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씨앗은 싹을 틔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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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씨앗은 싹을 틔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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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씨앗은 싹을 틔우고
2022.08.17.
“음…… 그렇게 되면 종수가 모를 수 없지 않나요? 한낮에 잠깐 든 선잠일 텐데.”
지호가 수려한 얼굴에 흐르던 여유로움을 거뒀다. 팔짱을 끼며 민우의 말을 곱씹는 그의 눈매에 냉정함이 보인다.
“응. 그런데 이 씬 이전에 종수가 희수랑 키스하는 꿈을 꾸잖아요. 그러니까 두 방향으로 다 가도 돼. 안 깨어나서 영영 몰라도 좋고, 얼핏 깼는데 이것 역시 꿈이겠구나 생각하면서 다시 잠드는 것도 좋고.”
“……두 번째가 더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그렇죠? 역시, 내 생각도 그래.”
느리게 끄덕이는 지호의 고갯짓이 마음에 든다는 듯, 민우의 목소리가 조금 더 높아졌다.
“그럼 이제 혜윤이만 찬성하면 되는 거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혜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렵게 구한 물감이 기대만큼 황홀한 색상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제 혜윤이 붓만 건네준다면 제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민우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혜윤을 보며 부끄럽겠지 싶었다. 하지만 지호의 생각은 달랐다. 짧은 순간, 그의 눈이 혜윤의 온몸을 빈틈없이 훑어 내렸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와 어설프게 벌어진 입술. 낮고 불규칙적으로 들썩이는 가슴팍 밑으로 작게 흔들린 손톱 끝.
“작가님, 꼭 안 해도 돼요. 원래대로 가도 희수 감정은 충분히 표현되니까.”
제 목소리에 혜윤이 힐끔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어색한 눈을 굴리며 더디게 고개를 낮춘다. 티 나지 않게 입 안의 속살을 깨무는 미세한 달싹임까지.
저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당황스럽고 불안한 거지. 그리고 제발 틀렸으면 싶지만, 자신이 읽은 혜윤의 감정이 맞다면.
“아, 혜윤이는 별로인 것 같아?”
“그게…….”
“응. 괜찮아. 네 의견도 중요하니까 솔직히 말해도 돼.”
“……아니에요. 저보다는 두 분이 더 잘 아실 테니까요. ……그렇게 할게요.”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하기 싫어서.
“좋았어. 그럼 모두 찬성한 걸로.”
하루의 시작이 좋다 싶은 민우가 경쾌하게 손뼉을 치며 세트장을 빠져나갔다. 카메라 뒤로 자리를 잡은 얼굴에 여전히 웃음이 가득했다.
반면 민우가 그녀의 웃음까지 대신 누리고 있나 싶을 정도로, 혜윤은 표정이 없었다. 여전히 초점도 없었고. 지호는 길 잃은 아이 같은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유를 묻기보다 그녀를 차분히 기다려보기로 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기다려줄 수 있었다.
***
“어렵지 않지? 침대 옆에 서서 잠깐 바라보다가 가볍게 입 맞추고, 천천히 일어나서 방 밖으로. 끝.”
“……네.”
깔끔한 민우의 말투에 비해 혜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지호는 침대에 걸터앉아 혜윤의 옆얼굴을 봤다. 오전 촬영 내내 본 옆모습이었다. 촬영이 멈추면 나름 자연스럽게 대본을 보거나, 세트장 밖의 일행과 합류하는 듯했지만 모르지 않았다.
혜윤이 애써 자신을 피한다는 것을.
하루 남짓 사이에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대체 뭐 때문일까 조금 답답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일터이기도 했고, 그 와중에도 혜윤에게 마음이 쓰여서.
무슨 이유가 됐든, 피하는 마음도 편치 않을 거라는 걱정에.
“자, 들어갈게요. 이 씬 끝내고 쉽시다!”
카메라 뒤에 선 민우의 목청이 크게 울린다. 그 말에 지호는 이불 속에 누워 눈을 감았고 혜윤은 방문 앞에 섰다.
“레디, 액션!”
혜윤은 종수의 방문 앞에서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이 청초했다. 오늘 처음 제대로 보는 지호의 얼굴 같았다.
못난 질투와 풀이 잔뜩 죽은 서운함, 사실인지 확인도 안 된 뾰족한 이야기 조각들이 그녀의 온 마음을 엉망으로 헝클어트리고 있었다.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을 마음껏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었고.
“컷! 혜윤아, 지금 표정이 너무…… 슬픈데?”
“……죄송합니다.”
“다시 갈게. 약간 애틋한 정도까지는 좋은데 지금은 너무 갔다.”
NG를 알리는 민우의 목소리에 지호가 눈을 떴다. 왜인지 정말 눈물이라도 떨굴 것 같은 혜윤의 눈. 시선을 내리니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왼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대체 왜…….’
낮은 한숨을 쉰 지호가 잠시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불 속에 있는 지호의 손도 혜윤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시 갈게요. 레디, 액션!”
‘장혜윤, 정신 차리자. 민폐 끼치지 말고.’
혜윤이 힘겹게 모은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침대맡에 다가가, 지호를 바라보고, 고개를 숙이는 것까지.
딱 거기까지.
고개를 숙이자 지호의 체향이 점점 진하게 온몸으로 흘러들었다. 두 입술 사이가 한 뼘쯤 가까워지자 멈칫.
“……컷!”
“…….”
“음…… 혜윤아. 뭔가 지금…… 좀 힘든 거지?”
“……네.”
“그래. 그럼 우리 밥 먹고 이어가자. 그래도 괜찮으니까. 한 시간 쉬었다 갈게요!”
기가 죽은 건지 그녀는 바닥으로 사그라들듯 작아져 있었다. 그 얼굴을 보던 민우가 더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여기저기 웅성대며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호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혜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호도 여기까지였다.
모른 척 기다려 줄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
***
“혜윤아, 너 아직 메시지 못 봤지?”
“응. 무슨?”
민주는 도시락 위에 젓가락을 턱 내려놓았다. 옆에 놓인 핸드폰을 톡톡 건드리더니 혜윤도 함께 있는 단체방의 새 메시지를 보여준다. 발신자는 우준이었다.
[얘들아, 혹시 안지호가 나 찾아? (오후 12:47)]
“큭큭. 이거 미친 거지?”
“하아…… 정말 우준이까지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혜윤은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누가 제 가슴을 밧줄로 죄는 듯 답답하기도 했다. 분명 지금쯤 지호도 눈치챘을 게 분명했다. 자신이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다. 처음부터 알았겠지.
“장혜윤, 편하게 해. NG 그만 내고.”
“……응.”
“이럴 땐 우준이 말을 믿는 것도 방법이긴 하겠다.”
“무슨?”
민주가 엉큼하게 웃으며 혜윤을 훑었다. 계속되는 NG의 원인이 단지 톱배우를 상대로 하는 첫 스킨십일 거라 생각한 그녀였다.
“진짜 안지호를 게이라고 생각하라고. 그럼 어려울 거 없잖아, 입 맞추는 거.”
“하아…….”
민주는 명쾌한 답이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물론 혜윤의 한숨은 더 깊어졌지만.
“그런데 민주야. 너 오늘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아, 어제 잠을 좀 못 잤어.”
“너는 왜?”
“너는? 너도 못 잤어? 왜?”
유독 눈 밑이 어두운 민주를 걱정한 혜윤이었지만, 굳이 제 상황만 더 명확히 알려주게 된 꼴이었다.
“그냥 뭐…… 아무튼, 왜?”
“어제 민석이 때문에 집이 시끄러웠거든. 어휴…….”
민석이는 민주의 남동생이다. 당연히 20년 넘게 함께한 친구였으니 그녀의 동생 또한 혜윤과도 오래 본 사이였다.
“민석이가 왜?”
“아, 몰라 몰라. 오늘도 한바탕 할 것 같은데…… 내일 말해 줄게.”
“음…… 알았어. 밥 먹고 차에 가서 눈 좀 붙여. 정말 피곤해 보인다.”
촬영장에서 쏟아지는 화려한 이야기들에 늘 활기가 넘치던 민주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무리 피곤하다 해도 곧 이어질 입맞춤 촬영을 절대 사수했을 텐데, 고개를 주억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야겠다. 나 30분만 자고 갈게.”
“아니야. 한두 시간 푹 자고 와. 필요하면 연락할 테니까. 응?”
“하아…… 그럼 좀 잘까.”
혜윤은 자신을 챙기느라 피로도 참아내려는 민주가 안쓰러워, 고개를 양옆으로 까딱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둘 다 키득대며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민주를 차까지 데려다준 뒤 대기실로 돌아오는 길. 20분쯤 남았으니 양치를 하고 세트장으로 돌아가면 적당히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천천히 화장실로 걸어가며 쌓여가는 메시지를 봤다.
민주는 포기한 건지 오로지 자신에게 매달리는 우준의 메시지가 하나같이 별로였다.
[다음에 촬영장 가도 되려나. (오후 1:30)]
[유부남인 척을 해볼까? 결혼반지 같은 걸로? (오후 1:38)]
“이게 진짜…….”
그는 혜윤의 마음을 할퀴는 조각들이 잠잠해질 틈을 주지 않았다. 금방 또 촬영이 시작될 텐데 다시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혜윤아, 나 운동을 조금 줄일까? 지금 내 상태가 남자가 봐도 치명적이란 거잖아. (오후 1:40)]
“큭큭. 김우준 진짜 못 말리겠네.”
화가 나고 답답한 와중에도 그의 기발한 상상력에 헛웃음이 났다. 피식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복도 끝에서 제 쪽으로 걸어오는 남자.
지호였다.
‘아…….’
그의 형체에 웃음만 멈춘 게 아니라 숨도 멎을 듯했다. 단둘밖에 없는 막다른 길. 혜윤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굳혔다. 하지만 금세 다시 발을 뗐다.
보자마자 가던 걸음을 멈추는 건, 너무 노골적이었으니까.
그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대체 다음 촬영을 어찌 할 수 있을지 문제였다. 잠시 곁눈으로 본 그의 평온한 표정.
‘언젠가 봤던 얼굴 같은데…….’
어딘지 낯설기도 하고 익숙한 눈빛. 거짓 열애를 인정하기 하루 전, 그녀를 지키기 위해 지었던 표정이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두꺼운 막이 쳐진 눈빛.
두 걸음쯤으로 가까워지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입을 꼭 다문 그녀가 어색하게 눈인사를 했고, 그대로 스쳐 가려던 참이었다.
탁-
당연히, 그는 스쳐 갈 생각이 없었지만.
지호가 혜윤의 손목을 잡아 걸음을 세웠다. 어깨를 움찔거린 혜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평소보다 조금 더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언제나처럼 듣기 좋았다.
“……아, 아니요.”
“그런데 왜…… 하루 종일 눈을 피하지?”
“그,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응. 그냥 뭐.”
이마 위로 포개지는 온온한 채근에 혜윤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완벽히 겹치자 엷은 미소와 함께 지호의 입술이 부드럽게 열린다.
“그다음 말을 알아야…… 내가 달래주죠.”
이유 없는 무례함도 그게 혜윤이라면, 몇 번은 감싸줄 수 있다는 듯이.
그때, 고요한 복도에 그녀의 핸드폰이 다시 징징거렸다. 긴장한 탓에 화들짝한 혜윤이 핸드폰을 올려봤다. 여전히 맞은편 손목은 지호에게 잡혀 있는 채로.
[안지호랑 키스신 찍는다고? 민주랑 통화함. (오후 1:46)]
혜윤은 화면 속에 유독 또렷이 보이는 지호의 이름에 뜨끔했다. 허둥거리며 재빨리 손을 낮추려 했지만, 손가락마저 운동신경이 좋은 건지 우준은 메시지조차 날쌨다.
[미쳤네. 하기 싫다고 해. (오후 1:46)]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모든 문장들을 그녀만 본 건 아니었다. 지호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