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장난
(1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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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장난
2022.07.31.
“이 작품만 끝나면 그땐 쉴 수 있는 거예요?”
“네. 좀 오래…… 쉬어보려고요. 어디 떠나볼까 싶기도 하고.”
정말 원했던 대답을 받아낸 사람처럼, 혜윤의 눈이 지호를 향해 반짝거렸다.
“와, 여행 가려고요? 그거 좋다!”
그 반짝임을 고스란히 받고 있자니 지호는 넌지시 웃음이 났다. 제 휴식을 이토록 반가워해 준 사람이 있었나.
“여행 좋아하나 보다.”
“음,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많이 안 가봐서.”
“그렇구나.”
살짝 올라붙은 입꼬리 위에 해님처럼 동그랗게 솟은 볼이 예뻐 보였다.
“그런데 듣기만 해도 좋잖아요. 여행이란 단어는.”
“그럼 같이 갈래요?”
“네?!”
그 고운 표정을 조금 더 지켜볼까 싶었지만,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앞지르기도 하니까. 특히 상대가 이 여자라면.
잔뜩 커진 혜윤의 눈동자가 깜빡임도 없이 지호에게 꽂혔다. 그 놀라운 집중력에 그가 조금 전 그녀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큭큭. 놀라긴.”
“씨이…….”
지호의 웃음소리에 혜윤이 놀리지 말라는 듯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 표정이 꼭 겁 없는 아기 동물 같아 그의 마음을 더 잡아당긴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상하게 작가님한테는 장난을 치게 되네.”
그는 긴 팔을 뻗어 침대맡에 놓인 새 생수병을 들었다. 뚜껑을 열어 혜윤을 향해 살짝 들어 보였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제 목을 축이는 지호였다.
“음…… 지호 씨, 뭐 하나 말해 줄까요?”
입에 담긴 물 때문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혜윤이 책상에 턱을 괸 채 지호를 마주 봤다.
“지호 씨는 장난칠 때도 꼭 진짜 같아요. 특히 눈빛이.”
눈을 피할 땐 언제고, 이럴 땐 또 하염없이 깊게도 바라보는 혜윤이었다. 그녀는 턱을 괸 팔을 조금 더 침대 쪽으로 당겨 그의 눈동자를 봤다. 심연과 같은 검고 짙은 눈. 떨리는 마음을 이겨 설 만큼 호기심이 커진 탓이었다.
‘대체 왜…… 이 눈앞에서는 뭐든 말하게 될까.’
그러다가 부끄러움이 확 밀려오는 순간이 온다. 제아무리 커진 호기심이라 한들 저 눈엔 녹아내리게 되니까.
“아…… 누, 눈이 예뻐서 그런가 보다!”
훅 들어온 수줍음 탓에 혜윤이 서둘러 말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려는데 물을 다 삼킨 지호가 말꼬리를 잡았다.
“역시 내가 못 속이는 여자 맞구나.”
“……응?”
뜻을 알기 힘든 말에 그녀의 고개가 갸우뚱한다. 그 갸웃거림이 귀여워 지호도 똑같이 흉내 내며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또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얼굴에 힘을 주려던 혜윤이지만,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세트장의 무거운 문이 열리며 스태프들 여럿이 들어오고 있었다. 저 뒤로 봉기와 민주의 얼굴도 희미하게 보였다. 봉기가 지호를 봤는지 뭐라 손짓을 하는데, 지호를 쳐다보니 그도 봉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나도 뭐 하나 말해 줄까요?”
그리고 마치 자신을 본다는 걸 다 안다는 듯 지호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대본을 쥐고 일어선 그가 혜윤에게 눈을 내린다.
“난 마음에도 없는 장난은 친 적 없어요.”
“…….”
지호의 시선 속에 잔잔히 미소가 흘렀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혜윤은 그저 그를 바라봤다.
“커피 잘 마셨어요. 고마워요.”
그의 큰 손이 그녀의 어깨를 아주 잠깐 쥐었다. 그리고는 세트장 밖에 서 있는 봉기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혜윤은 두 사람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
“지친 하루의 끝을 포근하게.”
“…….”
“이제 우리…… 자러 갈까요?”
“컷! 지호 씨, 정말 좋아요! 똑같이 각도 틀어서 한 번 더 갈게요.”
이틀의 휴식이 주어졌지만 지호는 광고 촬영으로 더욱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정 넘어 끝난 드라마 촬영 이후, 3시간쯤 기절한 듯이 자다 깨서는 침대 광고를 찍는다는 게 조금 재밌었다.
침대에 누워 졸린 표정을 지어야 했지만 진짜 피곤해서는 안 됐고, 내 집처럼 자연스러워야 했지만 흐트러진 모습 또한 허락되지 않았다. 여러모로 우스웠다.
“이제 우리…… 자러 갈까요?”
“컷!”
고작 30초짜리 광고는 촬영 시간 12시간이 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창문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하늘엔 다시 어둠이 드리웠을 게 뻔했다.
“매니저님, 지호 씨 인터뷰는 조금 쉬었다가 할까요?”
“아, 잠시만요.”
광고 촬영이 끝나자 곧 제품홍보 인터뷰가 뒤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가시죠. 이어서 하는 게 좋겠다고 하네요.”
봉기의 대답에 세트장 한쪽에는 또다시 작은 카메라가 세팅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대지 않던 <23센티미터>와는 달리,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게 온몸을 치장해 주는 스타일리스트들의 손길이 바빴다.
“저기…… 지호 씨, 피곤하실 것 같아서. 이것 좀 드세요.”
제 얼굴을 맡긴 채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던 지호가 낯선 목소리에 눈을 떴다. 달뜬 표정의 여자가 커피를 건네는데, 대표로 온 건지 먼발치에 여자 스태프 여러 명이 모여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네. 그런데 진짜…… 저 진짜 지호 씨 팬이에요. 오늘 같이 일해서 영광이에요!”
“저도 함께 작업해서 좋았어요. 수고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고마워 좀 더 또렷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물론 그런 나른함마저 꽤나 뇌쇄적이란 걸 스스로는 잘 몰랐다.
산타를 만난 아이처럼 발을 동동거리던 스태프가 무리 쪽을 향해 걸었다. 지호가 슬며시 웃으며 커피에 입을 댔다.
“오, 엄청 시원하다.”
지호는 크게 한 모금을 마시고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응? 더 안 마시고? 잠 좀 깨게 마시지.”
수정 메이크업에 공을 들이던 스타일리스트가 그의 반듯한 눈썹을 솔로 빗으며 가득인 커피를 봤다.
“눈 조금만 더 감고 있으려고.”
지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쩌면 눈을 떴을 때, 혹시나 깰까 싶어 제 머리를 아기 다루듯 건드려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조용히 멀지 않은 거리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꿈처럼 그런 마음이 피어났다. 그런 욕심이.
“뭐야? 갑자기 왜 웃어?”
“……그냥.”
말도 안 되는 상상에 헛웃음이 났다. 웃음을 감추려 입술을 맞물었지만, 어제의 잔상이 끌어당긴 입꼬리는 쉽게 내려오지 않았다.
“입술은 뭉개지 말자. 속으로만 웃어줘.”
“큭큭. 네.”
립밤을 펴 바르는 스타일리스트와 지호가 서로 키득거렸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네.”
그가 몸을 옮겨 인터뷰 의자에 앉을 때까지도 스타일리스트는 꼬리 빗을 이용해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점검했다.
“XX침대를 실제로 사용하시나요?”
“네. 짧은 시간을 자도 편안하고 개운한 느낌이 들어서 좋아합니다.”
“그러시군요.”
카메라에 다시 불이 켜지고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사적인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제품 홍보를 적당히 녹여낸 질문들이 대다수였다.
굵고 부드럽게 세팅된 머리와 민트그레이 색상의 카디건, 흰 티셔츠와 바지. 지호는 섬유유연제 향이 날 것처럼 포근해 보였다.
“보통 어떤 잠옷을 입고 주무시나요?”
“잘 때 상의는 벗고 자는 편이에요.”
“어머! 이거 나가면 또 난리 나겠다.”
머쓱한 지호와는 달리 스태프들 모두가 행복에 취해 있었다. 일부 여자들은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카메라 밖에서 그를 구경했다. 특히나 잠옷 이야기엔 옆 사람을 때려 가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렇게 겉으로 훤히 보이는 제 모습을 궁금해하는 인터뷰는 간혹 민망했지만, 재밌기도 했고 또 참 쉬웠다.
***
“지호 씨, 오늘 화보 촬영은 어떠셨어요?”
“즐거웠어요. 최근에 화보를 여러 번 찍었는데 그중 가장 노멀한 의상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편하기도 했고요.”
다음 날. 조금 어려운 인터뷰는 이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제 속내를 캐내고 사수하려는, 창과 방패의 싸움. 더군다나 양쪽 모두 내공이 상당했으니 표정, 눈빛, 단어 하나에도 신중히 굴었다.
하지만 에디터와 지호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예민함도 읽을 수 없었다.
“에디터님, 안녕하세요. 전에 보니까 이 브랜드 커피 드시는 것 같길래.”
“와, 섬세하셔라. 감사합니다, 매니저님.”
“인터뷰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영화 관련 질문만 부탁드릴게요.”
“음…… 네. 인터뷰 목적이 그거니까요.”
물론 내공이라면 봉기도 부족하진 않았다. 멀찌감치 떨어진 의자에 앉은 봉기는 핸드폰을 만지는 척하며 귀를 세웠다.
“그런데 질문은 아니지만, 지호 씨는 좀 심하게 잘생기셨어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감사합니다. 민망하네요.”
“이제 별로 감흥 없죠? 이런 외모 칭찬.”
에디터는 커피를 입에 가져가며 은근하게 지호를 봤다. 노련함으로 가득 찬 눈이 그를 향해 번쩍였다.
“매번 들어도 좋은 말이잖아요. 항상 감사드리죠.”
적당한 예의와 딱 그만큼의 친절함. 그가 선을 넘는 일이 없다는 건, 그녀뿐만 아니라 업계의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처럼 잔뼈가 굵은 사람들만 알아채는 게 있다면, 지금 같은 대답이었다.
그는 ‘네’, ‘아니요’ 같은 명확한 대답 대신 교묘하게 돌아갈 줄도 알았다. 곱씹어봐야 알 수 있는 저의. 크게 감흥 없는 건 맞지만, 그럼에도 고맙다는 거지.
“여전히 매너가 좋으시군요.”
“아닙니다.”
보통 같았으면 그녀도 봉기의 말처럼 영화 이야기만 하고 끝냈을 것이다. 크게 건질 게 없으니. 그렇지만 그건 한 달 전까지의 안지호였고,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요즘 차기작 촬영 때문에 바쁘시다고 들었어요. 연인과 함께 작업하는 기분은 어때요?”
어색함 없이 부드럽게 말을 잇는 에디터에게 봉기의 시선이 날카로이 꽂혔다. 자신이 나서야 하나 싶어 지호를 보는데 그 또한 덤덤해 보이니, 일단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일하는 거라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상대방이 조금 섭섭해하지 않을까요?”
에디터는 제가 더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지호의 대답을 재촉했다. 이런 가벼운 질문에 넘어갈 그가 아니란 걸 알지만, 사람이 호르몬 장난에 빠지면 느슨한 모습도 보이는 법이니까. 혹시나 싶긴 했다.
“그렇진 않을 거예요. 제가 함께 있을 때 어떤 표정인지…… 한 사람은 늘 볼 테니까요.”
“이야, 말보다는 행동이다?”
“……이 질문은 여기까지만 받겠습니다.”
온화한 표정과 나긋한 말투로 지호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어쩐지 이 한 줄짜리 멘트를 혜윤이 본다면 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릴 것 같아 마음이 간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