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예고편
(26/110)
26.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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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예고편
2022.08.28.
“와, 진짜…….”
생각도 못 한 혜윤의 말에 지호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일 마지막에 진심을 가득 눌러 담은 말이 압권이라.
‘그래도 저는 정말 상관없어요! 지금처럼 지호 씨랑 잘 지내고 싶어요.’
지호의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조용히 보던 혜윤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눈을 요리조리 굴리더니 대충 상황 파악을 끝내놓은 모양이었다. ‘단단히 헛짚었구나.’라는.
“저기…… 제가요. 생각도 그렇지만…… 분위기도 잘 읽거든요.”
바짝 붙어 있어야만 들릴법한 혜윤의 목소리가 점점 더 기어들어 갔다. 지호는 우물쭈물하며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혜윤을 지켜봤다. 제 몸만 한 망치를 들고, 작은 머릿속에 밤새 지어둔 세계를 열심히 부수고 있을 그녀를.
“그래서, 지금 이 분위기는 어떻게 읽었어요?”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고 끙끙거리는 얼굴 또한 오래 보고 싶은 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지 싶었다.
“제가 아주 많이 오해한 거라고…… 읽었습니다.”
“큭큭. 미치겠네.”
아이 같은 여자가 어른처럼 딱딱한 말투로 반성의 티를 팍팍 내주니, 웃음이 안 나올 수 없었다.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녀의 상상력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
“오호, 오늘은 둘 다 기분 좋아 보이네요?”
그리고 민우의 큰 목소리가 부엌 세트장에 울렸다. 그는 지호와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두 사람을 살폈다. 지호야 설명이 필요 없었고, 딱딱하게 굳은 채로 서 있는 혜윤마저 어제와는 달라 보였다.
“지호 씨, 어제 너무 늦게 끝났죠. 정말 미안해요. 앞으로는 시간 꼭 지킬게.”
“제가 한 번에 안 가고 NG 내서 늦어진 거죠.”
“아, 뭐 그렇게까지 겸손해. 잠도 거의 못 잤죠?”
사실상 두 사람은 몇 시간 만에 다시 만난 것과 다름없었다. 거기에 배우는 촬영 전 준비 시간까지 보태지니, 민우는 지호의 피곤함이 극에 달했을 거라 짐작했다. 물론 얼굴을 보자마자 아닌가 싶기도 했다.
피곤한데 저리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싶은 의문. 그렇지만 넉넉히 쳐도 4시간은 잤을까 싶은데.
“괜찮아요.”
웃음기가 묻어 있는 그의 목소리가 민우와 혜윤의 귓가에 흘러들었다. 그리고 듣기 좋은 목소리에 혜윤이 그를 보려던 순간, 제 머리 위에 익숙한 큰 손이 내려앉는다.
“혜윤이 때문에 잠이 확 깨서.”
지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혜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목소리만 더해지면 특별하게 들리는 제 이름과 따뜻한 손길. 놀란 혜윤이 교복 치마를 꼭 쥐었다.
민우의 눈이 음흉하게 두 사람을 흘기자 그녀의 주먹에 더 힘이 들어갔다.
“와, 뭐야 진짜? 사실 난 어제 둘이 싸운 줄 알았어요. 괜히 오해할 뻔했네.”
지호는 쓰다듬던 손을 천천히 바지 주머니 속에 가두며 혜윤에게 눈을 내렸다. 민우의 은근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녀에게 넘기듯이. 혜윤이 그의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며 부끄러운 입을 조심조심 열었다.
“에이…… 안 싸웠어요, 저희.”
대답은 민우에게 하면서도, 서로 눈을 마주하고 있는 건 여전히 지호와 혜윤이었다. 그래서 민우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두 사람을 집요하게 훑었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는 지호를 볼 수 있었다. 이쯤 되니 이어지는 대답이 정말 자신에게 건네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맞아요. 늘 혼자 싸우지.”
“아…….”
“그래도 항상 이기고 오는 것 같아서…… 예쁘긴 해요.”
그윽하게 온몸을 어루만지는 눈길. 지호가 그녀를 많이도 아낀다는 건 타인인 제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놀려볼까 싶었던 의지도 가볍게 눌러버리는 한 남자의 애정. 민우는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나 갑자기 우울해졌다…… 갈게.”
“아, 선배. 그런 거 아니에요.”
“난 또 가뜩이나 어제 분위기 별로였는데 지호 씨 새 영화 예고편까지 기름을 붓는구나 했어.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민우는 터덜터덜 뒤돌아 걸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눈꼴시다며 뒤돌아섰지만 마음속으론 다행스러웠다. 주연 배우들의 관계가 좋아야 촬영장의 분위기도 올라가니 말이다.
그의 얼굴에 안도 섞인 부러움이 흘렀다.
***
<씬 27. 종수네 집 부엌. 등교 전 아침.
종수. 식탁 위에 놓인 여러 반찬과 오이무침, 김 나는 물컵을 보는.
희수. 자기 자리 쪽에 놓인 계란프라이와 오이무침의 접시를 바꾸려 드는.
희수 : (의자에 앉으며.) 너 오이는 못 먹는다며. 삼촌이 말해 주셨는데 냉장고에 두면 썩을 것 같길래 했어. 먹지 마.
종수 : (부끄러워하며. 당황하며.) 아니에요. 어릴 때 얘기지. 아빠는 무슨 이상한 소리만 하고.
희수 : (웃으며.) 지금은 안 어리고?
종수 : (젓가락으로 오이 집으며.) 당연하죠.
종수 : (N) 따뜻한 물 한 컵과 짝이 맞는 젓가락, 접시에 조금씩 덜어놓은 반찬들, 오이무침. 내게 누나는 그런 것들이었다. 하나같이 처음인 것들. 낯설고 설레는 것들. 그래서 소중한 것들.>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촬영도 부드럽게 진행됐다. 오후 촬영 중엔 식사 장면도 있었기에 둘은 식탁에 마주 앉아 가볍게 리허설을 끝냈다.
“그런데 친구분은 안 보이네요? 어제도 잘 못 봤던 것 같은데.”
대사를 맞추고도 여유가 생기자 지호가 세트장 밖을 가볍게 훑었다. 그 목소리에 대본을 보던 혜윤도 고개를 들었다.
“네. 차에서 잠깐 쉬고 있어요.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무슨 일 있어요?”
“아…… 큰일은 아니고요. 동생 걱정하느라. 누나거든요.”
“그렇구나.”
지호가 작게 대답했다. 큰 도움이 필요한 촬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의지할 것 같은 사람이 안 보이는 게 내심 신경 쓰였다.
“혹시 지호 씨도 형제 있어요?”
가벼운 대화 속에서 흥미로운 단어를 발견한 혜윤의 눈이 반짝거렸다.
“여동생이 한 명 있죠.”
그 반짝임을 눈치챈 지호가 대본을 덮었다. 저렇게 얼굴빛으로 말하는 법은 어디서 배웠을까. 지호는 혜윤이 어떤 말을 할지 듣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밝은 소리를 낼지도.
“엇! 지호 씨 닮았으면 엄청 예쁘겠다!”
누가 예쁘다는 건지 헷갈릴 만큼 살짝 홍조를 띤 얼굴이 지호를 뚫어지게 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웃음이 났지만, 말을 잇는 게 조금 망설여졌다. 썩 반기지 않을 대답 같아서.
“예쁘긴 한데 닮진 않았어요.”
“아, 분위기가 조금 달라요?”
“네. ……아버지가 달라서 그런가.”
“아…….”
그가 혜윤의 벌어진 입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제 눈빛을 의식해 서둘러 입은 다무는데, 갈색 눈에 당황이 고여가는 게 확연했다. 계속 놔두면 또 작은 머릿속에 잠시 상상을 멈춘 아이가 우당탕 잠에서 깰 것 같았다.
지호가 목덜미에 손을 올리며 대꾸했다.
“남자친구한테 너무 관심이 없네.”
“네?”
“전 국민이 다 아는 것 같던데. 내 이름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거고.”
악력을 높이던 그가 장난 섞인 목소리로 혜윤을 두드렸다. 미안하고, 어색하고, 부끄럽고. 여린 감정들로 일렁일지언정 더는 눈을 피하지 않는 그녀를 가만히 보았다.
무안함을 어떤 진심으로 이겨내려나 기대하면서. 분명 이겨낼 테니까.
“난 그냥…… 지호 씨가 말해 주는 것만 듣고 싶어요.”
식탁을 문질거리는 작은 손끝 위로 수줍은 진심은 느릿느릿 떠듬떠듬 흘러나왔고.
“그렇구나…… 알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네. 그건 절대.”
이렇듯 단호한 진심은 용감하게 와락 달려 나왔다.
어떤 식으로든 품어둔 마음을 고스란히 전하는 여자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방식이 제겐 감동이란 걸, 마음의 주인은 모르겠지. 그래도 괜찮았다.
지호의 시원시원한 눈매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그래요. 그런데 난 동생이랑 사이가 좋은 편이니까, 이제 자책은 그만하고.”
“……네.”
그제야 혜윤도 비슷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참…… 오늘 새 영화 예고편이 나왔거든요.”
“와아! 집에 가서 꼭 볼게요.”
분위기를 바꾸려고 건넨 새로운 주제에 혜윤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기대보다 더 반가워해 주는 것 같아 지호는 조금 더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영화가 액션이기도 하고, 기존에 내가 했던 역할들보다 자극적이라서 그런가…… 예고편 반응 중에 작가님 이야기가 많다더라고요, 매니저 형이.”
“제 이야기요?”
“뭐, 말장난 같은 거겠죠? 여자친구는 싫어하겠다 같은. 혹시나 그런 글 봐도 괜히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지호의 손가락이 식탁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언론에 혜윤이 오르내리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애썼지만, 대중의 반응까지는 자신의 영역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아아, 그럼요. 걱정 말아요. 어차피 지호 씨가 맞는 장면이 나와도…… 그거 진짜 맞는 건…… 아니죠?”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는 달리, 한 글자 한 글자 이어질 때마다 걱정이 그득해지는 눈망울이었다. 진짜 맞은 거라고 하면 곧 울 것 같았다. 지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네. 합 맞춰서 찍는 거니까.”
그리고 그의 대답이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이 혜윤도 활짝 웃는다.
“아, 다행이다! 그럼 기분 하나도 안 나빠요! 기대된다…….”
혜윤은 상기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아 꼭 쥐었다. 기대되는 마음이 발끝까지 번진 모양이었다. 식탁 의자 밑에 놓인 두 발이 동동거리는 게 귀여워, 지호 역시 웃었다.
***
늦은 밤, 아늑하게 침대에 누워 지호의 영화 예고편을 보려던 혜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제보다 수월한 촬영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왜 영화 예고편에 자신의 이야기가 많았는지를 단 10초 만에 알 수 있었다.
“이게…… 뭐야…….”
30초 중 10초는 넓은 집무실 책상 위에 서둘러 여자를 눕히는 지호가 있었다. 주체가 안 되는 욕정에, 어지러운 책상을 다 밀어제치고, 옷을 찢어 벗기려는 것까지.
다음 10초에는 누군가를 미친 듯이 때리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마지막은 전체적인 추격을 풀샷으로 그려내며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로 마무리.
“엄청나게…… 엄청나다…….”
끝도 없이 달린 댓글들엔 지호의 남성미를 향한 앓는 소리들이 다수였지만, ‘전 국민 장혜윤 눈치 보기.’라거나 ‘아무리 연기라도 여자친구 열받겠다.’ 같은 걱정 섞인 장난이 많았다.
‘그런데 영화가 액션이기도 하고, 기존에 내가 했던 역할들보다 자극적이라서 그런가…… 예고편 반응 중에 작가님 이야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매니저 형이.’
몇 시간 전, 지호의 덤덤한 말투가 귓가를 뱅글뱅글 돌아다녔다.
“씨이…… 말의 순서가 잘못됐구만! 액션이 문제가 아닌데! 자극적인 게 문젠데!”
또한 해맑게 확언했던 자신의 목소리까지 끼어드니.
‘그럼 기분 하나도 안 나빠요! 기대된다…….”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지호가 말의 순서를 제게 잘못 주었듯, 자신이 말한 단어들의 순서도 섞어놔야 할 것 같았다.
‘기분 하나도 안 나빠요. 기대된다.’가 아니라 ‘기분 나빠요. 하나도 안 기대된다.’로.
빨리 내일이 왔으면 싶었다. 혜윤은 내일 지호를 만나면 한껏 째려보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