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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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2022.08.03.
“참, 저번 주에 전지나 씨 만났는데 <23센티미터>에 특별출연으로 참여할 거라던데요.”
“그렇군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가 봐요?”
“네. 캐스팅은 제 영역이 아니라서요.”
지호는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분위기 전환용으로 꺼낸 이야기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태블릿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럼 인터뷰 시작할게요. 이번 영화에서 지호 씨 역할 소개 부탁드립니다.”
가벼운 근황을 나누며 지호가 그어놓은 선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에디터는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제 역할은 안하무인인 재벌 3세예요. 지금껏 했던 역할 중에 제일 거칠고 센 편이라, 보시는 분들도 새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항상 나이스한 역할만 하셨네요. 거기에 늘 잘사는?”
“네. 매번 비싼 옷 많이 입어봤죠. 그건 이번에도 비슷하네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작게 웃었다. 하지만 에디터 옆에 놓인 녹음기는 제 역할을 충실히 했고, 지호의 짧은 멘트 하나도 고스란히 옮겨 적으려는 그녀의 손가락은 타이핑에 열중이었다.
“안하무인인 쪽은 당연히 괴리감이 커 보이고. 그럼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다 가진 쪽과는 괴리감이 있나요? 실제 안지호와?”
그녀가 잠시 손바닥을 어슷하게 비볐다. 태블릿에 꽂혀 있던 날카로운 눈이 지호를 본다.
“그렇죠. 지금 누리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배우가 가져다준 것이니까요.”
“그렇군요. 사실…… 지호 씨의 사적 영역은 알려진 게 거의 없잖아요. 재혼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 외에는. 아, 제 표현이 불쾌했다면 용서하세요.”
“아닙니다. 불쾌하지 않았어요.”
부드러운 단어를 고를 수 있었음에도 에디터는 조금 거슬리는 단어를 던졌다. 상대가 쉽게 꿰뚫을 수 있는 인터뷰이였다면 안 그랬을 텐데, 어지간해야 말이지. 돌을 던지면 팔딱 뛰기라도 할까 싶어서.
물론 그런 얕은수는 먹히지도 않았고, 도리어 사과하는 저를 품어주는 표정을 보였다. 역시 머리 꼭대기 정도가 아니라, 구름 위에 있는 사람이지 싶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렇다면 지호 씨 말대로 배우가 가져다준 모든 것들 중에 배우 이전의 안지호에게 제일 필요했고, 또 갖게 되어서 제일 만족스러웠던 건 뭔가요?”
그녀는 두 손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말로써 그가 그어둔 선을 넘는 건 불가능하고, 대화는 모두 녹음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할 때의 행동과 미묘한 표정 변화를 지켜보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뭐, 당연히 돈이죠. 속물 같다고 해도요.”
“돈 자체보다는 그 돈으로 누릴 수 있는 가치가 만족스러웠겠죠? 지호 씨라면?”
“그렇게 포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디터의 상냥한 화법에 지호가 편안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가 제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고, 또 사탕을 건네기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휴, 제가 더 감사하죠. 매니저님이 저렇게 무섭게 쳐다보시는데도 대답 다 해 주셔서.”
에디터의 말에 봉기가 멋쩍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본 두 사람도 조금 장난스럽게 웃음을 보탰다. 물론 겉으로 웃는다 한들 셋 중 어느 하나 즐거운 사람은 없었다.
“자, 약속을 지켜야 다음도 기약할 수 있는 거니까. 이 질문까지만 하고 영화 이야기로만 채울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절실했던 돈으로 제일 먼저 한 일은 뭔가요?”
“집을 샀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 선물로? 아니면 따로 살기 위해서?”
지호가 고등학생 때 데뷔했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데뷔작 이후부턴 곧장 100배 이상으로 몸값이 뛰었다는 것 또한. 지금은 뭐, 몇백억 대작이든 간에 전체 제작비의 3분의 1 이상은 안지호 출연료일 테고.
알려진 가정사에 비해 잡음은 전혀 없었다. 다만 계부에게 집을 선물할 만큼 정녕 그리 사이가 좋았을까 싶기도 한데, 따로 살기엔 너무 어리지 않나 싶기도 했다.
“독립을 했죠.”
“그렇구나…… 그럼 진짜 영화 이야기로 들어갈게요.”
역시 제 예상이 조금은 맞나보다 싶어 에디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저녁은 어떻게 할까? 먹고 들어갈래?”
“집에서 먹을게.”
지호는 모처럼 낮게 떠 있는 해를 볼 수 있었다. 5시가 다 돼 가니 곧 자취를 감추겠지만 그래도 해를 본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가서 저녁 먹고 10시간은 쭉 자.”
“으으, 그러게. 그런데 운동 못 한 지도 좀 돼서.”
봉기의 놀란 눈이 빠르게 룸미러 속 지호를 살폈다. 찌뿌둥한 몸을 쭉 늘리며 하는 대답치고는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오늘 운동하려고?”
“응. 밥 먹고 갈까 하는데 시간 괜찮으신지 알아봐줘.”
“와…… 진짜 존경스럽다. 운동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
“큭큭. 존경은 무슨. 그냥 몸 좀 풀고 푹 자려고.”
대단한 말을 대단치 않게 하는 데는 이력이 난지라, 봉기는 설설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 인터뷰가 머리를 스쳤다. 그녀의 이름이라면 제 관심도 끌 만했으니.
“그런데 아까 그건 무슨 말이냐? 전지나 씨 특별출연.”
“글쎄.”
봉기는 지호의 건조한 대답을 붙잡고 지난해를 곱씹었다.
두 사람은 작년에 캠퍼스 드라마를 찍은 사이다. 둘이 서 있기만 해도 애초에 한 조각가가 만든 작품들처럼 완벽한 그림이었기에, 모든 장면이 화보 같던 드라마였다. 그러니 흥행은 당연했고 실제 연인이길 염원하는 시청자들도 많았다.
둘은 제법 친해 보였다. 실은 친해 보였다기보단 지호가 안 하던 행동을 보였다는 게 정확하다. 어느 촬영장에서든 예의 섞인 인사 외에는 오로지 일만 하던 놈이, 그녀의 개인사에 조용한 ‘개입’이란 걸 했으니까.
지나의 친오빠가 매달 꾸준히 입금되던 생활비를 못 받았다는 이유로 촬영장에 난입했던 날. 손찌검하려던 남자를 망설임 없이 제압한 건 지호였다. 물론 이건 지호의 성격상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단, 지나의 소속사에서도 쉬쉬하려던 일을 굳이 언론에 터뜨린 건 봉기였다.
‘오늘 있었던 일, 내일 기사로 내보내줘.’
지호의 짧은 한마디에 의해서.
그 대가로 지나는 속 시끄러운 2주를 보냈겠지만, 화려한 사생활로 종종 추문을 달고 다니던 그녀에게 측은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남보다도 못한 가족과의 연도 그 사건을 계기로 끊어냈다고, 아마 뉴스를 통해 들은 기억이 난다.
그녀에겐 최악의 상황 속에서 지호가 가져다준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봉기는 의심했었다. 혹시 사귀는 게 아닐까 하고. 거기에 ‘안지호랑 전지나가 촬영장 주차장에서 키스했다더라.’ 같은 풍문이 자신만 비껴갔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지호에게 물어본 적은 없다.
봉기는 정답을 알아서 좋을 것 없는 질문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걱정스러운 답을 듣느니 궁금증으로 남겨놓는 게 낫다는 판단. 9년의 세월을 함께하는 동안 그가 지호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지호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 거라는 믿음이 있기도 했고.
“너도 몰랐어? 드라마 끝나고 둘이 연락 안 해?”
“응.”
“……난 친한 줄 알았지.”
봉기의 말에 창밖을 보는 지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친한 줄 알았지.’가 어떤 뜻인지 잘 아는 눈치였다.
“아무튼 김 PD만 노났네. 너에, 전지나 씨까지. 이게 무슨 저예산 드라마 라인업이야. 영화제 라인업이지.”
“큭큭. 뭘 또 그 정도라고.”
차가 신호에 걸리자 봉기는 트레이너에게 빠르게 메시지를 남겼다. 긴 신호에 그래도 시간이 남자, 대뜸 생각난 촬영장 이야기들에 입이 열렸다.
“참, 김 PD한테 들어보니까 여기저기서 작가님이랑 컨택하려고 난리라던데. 들었어?”
“아니. 누가? 배우들이?”
창밖을 보던 지호의 눈빛에 짙은 광채가 번득였다. 처음으로 의자에 기댄 등을 떼며 봉기를 쳐다본다.
“응. 김 PD가 인맥이 되니까 <23센티미터> 시나리오를 여기저기 많이도 뿌렸더라고. 뭐, 트리거는 지호 너였지. 다들 저예산이란 말에 받아놓기만 했다가, 너랑 엮이니까 다시 꼼꼼히들 봤나 보더라.”
묵직한 고개의 끄덕임과 미간에 잔잔히 서린 집중의 흔적. 봉기는 룸미러로 지호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봤더니 글이 괜찮거든. 모르겠다, 진짜 좋은 건지 그냥 너랑 뭐 있다니까 좋아 보이는 건지.”
“그래서, 작가님이 연락 오는 거 다 받아주고 있대?”
앞에 깔린 긴 서사는 지호의 관심 밖이었다. 그녀의 견고한 글솜씨야 이미 충분히 아는 것이고. 단지 궁금한 건 하나다.
그래서 지금 누가 혜윤의 방패가 되어주고 있냐는 것. 불이 붙은 화살이든 꿀이 발린 화살이든, 누군가 그녀의 몸과 마음을 건드리는 건 상상만 해도 속이 끓었다.
“아니. 일단 김 PD가 둘러대면서 연락처를 안 알려주나 봐. 촬영 때문에 바쁠 거라고. 그런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작가님이랑 인터뷰하고 싶다고 언론 쪽도 기웃댄다더라.”
“……그럼 우리 쪽에서 맡는 건 어때.”
지호의 긴 손가락이 턱 끝을 그러쥐다 놓았다.
“에이…… 그건 매니지잖아. 컨택이 쏟아지면 정리해서 작가님한테 알려주고, 또 양쪽 의견 조율해 주고. 이런 건 우리랑 계약을 해야 할 수 있는 거지. 냉정하다고 해도, 시간이나 비용적인 문제도 무시 못 하고.”
“그런 건 내가 줄게.”
“뭐?!”
자못 앙칼진 목소리가 뒷좌석을 향한다. 봉기는 제 돈 들여가며 혜윤을 감싸려 드는 지호가 매우 낯설었다. 마치 그 어느 아침, 다이닝룸에서 웃고 있던 그의 모습처럼. 고개를 홱 돌리는데 지호가 턱을 들어 바뀐 신호를 가리켰다.
“내일 작가님 만나면 차기작 생각 있는지 물어볼게. 김 PD님께 말해서 작가님 연락처를 우리 쪽으로 돌려줘. 일단 지금까지 온 컨택들은 정중히 거절하는 걸로. 비용은 형이 알아서 넉넉히 가져가고.”
“…….”
“작가님한테는 말하지 마. 부담 가질 테니까.”
“하아…….”
운전을 하느라 뒤를 돌아볼 순 없었지만, 입술 새로 헛웃음 같은 한숨이 나왔다. 지호가 언제부터 저렇게 말이 많았는지, 또 남의 일에 이렇게나 집요하게 나섰는지, 제 기억엔 없는 모습이었다.
“지호야…….”
그래서, 9년을 지켜온 자신의 원칙도 무너뜨리게 된다.
“나 진짜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뭘?”
묻기도 전에 이미 답을 들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 그는 벌써 마음이 무거웠다.
“너 진짜 장 작가님이랑 뭐 있는 건…… 아니지?”
차라리 신호에 걸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다고 한들 뒤돌아 지호를 볼 자신이 없었다. 룸미러를 힐끔거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불안했다.
“응. 없어.”
“하아…… 그래, 인마.”
평소의 그처럼 짧고 명확한 답에, 봉기가 속이 뚫린 듯 깊은숨을 내쉬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훑는데 어찌나 바짝 말랐는지 까끌까끌했다.
“그냥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
너무 놀라면 소리를 지르긴커녕 숨이 멎는다고 하던데, 봉기는 그 표현이 진실이란 걸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