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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서운한 것 하나 (29/110)


29. 서운한 것 하나
2022.09.07.


혜윤은 꼼짝없이 굳어버렸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수학 문제를 바라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온몸을 찬찬히 내리훑고 있다는 것을. 눈을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스르르 살랑이는 머리카락 한 올과 몰래 내쉬는 무형의 숨소리. 이런 것만으로도 자신을 간파하는 지호였다.

그러니까, 제 마음이 들통날까 걱정했던 일주일 전의 미래가 바로 지금이었다.


“난 내가 작가님을 잘 읽는다고 생각하는데…….”

“…….”

 
아이를 달래듯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이미 다 풀어버린 문제일 텐데, 그는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려는 것 같았다.

혜윤이 여전히 들지 못한 고개 밑으로 불안함 대신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혹시 틀린 적이 있나요?”

“……아니요.”

“그렇구나.”

 
지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입가에 걸린 만족스러움의 무게가 커지는 탓에 뺨을 받친 팔이 저릿한 기분이었다. 완벽히 흡족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쩌면 저렇게 끝까지 솔직할까. 똑똑한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예쁜지 알고 저러는 걸까 싶어서.


“이제 그만 얼굴 들어요.”

“…….”

 
혜윤은 밀랍 인형처럼 손끝까지 굳어서, 톡 건드리면 앉은 모양 그대로 옆으로 넘어질 것 같았다. 말만 솔직한 게 아니었다. 온몸이 저러니 눈이 안 갈 수가 있나. 눈보단 마음이 더 가서 문제지만.

그녀가 결국 어렵게 고개를 돌려 지호를 봤다. 그의 가벼운 질문이 해일처럼 작은 마음을 다 뒤집어 놓았기에, 맞닿아 있는 팔은 감각도 없었다. 그 와중에 다정하게 웃는 모습은 눈에 확확 박혔고.


“작가님,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렇게 쉽게 읽혀요?”

 
끈질긴 시선 끝에 일순간 걱정과 알 수 없는 분노 같은 게 비추기도 했다.


“아니요…… 지호 씨한테만 자꾸…… 다 들키는 거예요.”

“다행이네.”

 
최근 들은 말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이야기 같아, 지호는 리듬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밤을 연달아 새던 촬영 때도 이런 생각이 들진 않았는데, 오늘은 촬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이 여자가 눈치 보는 걸 조금 더 지켜보고 싶어서.

그럴 수 없는 아쉬움을 지워내고자, 그가 손으로 턱을 쓸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럼 이제 그 감정은 잠깐 나한테 넘겨요. 종수한테 써먹게. 작가님은 희수 준비하시고.”

“……어떤 감정이요?”

 
민망함에 손톱 끝으로 식탁을 슬근대면서도 혜윤은 되물었다. 그래도 한번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읽었는지. 마침 확인해보겠냐는 듯이 그가 손을 내밀기도 했으니까.

어슴푸레한 미소 밑으로 팔짱이 끼워진 넓은 가슴만큼이나, 그의 목소리에도 너그러움이 배어 있었다.


“조금 좋고 많이 불안한 감정.”

 

***

<씬 47. 하굣길.
종수 : (아쉬워하며.) 뭐라고? 예원이가 전학을 갔다고? 아주아주 먼 곳으로 가서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으으, 이럴 순 없잖아! 이러고 싶은데!”

 
일요일 아침. 영업을 안 하는 그녀의 카페에서, 혜윤은 본심이 시킨 손가락의 만행을 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결국엔 금방 노트북 화면에 적힌 글자를 톡톡 지워냈다. 어제도 종일 쉬었지만 3개의 장면을 추가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둘을 붙여 놔야 하는데, 싫어서 그랬지.

타닥- 타닥-


“싫어요. 싫어요. 하기 싫어요.”

 
잔뜩 나온 입술은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지만 그래도 겨우 해냈다. 모난 감정일지언정, 일은 일이니까.

함께 하는 하굣길에서 예원이 종수에게 팔짱을 끼려는 장면, 무심하게 약을 건네는 종수에게 쑥스러움을 느끼는 장면, 서로를 향한 개구진 대화 속에서 예원의 애정이 보이는 장면. 그리고.


‘혜윤아, 셋이 만나는 씬도 하나 넣어.’


‘셋이면…… 저까지요?’


‘응. 직접적인 대화는 없어도 되니까 우연히 마주치는 걸로. 시선이 예원이는 종수, 종수는 희수, 희수는 덤덤. 이게 좋겠지?’

 
민우의 요청으로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친 세 사람의 장면까지 추가됐다. 그러니 다시 말하면 세 사람이 함께 촬영하게 된다는 것인데, 벌써 부담스러웠다.


[선배, 추가된 씬 보내요. 혹시 수정 원하는 부분 있으면 말해 주세요. (오전 10:45)]

 
마음먹고 앉으면 이렇게 30분 안에 끝날 일을, 그 마음 먹는 데만 하루를 쓴 혜윤이었다.


[오, 좋다! 이렇게 가자. 내가 지나 씨한테 전할 테니까, 네가 지호 씨한테 전해 줘. (오전 10:55)]

“씨이…… 이게 뭐가 좋아.”

 
재깍 온 민우의 답장에 긍정이 가득 들어찼지만, 혜윤은 그것 또한 심통이 났다. 그래도 생각지도 못한 지호의 이름에 곱지 못한 마음이 잠시 가라앉기도 했다.


[지호 씨, 추가된 씬 보내요. 혹시 수정 원하는 부분 있으면 말해 주세요. (오전 11:00)]

 
메시지를 보내놓고 화면을 쭉 훑으니 늘 한결같은 지호의 대답이 보였다.


[네. 그날 봐요.]

[네. 잘 자요.]

[네. 촬영장에서 봐요.]

 


“자동완성…… 이런 건 아니겠지?”

 
마음만큼이나 짧지 않은 자신의 메시지에 비해 지호의 답은 하나같이 간결해 보였다. 감정이 없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이제 보니 모든 문장이 다음 말을 이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더 이상 답장은 하지 말라는 것처럼.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까지 곱씹지 말걸. 괜히 또 미운 마음이 올라오고 있었다.

서운함이.


 

***



“오늘은 들어가서 그냥 푹 자. 다음 주부터 진짜 정신없을 거야.”

“응. 인터뷰는 잘된 거지?”

“말해 뭐 하냐. 질문도 재밌더라. 준비 많이 해온 모양이던데.”

 
영화 개봉이 2주 앞으로 다가온 지호의 주말은 드라마 촬영일만큼 바빴다. 다른 점이라면 자연스러운 멋스러움으로 치장했다는 점, 그리고 오늘의 경우 조금 일찍 끝났다는 점. 그래봤자 10시가 넘었지만.


[지호 씨, 추가된 씬 보내요. 혹시 수정 원하는 부분 있으면 말해 주세요. (오전 11:00)]

 
새벽 같은 아침 이후, 처음으로 쥔 핸드폰에는 도착한 지 한참 된 혜윤의 메시지가 있었다. 젖은 화장 솜을 잡으려던 손이 멈춘다. 첨부된 파일을 쭉 훑어보는데 딱히 걸리는 부분은 없었다. 어련히 잘 썼겠나 싶기도 하고.


[저는 좋아요. 내일 봐요. (오후 10:40)]

 
저번 주에도 쉬고 온 다음 날은 얼굴 곳곳에서 생생함을 뿜어내던데. 내일이면 또 그 얼굴을 보게 될 것 같아 살짝 웃음이 났다. 그리고 전송된 메시지가 화면 끝에 자리하자 지호는 다시 화장 솜을 잡으려 했다.

Rrrr- Rrrr-

핸드폰이 요동치기 전까지는.

지호가 핸드폰 화면을 경직된 눈으로 들여다봤다. ‘장혜윤 작가님’이라는 글자가 쓰인 수신화면을 본 적이 있었나. 낯설어서 그런지 조금 설레기까지 했다. 메시지를 확인하다 잘못 건 것 같은데, 뭐가 됐든지 말이다.


“……작가님?”

 
상대가 민망해할까 싶어 뜸 들이듯 그녀의 귓가를 깨웠다. 자신 만큼이나 단번에 말을 못 하는 게 역시 잘못 걸었구나, 라는 생각도 잠깐.


-……저는 하나도 안 좋아요!

“네?”

-지호 씨, 지금 바빠요?

 
지호가 혀로 입 안을 쭉 훑었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눌러보려 하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핸드폰 너머 숨소리만으로도 ‘나 지금 화났어요!’가 느껴졌다. 늦은 시간인데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보니, 화가 잠을 이겨낸 것 같았다.

정말 이 여자를 어쩌면 좋을까.

혜윤이 불안함을 참으려 깨물던 입술을, 지호는 어찌할 수 없는 즐거움을 억누르려 깨물었다.


“아니요. 말해요.”

-……나랑 놀이 하나 할래요?

“큭큭. 무슨?”

-서운한 거 하나씩 털어놓기 놀이.

 
봉기는 룸미러로 지호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작가님?’이라는 지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봉기의 신경 또한 곤두선 상태였다. 그리고 9년 만에 깨달은 것들도 있었다.

‘아, 그동안 나는 지호가 연애하는 걸 본 적이 없었구나’라던가, ‘지호가 진짜 행복해서 웃을 땐, 눈동자 속에도 미소가 흐르는구나.’ 같은 것들. 저런 표정은 처음이었으니. 몇십억을 받고 찍은 광고에서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 술 마셨어요?”

-맥주 조금요. 그런데 진짜 오해하지 말아요. 저 술 세니까요.

“……미치겠다, 진짜.”

 
그가 핸드폰을 잡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턱을 들자 보이는 차 내부의 시계. 시간은 점점 더 깊은 밤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럼 제가 먼저 할까요?

“알았으니까 천천히 말해요. 뭐가 그렇게 급해.”

-……전에.

“응?”

-빨리…… 하려고.

“다시 말해봐요. 너무 작아서 못 들었다.”

 
들리지 않는 앞 마디에 지호의 미간이 구겨졌다. 조금 전까지의 밝고 똑똑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훅 사라진 탓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놓친 것 같아 핸드폰에 귀를 꾹 붙여보자 그녀가 다시 한번 작게 속삭인다.


-……부끄러워지기 전에.

 
가슴을 관통하는 여덟 글자를.

가을과 겨울 사이에 놓인 어느 밤. 핸드폰 너머의 뾰로통한 목소리. 제일 지켜주고 싶은데, 세상 용감한 척은 다 하고 있지. 그녀가 건네는 모든 것들이 남자의 마음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지금 어디예요?”

 
그리고 대답 없이 듣고만 있는 혜윤을 기다려주려다 그냥 제 말을 한 번 더 보탰다. 시작은 저쪽에서 했으니까, 이젠 봐주고 싶지 않아서.


“서운한 거 털어놓는다는데, 얼굴 보고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

“말해요. 갈 테니까.”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장난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마음 졸이며 그를 힐끔거리던 봉기가 마지막 말에 짙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지호야. 형은 요즘 우리 지호가 아주 많이 낯설어요.”

 
하지만 이미 지호의 온 신경은 한 사람에게만 꽂혀 있었기에 봉기의 혼잣말은 조금도 닿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봉기 역시 방언 터지듯 답답함을 뱉어낼 뿐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여러분. 내일도 보실 분들이 이러지들 마시고…….”

 
때마침 마지막 신호를 받은 차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봉기가 대충 차를 세우고 그를 돌아보자 전화는 끊은 상황이었다.


“진짜 가려고?”

 
서둘러 내리려는 폼에서 이미 답이 나왔지만,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물어봤다.


“응. 걱정 말고.”

“하아…… 걱정이 어떻게 안 되냐, 인마.”

 
‘가뜩이나 잘생긴 놈이, 화장도 안 지우고 그러고 가겠다는데. 너는 거울을 안 보고 사는 거냐.’처럼, 하고 싶은 말은 끝도 없었지만. 엔간하면 고집 안 부리는 놈이 고집을 피울 땐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란 걸 너무 잘 알아서.


“어떻게…… 모자라도 좀 써봐. 안경을 더 얹던가.”

“큭큭. 내일 봐.”

 
무장이라도 시켜야지 싶은 봉기였다. 그런다고 가려질 것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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