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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궁금한 것 하나 (25/110)


25. 궁금한 것 하나
2022.08.24.



[지호 씨, 오늘 정말 미안했어요. 이렇게라도 더 늦기 전에 사과하고 싶어요. 남은 촬영 잘 마치고 내일 봐요. (오후 10:20)]

 
혜윤은 화면 속에 덩그러니 뜬 노란 말풍선을 바라봤다.


“하아…….”

 
퇴근 무렵인 7시부터 늦은 밤까지. 그녀는 잠시 샤워를 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핸드폰을 부여잡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였다.

‘미안해요.’ 이 짧은 한마디.

그 쉬운 말을 얼마나 많이 지우고 다시 썼는지. 전송 버튼 주위를 기웃거리기만 하던 엄지손가락은, 몇 시간이 지나고서야 큰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혜윤은 오늘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호가 그어둔 선 밖에 서 있고 싶지도, 그가 늘 넘치도록 건네던 다정함을 잃고 싶지도 않다는 것을.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하고 싶다는 소망을.

지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가 좋다는 것. 그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진심을 인정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제 마음을 어지럽히던 뾰족한 이야기 조각들을 가뿐히 뜰채로 건져낼 수 있었다.

물론 몇 조각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아직도 작은 가슴속을 떠돌고 있었지만.


“아직도 안 끝난 건가…….”

 
자정이 넘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아…… 화가 안 풀렸겠구나. 나도 참…… 오늘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답장을 기다렸네.”

 
제 진심을 깨달은 게 크게 와닿아, 오늘 그에게 어떤 무례함을 보였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 조금 씁쓸했지만 잘못한 건 자신이었으니. 눈꺼풀과 함께 유독 길었던 하루를 닫았다.

좋은 꿈은 못 꾸겠지 싶은 마음으로.

***



“고생했다. 근데 매일 이런 식인 건 아니지?”

“응. 오늘 조금 꼬인 거래. 앞으로는 1시엔 끝.”

“그래. 빨리 갈 테니까 눈 좀 붙여.”

 
차에 타자마자 몸을 기댄 지호가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자신도 평소답지 않게 몇 번의 NG를 냈건만, 스태프들마저 우왕좌왕이었다. 그래서 촬영은 새벽 2시가 다 돼서야 끝이 났다.

차가 움직이자 창밖의 풍경들이 빠르게 스친다. 그리고 눈을 감으려다 잠시 핸드폰을 들었다.


[지호 씨, 오늘 정말 미안했어요. 이렇게라도 더 늦기 전에 사과하고 싶어요. 남은 촬영 잘 마치고 내일 봐요. (오후 10:20)]

 
나른한 기분 탓인가, 메시지에서 혜윤의 향기가 나는 착각이 일었다. 사과를 받아야지, 오히려 주고 있으니. 뭐 이렇게 더 챙길 생각은 하지 않고 뚝 잘라 나눠주는 게 쉬울까. 진짜 아이 같지 싶었다.

저 맑은 사람에게 오늘 한 짓을 생각하면 또 기가 막히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혜윤이 단잠에 빠져 쌔근댈 거란 생각이 들자, 그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잘 자야 내일도 열심히 날 피할 수 있겠지.’

 
괜한 알림 소리가 그녀의 잠을 깨울까 싶어 지호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



“민석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촬영장으로 가는 차 안. 오늘도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민주의 입에서 불면의 이유가 튀어나왔다. 듣고만 있던 혜윤의 마음에도 고민이 들어섰다.


“갑자기? 민석이가 충동적인 애가 아닌데…… 왜 그랬지?”

 
혜윤은 자신도 잘 아는 민주의 동생을 떠올리며 눈을 굴렸다. 민주는 골이 아픈지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군대에 있는 동안 생각해보니까 적성에 안 맞는 것 같다나? 아니, 삼수해서 들어가 놓고 할 소리는 아니잖아.”

“아이고…… 부모님도 엄청 놀라셨겠다.”

“그렇지. 그제 밤에 엄마가 고구마 구우려다 집어 던졌어. 그런데 그걸 받더라? 운동 신경은 있네?”

“큭큭. 넌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 답답해서. 오죽했으면 그만두려고 할까 싶다가도 짜증스럽고. 모르겠다.”

 
민주는 싱거운 웃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그 얼굴을 지켜보던 혜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걱정이 얼마나 클까 싶었다.

띠리링-

그때, 핸드폰이 상쾌하게 울렸다.


[네. 촬영장에서 봐요. (오전 7:20)]

“아…….”

 
근심이 앉아 있던 그녀의 얼굴에 한순간 환한 빛이 돌았다. 간절한 눈으로 손에 쥔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방심한 틈에 이렇게 선물처럼 답장이 오다니.

이 분위기에 너무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아, 혜윤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민주가 운전에 집중해서 다행이지 싶었다. 살짝 제 얼굴을 힐끔거리기만 했어도 알아챘을 게 분명했다.

지금 제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

곳곳마다 바쁜 촬영장. 지호와 혜윤도 부엌 세트장에서 각자 대본을 보는 중이었다.


“하아…….”

 
대본을 보던 지호가 긴 숨으로 입가에 번지려는 웃음을 겨우 눌렀다. 피식 새어 나가는 걸 막아보려 입을 맞물어봐도 영 쉽지가 않다. 불현듯 그가 빠르게 혜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또르르 눈을 굴리는 그녀였다.


 
혜윤은 오늘 만나자마자 쭉 이런 식이었다. 제 시선이 다른 곳에만 있으면 저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마주칠 법하면 눈을 돌리는데,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시 원래의 그녀로 돌아왔다는 걸.

어제는 불안했고, 오늘은 부끄럽고. 대체 또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저 작은 머리로 매일 어떤 세계를 만들고 부수는 걸까, 귀엽긴 했다.


“작가님.”

“……네?”

 
뭐가 궁금한 건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옆모습만 바라보는데,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이쪽에서도 상을 주고 싶었다. 그녀가 어제의 싸움에서 이겨낸 보람이 있게. 어떤 싸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랑 놀이 하나 할래요?”

“놀이요? 갑자기 무슨…….”

 
대본을 보며 말을 걸길래 혜윤은 다행이지 싶어 그를 바라봤다. 반듯한 옆모습이 참 멋있었고, 예상 못 한 이야기에 솔깃하기도 했고.


“궁금한 거 하나씩 물어보기 놀이?”

 
그리고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혜윤의 호기심과 집중력을 아주 잘 이용했다. 한순간 고개를 홱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뜨끔한 혜윤의 상체가 슬쩍 뒤로 밀렸지만 그래도 이젠 눈을 피하지 않았다. 기특하게도.


“그, 그런 놀이도 있어요?”

“응. 그런 거라도 해야 나 좀 그만 쳐다볼까 싶어서.”

“아…….”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지호를 보며 혜윤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나름 몰래 본다고 노력한 건데 역시 속일 수 없는 상대였나보다. 잠시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우물쭈물 말문을 열었다.


“……티가 났어요?”

 
지호는 남아 있는 반대쪽 입꼬리까지 마저 올렸다. 역시 거짓말은 안 하지. 안 봤다고 한 번쯤은 잡아뗄 법도 한데.


“어제 것까지 이틀 치 몰아서 쳐다보는데, 그럼 모르겠어요?”

“아…… 티가 나는구나…….”

 
갈색 눈동자가 그를 향해 수줍게 물결쳤다. 뒤따라 조그마한 혀끝이 빼꼼 입술 사이를 적시고 사라지더니, 그 틈으로 하룻밤을 힘들게 쥐고 있었을 마음이 새어 나왔다.


“어제는…… 미안했어요.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진짜로.”

“…….”

“얼굴 보고 한 번 더 말하고 싶었어요.”

 
그 조심스러운 사과에 지호의 입술이 잠시 들먹댔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하려다가, 그냥 도로 삼켜버린다. 안 받겠다고 돌려보내면 버리긴커녕 가슴 한구석에 두고 지낼 것 같아서.

대신 이쪽도 섭섭지 않게 챙겨주기로 했다.


“……나도 어제 같은 일은 없도록 할게요.”

 
낮은 목소리와 함께 그의 시선이 혜윤의 발그레한 뺨을 어루만졌다. 혜윤은 그가 제게 쏟는 모든 것들이 좋았지만, 지금 그 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지호 씨가 뭘요. 내가 잘못한 건데…….”

“속상했을 거잖아.”

“…….”

“무심하게 굴어서.”

 
그의 은은한 미소에 혜윤의 눈가에 울컥 물기가 돌았다. 대체 이 사람은 나를 어디까지 들여다보는 걸까. 눈의 가장자리까지 축축하게 젖어 들 것 같을 때, 지호가 상체를 훅 숙였다.

바짝 가까워진 깊은 눈동자에 익숙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귀여운 장난기와 함께.


“그래서…… 할까, 말까.”

“뭐, 뭘요?”

“궁금한 거 하나씩 물어보기 놀이.”

 
혜윤은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자신이 원래대로 돌아오니 그도 원래의 다정함을 보였다.


“꼭…… 한 개만 물어봐야 해요?”

“음, 궁금한 게 많은가 보네.”

“……네.”

 
지호는 톡 내민 아랫입술과 작은 끄덕임을 바라보았다. 저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은데, 원하는 걸 해주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 욕심을 채우기로 했다.


“일단은 한 개씩만.”

 
제 대답에 혜윤의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가지고 싶은 장난감은 많고, 살 수 있는 건 한 개고. 동심이 어린 표정에 고민이 많아 보였다.


“그런데 지호 씨도 저한테 궁금한 게 있어요?”

 
그 와중에 옆 사람 걱정까지 해 주다니. 착하게.


“네. 확실히 알아야겠어서.”

“…….”

“이젠 좀…… 두고 볼 수가 없네.”

 
낮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에 진지함이 드리웠다. 그 목소리에 장난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혜윤은 살짝 놀라 말을 줄였다.


“뭘까요…… 그럼 지호 씨 먼저 해요.”

 
그녀는 얌전히 지호를 올려봤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보던 눈빛과는 많이 달랐다. 지호의 눈 속엔 온기는 사라지고 냉정함과 집요함이 뒤섞여 있었다.


“혹시 우준이라는 친구 좋아해요?”

“……네?!”

“일방이든 쌍방이든…… 여지가 있는 사이인가?”

“우와아아! 말도 안 돼요! 절대!”

 
얼마나 무서운 질문을 하려나 한껏 집중했는데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생각지도 못한 이름. 그녀는 기도 안 찬다는 듯 소리를 빽 질렀다. 그 앙칼진 소리에 스태프들 모두 지호와 혜윤을 쳐다봤다.


“아, 죄송합니다.”

 
수십 명에게서 한꺼번에 쏟아지는 송곳 같은 시선에 혜윤이 굳어 있자, 지호가 자연스럽게 세트장 밖으로 고개를 숙였다. 질문할 때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과를 하는데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뭘 그렇게까지.”

“진짜 말이 안 되니까요. 절대, 절대 절대!”

“알았어요, 그만.”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었는지 조금씩 혜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흥분에 지호가 그녀를 달랬다. 또 큰소리가 나올까 두 사람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눈엔 둘의 감정이 명확히 보였다.

화가 난 혜윤과 즐거운 지호로.


“이제 작가님 차례.”

 
지호는 다시 온기를 솔솔 풍기며 혜윤을 바라봤다. 이쪽은 아주 만족스러운 답을 들었는데, 자신도 그녀에게 비슷한 행복을 줄 수 있길 바라며.


“그럼…… 지호 씨는요?”

“나? 나 뭐?”

 
질문치고는 목적어도, 동사도, 모두 빠져 있는 허술한 문장.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의 가벼운 움직임과는 달리 혜윤의 눈은 진심으로 폴폴 끓고 있었다.


“지호 씨도…… 우준이 좋아해요?”

“……응?”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이었음에도 지호는 처음 듣는 외계어처럼 한 글자도 알아듣지 못했다. 일단 말 자체가 이해되지 않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이런 질문이 실례인 건 아는데요…… 너무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네?”

“……상처가 됐다면 미안해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혜윤의 표정이 더 혼란스러웠다.


“대체 무슨 소리예요?”

 
정말 저 작은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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