않아요?”

“살짝 꼬인 거죠, 뭐.”

“그런 거면…….”

 
비워진 컵 밑바닥에 점점이 남은 원두 가루를 물끄러미 보던 혜윤이, 들리지 않는 말을 작게 읊조렸다. 그 목소리에 지호의 상체가 앞으로 당겨진다.


“응?”

“……그런 거면 이거 하지 말지.”

 
신인이 처음 쓴 시나리오가 잘 써봤자 얼마나 대단했으려고. 어설픈 제 글 때문에 그가 편치 않은 매일을 사는 것 같아 혜윤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걱정 어린 불안을 바라보던 지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게. 내가 출연 안 했으면 작가님도 이렇게 고생할 일 없었을 텐데.”

“그런 뜻은 아니에요.”

“혹시 후회돼요? 어쩌다 보니까 카메라 안에서든 밖에서든…… 나랑 엮이게 된 거.”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언제 피곤했냐는 듯 혜윤을 바라보는 눈이 그윽했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줬으면 싶은데, 저 맑은 눈은 그런 대답을 안 할 모양이다.

방어를 안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항상 혜윤의 마음은 지호에게 쉽게 읽혔다. 물론 유일한 약점처럼 지호에게만 온 마음을 못 숨긴다는 걸 그는 몰랐다.


“……조금요.”

“아…… 이럴 땐 거짓말 좀 하지.”

 
지호가 제 허벅지를 큰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씁쓸했다. 어색하게나마 혜윤을 보며 웃는데, 그녀는 잠깐 그를 쳐다보더니 눈을 대본 쪽으로 돌려버린다.


“제가요. 지호 씨만큼 연기를 못해서…… 그래서 후회된다는 거였어요.”

“음, 그 걱정 아직도 하고 있어요?”

“……다 들통날 것 같아서요, 조만간.”

“들통?”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만으로는 이 순간을 참기 힘들었는지 혜윤의 손가락이 대본 모서리를 괴롭혔다. 혜윤은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두려웠다. 지호가 머지않아 다 알게 될 것 같아서.

연기인 척해도, 그 밑바닥에 점점이 자리 잡게 된 자신의 진심을.

스치는 눈빛과 의미 없는 말들 사이에서도 제 감정을 너무 잘 파악하는 지호였으니, 이건 정말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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