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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하나, 둘, 셋, 그리고 (24/110)


24. 하나, 둘, 셋, 그리고
2022.08.21.


짙게 내려앉은 눈빛 밑으로 한쪽 입꼬리가 기분 나쁘게 올라선다. 장황하지 않은 문장력을 칭찬해야 하나. 짧은 한 문장, 한 문장이 지호의 눈과 마음에 확연히 새겨졌다.


“……못 본 척하기엔 너무 봐 버렸네.”

 
혜윤은 빠르게 핸드폰을 내리고 다시 지호를 봤다. 한 사람을 에워싼 온도가 차갑게 식어가는 과정이 선명히 보였다. 어떻게든 그러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까지.


“아, 이건 친구가…… 괜히 걱정돼서 그런 것 같아요. ……정말 괜히.”

“그렇구나.”

 
이 상황의 어디가 걱정스러울 수 있는 걸까. 단지 친구 사이라면. 지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 이해의 여부는 사실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지금 다시 원래대로 씬을 바꾸자고 하면, 제가 감독님께 말씀드릴게요. 거기까진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겠네요.”

“아, 아니에요.”

“눈도 맞추기 싫은 것 같은데…… 입은 맞출 수 있겠어요?”

 
위로 치미는 날 선 감정을 내치기 위해 지호는 살짝 고개를 털었다. 그의 말에 혜윤이 힘겨운 진심을 전했다.


“싫은 거 아닌데…….”

 
아쉽게도 지호에게 가닿진 못하겠지만.


“당연히 좋은 것도 아니고.”

 
분명 옅게나마 웃고는 있는데 그 미소가 너무 서늘해서, 낯설어서, 혜윤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작은 목소리만큼이나 기운 없는 고개가 푹 숙여졌다.


“……자꾸 실수해서 미안해요.”

 
지호 또한 혜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가뜩이나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면서 눈치 본답시고 더 움츠러드는 몸짓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유도 모른 채 벌어진 상황이었기에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제일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자기 자신이었다.

저 아이 같은 여자를 조금 더, 수십 번이고 더, 넓게 품어주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주제넘게 달래줄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으니까.”

“…….”

 
또한 어떻게든 짓이기려 애써도, 입술 새로 빠져나가는 냉정한 말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사 구분은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장혜윤 작가님.”

 
혜윤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민우가 말했던 지호의 선이 무엇인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곁에서 본 게 아니라 스스로 느꼈다는 게, 너무 속상했다.

여린 입술에 피가 밸 정도로 꼭 깨물고 있는데, 마침 그녀의 뒤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선을 올려보니 지호도 제 뒤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인다. 옅은 미소와 함께.

선을 그어둔 친절. 조금 전 자신에게 보인 것과 같았다.


“아…….”

 
그리고 그제야, 지호는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줬다. 단지 손목일 뿐인데, 지호가 제 마음을 놓은 것처럼 가슴이 시렸다. 몸을 옆으로 비켜주며 까딱이는 고갯짓. 혜윤은 아무 말 없이 가던 길을 걸었다. 작은 발이 너무 무거웠다.

***



“혜윤아, 밥은 잘 먹었어?”

“네.”

“……이젠 좀 괜찮고?”

 
오후 촬영 준비가 끝난 세트장에서 민우는 혜윤의 얼굴을 살폈다. 쉬고 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어째 표정이 더 슬퍼 보여서.


“……네.”

 
그 한 글자짜리 거짓말하는 게 뭐 저리 힘들까. 민우는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봐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프로들끼리 모여서 하는 일이었으니.


“그래. 그럼 촬영 들어간다? 가볍게 딱 입만 맞춰. 원테이크로 안 가고 앞뒤는 붙여서 써도 되니까. 일단 중요한 장면만 하나 해결해놓자.”

“네.”

 
더 작아진 어깨를 툭툭 칠 때, 지호가 세트장 안으로 걸어왔다.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지호를 살폈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는 항상 온화한 표정일 뿐이니까.


“지호 씨, 촬영 시작할게요.”

“네. 가시죠.”

 
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지호는 침대에 누웠다. 혜윤과 잠시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살짝 웃어줬다. 물론 그녀는 단번에 알았다. 그 웃음은 늘 봐오던 게 아니라, 정말 예의상이란 걸.


“더 이상 NG는 없었으면 해요.”

 
그리고 방문 쪽으로 걸어가려는 혜윤을 향해 그가 낮게 읊조렸다. 뒤통수에 꽂히는 그의 말투가 따뜻한 것 같아 슬며시 뒤를 돌아봤지만, 그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레디, 액션!”

‘딱 셋만 세면 돼. 더도 말고 셋.’

 
혜윤은 속으로 끝도 없이 되뇌었다. 침대로 걸어가고, 잠시 서서 눈감은 지호의 얼굴을 바라보고, 고개를 낮추는 순간까지.

숨을 한 번씩 들이쉴 때마다 그의 포근한 향이 훅훅 치고 들어오는 통에 아득할 지경이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점점 짙어지고, 점점 미치겠고.

그리고 그의 붉은 입술에 제 입술이 닿은 순간.

녹아내릴 듯한 말캉한 촉감에 잠시 호흡이 멈췄다. 닫힌 폐부에 이미 가득 들어찬 지호의 향이 그녀가 어렵게 쌓아둔 것들을 가벼이 부숴대고 있었다. 이성이라던가, 다짐이라던가.


“하아…….”

 
결국 숫자는 하나까지도 온전히 셀 수 없었고, 그의 입술에서 제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두 입술 사이의 간격이 1mm, 1cm, 10cm로 순식간에 훅 떨어져 나가려는 순간.

슥-

어떤 큰 손이 혜윤의 뒤통수를 감쌌다. 딱 10cm쯤 떨어진 두 얼굴, 제 머리를 감싸고 있는 악력. 그 힘에 더는 고개를 들 수 없게 된 혜윤이 질겁하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아…….”

“…….”

 
지호가 눈을 뜨고 고요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엔 어떤 감정을 느낄 틈이 없었다. 그가 그대로 제 머리를 눌렀으니까.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에 혜윤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물론 지호는 그때까지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니 혜윤이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 본 건 지호의 깊은 눈동자였다.

입술은 다시 쉽게 맞붙었다.


“……대박.”

“미쳤다.”

“이거 NG 맞죠?”

“조용히 해, 다들.”

 
누구도 상상조차 못 한 장면이었다. 작은 목소리들의 웅성거림이 세트장 곳곳을 가득 메웠고 이 장면이 당연히 NG라는 건 틀림 없었지만, 민우는 컷을 외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지켜볼 뿐.


‘하나, 둘, 셋…….’

 
혜윤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입술에 닿는 감촉과 정신을 놓게 하는 향기 속에서 고작 할 수 있는 건, 처음에 다짐했던 숫자를 세는 일 정도. 하지만 스스로 되뇌었던 셋이 오는 순간에도 지호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아픈 건 아니었다. 머리를 들 수 없을 만큼의 적당한 힘. 힘 같은 온기.


‘넷, 다섯.’

 
그리고 숫자가 다섯이 되자 지호는 손에서 힘을 뺐다. 따뜻이 누르던 온기가 옅어지자 혜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를 예상했는지 지호는 처음 자신이 그녀의 머리를 감쌌을 때의 거리, 딱 거기까지만 혜윤이 고개를 올릴 수 있도록 힘을 풀었다.

코끝이 닿을 듯 닿지 않는, 그 정도의 거리.

그리고 더는 들어지지 않는 고개에 당황한 혜윤이 다시 눈을 뜨자, 지호가 천천히 눈을 뜨는 걸 볼 수 있었다.

깊은 우주로 침잠한 듯한 그의 눈동자에 혜윤의 시선이 빨려 들어갔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참아내면서도, 오늘 온종일 피했던 그의 눈을 바라봤다.


“……딱 이 정도예요.”

“…….”

“이것보다 조금 짧아도 괜찮고.”

 
낮게 가라앉은 지호의 목소리에 그녀만 집중한 게 아니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될 것 같은 느낌에, 촬영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숨죽이고 있었다.


“대답해야죠.”

 
하지만 지호는 오직 한 사람 외엔 관심이 없었고.


“……네.”

 
가녀린 대답을 듣고서야 손에 힘을 모두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녀를 따라 지호도 상체를 일으켰다.


“……그럼 다시 갈…… 까요?”

 
민우는 어느 쪽을 보고 물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둘을 번갈아 봤다. 쩌렁쩌렁 울리던 목소리는 사라진 채 분위기에 압도당한 사람처럼 굴었다.


“아…… 아니면 혜윤아, 10분 정도 쉬었다 가는 게 좋겠으면…….”

“아니요. 바로 가시죠. 이대로 이어 가게.”

 
민우가 침대 옆에 서서 숨을 고르고 있는 혜윤을 봤지만, 지호는 가볍게 쳐냈다. 그러고는 지호의 손이 자신을 등지고 서 있는 얇은 손목을 살짝 그러쥐었다. 어느 우주에서 홀로 방황하는 그녀를 깨우듯.


“……네. 바로 갈게요.”

 
그녀의 대답을 끝으로 촬영은 재개되었다. 혜윤은 이날, 이어지는 어느 장면에서도 NG를 내지 않았다.

***



“NG 때문에 촬영 길어지면 다들 힘드니까요. 강수를 둔 것 같은데, 저도 오늘은 조금 놀랐네요.”

 
혜윤은 슬슬 퇴근을 준비하고 지호는 이어지는 야간 촬영을 준비하는 시간. 이때부터 제일 바빴던 건 봉기였다. 기막힌 지호의 돌발행동에 혹시나 이상한 말들이 새어 나갈까, 그는 여기저기 단속하기 바빴다.


“둘이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일은 무슨.”

 
민우의 가벼운 추궁에, 봉기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분위기가 싸운 것 같던데.”

“에이, 싸우긴요. 잘 지내고 있어요.”

“흐음…….”

“감독님, 그런데 그 씬 잘 나오지 않았어요? 난 너무 좋던데?”

“어휴, 그건 그렇죠. 진짜 오늘 촬영한 것 중에 최고였어.”

 
바뀐 주제에 민우의 의심이 흡족함으로 덮이자 그가 작게 안도했다.


‘차라리 대판 싸웠으면 좋겠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봉기가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작게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후에 찍은 입맞춤 장면이 정말 예쁘게 찍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교적 쉽게 분위기를 잠식시킬 수 있었다.

과정이 지옥 같았어도, 결과가 천국을 그려냈으니.

차에 오르기 전까지 스태프들을 전체적으로 훑어봤지만 크게 동요된 것 같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탁-


“아이고…….”

 
잠시 조수석에 올라탄 봉기가 감춰뒀던 제 감정을 풀어 놓았다. 긴장이 풀렸는지 뒤로 젖힌 고개에 맥이 빠진 것 같았다.

뒷좌석에 앉은 지호는 말없이 창밖을 봤다. 창문 너머에는 멀리 혜윤과 민주가 퇴근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한 사람을 끈질기게 담는다.

가는 길에 스태프가 보이면 웃으며 인사를 하고, 다시 걷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멈춰 섰다가, 친구가 한참 앞서 걸으니 결국엔 강아지처럼 졸졸 뒤를 따르고. 그러다 또 기분 좋은 말을 들었는지 웃으며 친구 옆으로 뛰어가고.

그가 없는 곳에선 원래 알던 혜윤의 모습이었다. 그 온몸으로 뿜어내는 생기를 보고 있자니 살짝 헛웃음이 났다. 저런 여자에게 대체 오늘 무슨 짓을 한 걸까 싶어서.

어떤 이유든 혜윤이 자신을 피하는 게 싫었다. 자제고 나발이고, 그저 남자의 본능이었다.


“……미친놈.”

 
지호가 낮은 혼잣말과 함께 묵직해진 눈을 감았다.


“알긴 아네.”

 
대답이 없으면 아쉬울까 싶어 봉기는 곧장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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