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오해의 씨앗 (22/110)


22. 오해의 씨앗
2022.08.14.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아무래도 안지호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우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 그게 맞아.’라는 확신의 혼잣말까지 보탰다. 민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뒷좌석으로 눈을 돌렸다.


“혜윤아, 입 오므려야지.”

 
혜윤은 덕분에 왕밤만큼 크게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제일 놀랐을 한 사람의 안부도 확인했으니, 민주가 본격적으로 또박또박 우준을 향해 쏘아댔다.


“그럼 지금까지 그 생각했던 거야?”

“응. 내가 아침부터 말했잖아. 안지호가 계속 나 쳐다보는 것 같다고.”

“너 어디 아파?”

“민주야, 나 진짜 진지하다.”

 
민주의 기막힌 표정에도 아랑곳없는 우준이 라디오를 껐다. 무음이 된 차 안엔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는 남자와 매우 언짢은 여자의 목청만 울렸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어. 오늘 안지호가 나를 보던 눈빛의 의미가 뭘까…….”

“얼씨구?”

“뭔가 엄청……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그래, 딱 그 느낌.”

“쥐어패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려던 건 아닐까?”

 
비소를 머금은 민주가 비아냥거리며 말한 것이, 안타깝게도 정답이었다. 물론 우준은 전혀 알 수 없겠지만. 확신에 찬 그의 고개가 부정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다 어떨 땐 또 웃더라?”

“웃기게 생겨서 웃은 건 아닐까?”

“아니야. 어렵게 지은 미소 같았어. 그래…… 어려웠겠지. 용기가 필요했겠지.”

“상태가 심각하네.”

 
그가 아무리 근엄한 표정으로 말한다 한들 민주는 조금도 받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앞자리에서 우준과 민주의 우스운 설전이 오가는 동안, 혜윤만이 낯선 동네에 버려진 아이처럼 방황하고 있었다.


“괜히 오해하지 마. 안지호 여자 좋아해. 내가 들은 전 여자친구만 두 명이야.”

 
쓸데없는 논란을 뭉개버리려는 듯 민주가 대뜸 그의 연애사를 던졌다. 동시에 애써 잊은 예쁜 이름들이 혜윤의 양쪽 어깨에 앉아 그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뒷자리에 홀로 앉은 혜윤이 축 처진 어깨로 민주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당연히 사귀었을 수도 있지. 남자 좋아한다고 소문나면 안 되니까.”

“오…… 이건 좀 그럴싸했다?”

“그러니까 혜윤이랑 연인인 척하는 것도, 안지호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게 아닌 거야.”

 
성난 눈이 이번엔 우준의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제일 친한 친구 두 명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은 이야기들을 번갈아 가며 하는 중이다.


“장혜윤, 너는 그런 낌새 못 느꼈어?”

“절대! 절대 절대 없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혜윤은 룸미러로 자신을 보는 우준을 향해 온몸을 움직여가며 고개를 홱홱 저었다. 이 이야기가 그저 빨리 끝나길 바랐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지라도 계속 듣다 보면 빠져들기 마련이니까.


“참, 얼마 전에 안지호가 혜윤이한테 귀엽다고 했대.”

“이거 봐, 이럴 줄 알았다. 고수인 거 딱 나왔네.”

“뭐가?”

“여자 좋아하는 척하려고 어디 귀엽지도 않은 애한테.”

“씨이, 이것들이…….”

 
민주는 우준의 반응이 재밌어 계속 장작을 넣고 있었고, 그 장작에 활활 타오르는 건 우준보단 혜윤이었다.


‘에이, 설마…….’

 
그래서, 벌써 그녀의 마음속엔 강한 부정이 작은 불안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 턱 없는 우준이 한 손을 제 가슴 위에 얹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쨌든…… 내가 조심할게.”

 
뭘 조심하겠다는 건지, 우락부락한 몸치고는 참 다소곳한 말투였다. 그 모습에 민주는 실실 웃었지만, 혜윤은 놀란 마음이 영 달래지지 않아 웃을 수 없었다.

***



“혜윤아, 오늘 왜 이렇게 종일 우울해? 지호 씨 없어서 그래?”

 
다음 날. 오늘은 지호의 촬영이 없는 날이었다. 그의 촬영 스케줄은 이제부터 거의 이런 식으로 진행될 거라 했다. 남들보다 주에 하루를 더 쉬고, 대신 촬영 날은 배로 일하는.


“말도 안 돼. 그냥 잠을 좀 못 잤어요.”

“잠 못 잔 것도 맞고, 지호 씨 때문도 맞나 보구만.”

“에이…….”

 
민우는 대답 끝을 뭉개는 혜윤을 보며 슬쩍 웃었다. 혜윤은 어른아이 같은 모습이 많아서, 바르고 예쁜 말은 잘했지만 거짓말은 서툴렀다. 속이 깊었지만 여리기도 했고.

그래서 민우의 눈엔 지호의 옆자리에 서 있는 혜윤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우면 아까웠지. 둘이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엔 ‘장혜윤, 눈 엄청 높았구나.’ 싶었지만 결국 ‘안지호, 여자 보는 눈까지 있네.’로 결론 내렸으니 말이다.


“참, 내일 촬영 씬을 조금 바꿀까 하는데.”

“아…… 지호 씨한테 들었어요.”

 
민우의 말에, 어제 세트장에서 지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장면이 바뀔지 모른다는 말과 함께 이어진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도.

어제는 설레다 못해 몸이 굳어버렸던 순간이, 오늘은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녀는 아닐 거라 믿으면서도 밤새 우준의 말을 곱씹었다.

사실 지호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가 잘못한 것도, 미안해할 것도. 단지 말할 수 없는 섭섭함이 몽글몽글 맺힐 뿐이었다. 정말 조금의 희망도 없는 사이라는 것에 대한.


‘나 좀 봐…… 뭐, 지호 씨가 여자 좋아했으면 희망이 많았고?’

 
우준이 심어놓고 간 엉뚱한 새싹이 어느새 덩굴이 되어 혜윤의 마음을 뒤얽고 있었다.


“그럼 혜윤이 너도 괜찮다는 거지? 씬 바꾸는 거.”

“…….”

“장 작가님?”

“……아, 네. 저도 지호 씨랑 같은 생각이에요.”

 
쑥쑥 잘도 자라는 덩굴을 헤치고 나오느라, 혜윤이 조금 늦은 대답을 했다. 그 모습에 민우가 오묘하게 웃었다.


“이런 건 좋구나. 진짜 연인들 데리고 촬영하는 게.”

“네? 뭐가요?”

 
연인이란 단어에 화들짝 놀란 혜윤이 조금 전과는 정반대의 속도로 반응했다.


“그렇잖아. 연인이니까 수위 좀 높이자고 해도 서로 안 미안하고.”

“……네?!”

“응? 왜?”

“수위라니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듯 민우를 쳐다봤다. 오히려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건 민우였다.


“뭐야? 어떤 씬인지도 모르면서 알겠다고 한 거야?”

“아…….”

 
혜윤은 서둘러 시간을 되감았다. 찡그려진 얼굴과 함께 겨우 붙잡은 한 장면.


‘모레 촬영할 씬을 조금 바꾸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지호 씨가 괜찮으면 저도 좋아요.’


‘무슨 씬인 줄 알고?’

 
지호의 눈에 어른거리던 장난기는, 그저 늘 봐오던 다정함 중의 하나일 거라 짐작한 게 문제였나보다. 민우를 꼭 만나보라고 말해 주기까지 했는데.


“그런데 네가 작가니까 알 거야. 이 작품에 큰 스킨십 없는 거.”

“그렇죠…… 그럼 어떤 씬이 바뀌는 거예요?”

“희수가 떠나기 전에 잠든 종수를 바라보잖아. 유일하게 희수 감정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좀 더 드러내 줬으면 싶어서. 가볍게 볼에 입 맞추는? 살짝 누르는 정도로.”

“…….”

 
민우는 조곤조곤 이어지던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혜윤의 얼굴과 허벅지 위에 올려진 작은 주먹을 번갈아 봤다. 저 주먹이 지금 벌어진 입 사이즈랑 비슷하려나 싶어 귀여웠다.


“큭큭. 혜윤아, 지호 씨 없는 데서도 이렇게 귀여워? 그러다 턱 빠지겠네.”

 
민우는 저도 모르게 손이 뻗쳤다. 마음이 동하면 몸이 절로 움직인다더니. 작은 턱을 손으로 올려주자 입을 닫은 혜윤이 그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럼 너도 씬 바꾸는 거 괜찮은 거지?”

“……지호 씨는 괜찮다고 해요?”

“응.”

 
당연한 거 아니겠냐는 눈빛이 조금 짓궂게 혜윤을 바라봤다.


“아, 그러긴 했다. 너한테 물어봐서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것 같으면 원래대로 가자고.”

 
하지만 아무리 툭툭 튀어 오르는 짓궂음일지언정 부러움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민우가 어제의 기억을 되살렸다. 정확히는 지금 이곳에 없는 남자가 보여준 애틋함을.


“그리고…… 이거 말해도 되나? 이 씬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긴 한데.”

“뭔데요?”

“촬영하는 동안 절대 너한테 부담 주지 말라고 하더라고. 희수는 존재 자체로 제 몫 다 한 거니까, 나머지는 자기 역할이라면서.”

“아…….”

“와, 지호 씨가 자기 사람이면 확실히 감싸는구나 싶었지. 아니, 자기 여자면.”

“…….”

 
혜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너무 다정해서, 따뜻해서, 좋은 남자여서, 몽글몽글 맺힌 섭섭함이 더 커지고 있었다.

***



‘늘 하던 대로 하자. 늘 대하던 대로.’

 
어젯밤 잠들기 전부터 아침에 눈을 뜰 때까지 몇 번의 다짐을 했더라.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라 발가락을 보태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텐데.


“어제 촬영은 잘했어요?”

“……네.”

 
민주가 말한 그의 전 연인들이 사실이고, 심지어 그게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더 나아가 우준의 주장마저 다 맞다 쳐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지만.


“참, 감독님이랑 오늘 바뀌는 씬 이야기는 나눈 거죠?”

“……네.”

 
그런 이성적인 생각이 지호의 얼굴 앞에선 사라지는 게 문제였다. 또한 그의 시선이 닿는 곳 여기저기마다 서운함이 울퉁불퉁 맺혀서, 그를 제대로 바라보기 힘들어졌다는 것도 문제였고.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음……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

 
‘네.’라는 단 두 번의 대답만으로도 제 감정을 읽어버리는 지호였다. 이 와중에도 지호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기 싫은 자신도 문제. 문제. 문제. 해결하지 못할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혜윤은 대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저었다기보다는 삐걱댄 게 맞았다.


‘무슨 일이 단단히 있었구나.’

 
지호는 옅게 웃으며 그 어색함을 지켜봤다. 고장 난 혜윤은 또 그런 데로 마음을 끌었으니.


“확실히 여러모로 편하네. 진짜 연인들이랑 작업하는 건.”

 
성격만큼이나 시원하고 빠른 걸음 소리에 두 사람이 민우를 바라봤다.

이른 아침인데도 상쾌해 보이는 그 역시 지호와 혜윤을 번갈아 봤다. 한쪽은 오늘도 여전히 기운이 없어 보였으니, 대화가 수월해 보이는 쪽으로 시선을 쏟기로 한다. 민우가 지호를 향해 입가를 올렸다.


“다른 때 같았어 봐. 스킨십 씬 조금만 바꾸려고 해도 이쪽저쪽 왔다 갔다. 좋냐, 싫냐, 그럼 어디까지 좋냐, 저쪽은 이 이상 안 된다더라, 어휴…….”

“큭큭. 뭔가 더 바꾸고 싶으신가 보네요.”

“아, 역시. 잔재주 부리지 말고 본론만 말하는 게 낫겠죠?”

 
민우가 아침부터 즐거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좋은 분위기로 끌어 올려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욕심.

수많은 감독과 작업해본 지호는 그 의중을 바로 잡아냈고, 혜윤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우리 그 씬 조금 더 가자. 볼에 말고 입 맞추는 거로.”

 
그리고 이어지는 민우의 한마디에 그녀의 몸이 꽝꽝 얼어붙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