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그럼 지금부터
(30/110)
30. 그럼 지금부터
(30/110)
30. 그럼 지금부터
2022.09.11.
“와…… 진짜 왔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호를 보며 혜윤이 작게 감탄했다. 등장 자체만으로도 놀라운데, 심지어 저렇게 꾸며진 얼굴은 처음이라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너울진 머릿결과 남자다운 눈썹, 그 밑에 촘촘한 속눈썹까지. 조도가 낮은 카페 조명 밑에서도 높은 콧대가 만든 그림자가 선명했다. 굵고 매끄러운 턱선이 조금은 야하게 느껴져 눈을 돌리게 했고.
점점 제 앞으로 걸어오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오라고 했으니까.”
맞은편까지 다가온 지호는 자리에 앉지 않은 채 카페를 둘러봤다.
넓은 테이블 몇 개가 드문드문 놓인 실내는 답답함이 없었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걸맞은 아름다운 조명들. 정성을 많이 들인 공간 같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결국엔 혜윤을 봤다.
‘긴 머리도 예뻤다는 걸 잠깐 잊고 지냈네.’
어깨 밑으로 흘러내린 부드러운 머릿결을 평소보다 더 진하게 바라봤다.
주인을 닮은 옷은 소재와 색감 모두 포근해 보이기만 했다. 천천히 내려간 지호의 눈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노트북과 빈 맥주캔들을 스친다.
요즘은 카페에서 맥주도 파나.
“일어나요. 여기도 끝날 시간 됐을 텐데. 계산은 한 건가?”
지호는 카운터로 걸어가 직원을 찾아봤다. 누군가 있는 곳에서 할법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차로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다.
그러자 드르륵 의자를 미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혜윤이 제 쪽으로 걸어왔다.
자신을 스쳐 지나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했고.
심지어 부스럭대며 쇼케이스를 열더니만 그 안에 쿠키를 꺼낸다. 작은 손에 버겁게 쥔 쿠키가 제 쪽을 향해 쭉 밀려오는 것도 금방이었다.
뭔가 뿌듯한 표정과 함께.
“직접 구운 거라 맛있어요.”
“……여기 사장님이랑 잘 아는 사이예요?”
“네. 잘 아는…… 줄 알았는데 이젠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요.”
“응?”
“누구보다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감정이 급변한 걸까. 혜윤의 얼굴에 3초 전의 뿌듯함은 몽땅 사라지고 억울함이 매달려 있었다.
지호는 조금 정신이 없었다. 카페에 흐르는 피아노 선율은 너무 잔잔하건만 혜윤의 행동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일단 주는 손이 귀여워 쿠키를 받긴 했는데, 이젠 그녀가 자연스럽게 유자차를 만들고 있으니.
“아…… 그렇게 막 만져도 되나.”
두 잔을 만든 혜윤이 잔 하나를 지호에게 건넸다.
“네. 제가 사장이니까요. ……자주는 안 오지만.”
또 축 처진 어깨를 하고는 터덜터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혜윤을 보며, 그는 놀란 발을 멈췄다.
카페 사장인데 동화를 쓰고, 어쩌다 보니 드라마 극본을 끄적이다가 연기도 하게 되었다는 건가. 저 작은 몸으로 대체 몇 개의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자리에 앉는 동안에도 혜윤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매력이 더 많구나 싶어 웃음도 나고.
“혹시 내가 모르는 게 더 있어요? 토요일엔 뭐…… 농사도 짓고 그러나?”
큰 눈으로 한껏 노려보는 혜윤이 귀여워, 지호는 조금 더 바라보다 유자차를 마셨다. 달콤함이 몸속에 퍼지자 피로가 풀리면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다행이지 싶었다.
그러니까 여기엔 아무도 안 온다는 거지.
“그럼 이제 시작해요. 서운한 거 하나씩 털어놓기.”
그가 컵을 내려놓으며 곧장 세워진 노트북의 화면을 접었다. 아무리 낮아도 둘 사이에 벽은 없게 만들려는 눈치였다. 그리고 제게 단단히 꽂혀 있는 지호의 시선을 혜윤도 고스란히 받아냈다.
본래 젖어 있는 눈이 유독 울 것 같은데도, 혜윤은 피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지호의 눈이 기분 좋게 휘어졌다.
“그런데 난 서운한 거 없으니까. 내 것까지 작가님이 두 개 말해요.”
그는 이제부터 조금도 혜윤에게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었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되물으려나 싶었는데, 냉큼 끄덕이는 말간 얼굴.
귀여워라. 하고 싶은 말이 꽤 되나 싶어 지호가 몸을 살짝 당겨 앉았다.
“……지호 씨.”
“네.”
입술을 한번 앙다물더니, 큰마음을 먹은 혜윤이 떨리는 입을 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못난 마음이 커져 버려서 작은 가슴안에 담아놓을 자리도 없었다. 창피했지만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
부끄러워도 꺼내 놓아야 할 시간이다.
“지호 씨, 저 너무…… 너무 너무 서운해요.”
“뭐가 그렇게 서운해요…….”
그리고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이처럼 보채는 얼굴이 온 마음에 박혀서, 어르는 척 끝까지 모는 수밖에.
혜윤을 바라보는 지호의 눈에 데일듯한 따뜻함이 넘실댔다.
“메시지 답장 짧은 것도 서운하고요…….”
“…….”
“영화 예고편에서 지호 씨가 다른 여자 옷 벗기는 것도 서운해요. 채재희, 전지나 이름만 들어도 엄청! 엄청 엄청 서운해요.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도 계속 계속 화도 나고요.”
아, 참기 힘드네.
그가 서둘러 입술을 맞물었지만 웃음이 번지는 속도에는 비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린다 한들 벌써 입꼬리가 한껏 올라붙어 큰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혜윤은 아이처럼 귀여운 말을 옹알거리고 있었다. 제 몫의 한 개를 더 안 줬으면 어땠을까 싶다. 벌써 두 개는 훌쩍 넘어간 것 같은데. 메시지와 예고편은 그렇다 치고, 채재희와 전지나는 뭘까.
그렇지만 아직도 서운함이 안 끝난 것 같으니 그는 심각한 척 보조를 맞췄다.
“응. 계속해요.”
“서운한데 서운한 티를 내면 안 되는 것도 서운하고요…… 항상 나 챙겨주려고 곁에 있는 건데, 그럴 때마다 나만 두근거리는 것도…… 서운해요.”
“응…… 그리고 또?”
“지호 씨는…… 나 지켜주려고 마음에도 없는 연인 연기를 하는데…….”
“…….”
지금까지 부끄러운 말을 잔뜩 쏟은 혜윤이 잠시 말을 망설였다. 앞에 모든 이야기는 마지막 한 문장에 비하면 자리를 덜 차지하는 못난 마음이었나보다.
“나 혼자 괜한 기대 하는 것 같아서…… 그냥 스스로한테도 너무 서운해요. 바보 같고.”
혜윤은 결국 한참 바라보던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제 서운함을 다 쏟아내고 이제 그가 대답할 차례가 다가오자 더는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눈앞에 다 마신 맥주캔들이 꼭 지금의 자신 같았다.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시원하기도 한데 허전하기도 하고. 그새 못난 마음과 정이 들었던 걸까. 이제 와서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작은 머리가 천천히 바닥을 향해 숙여진다. 그리고 그 얼굴을 꽤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지 깊게 눌러 보던 지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작가님.”
마음의 무게처럼 묵직한 목소리에 혜윤은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어떤 미친놈이…… 마음에도 없는 여자랑 사귀는 척을 해요.”
희미한 미소가 안개처럼 지호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부끄러운 마음을 쏟아낼 때도 잘 견디던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뛴다기보다는 거의 튀어 오를 것 같이.
“그런데…… 정말 내가 좋아요? 절절하고 애틋하게?”
혜윤은 빨려들 듯 그의 눈에 집중했다. 지호는 자신의 서툰 고백에, 그의 마음이 아니라 제 마음을 되묻고 있었다.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정말 이상했다. 너무나 쉬워 보이는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 하는 스스로가. 입술은 벌어졌는데 그 틈으로 나오는 건 대답이 아니라 탄식 같은 것이었다.
‘절절하고 애틋하게’라. 과연.
혜윤은 곧장 대답을 못 했다는 게 미안했지만, 그 눈빛과 마음조차도 지호는 어여쁘게 보고 있었다. 그 진중한 망설임이 사실은 마음에 들기도 했고.
지호는 혜윤의 망설임이 당연하지 싶었다. 지금 그녀에겐 강한 설렘은 있지만, 제일 중요한 확신이 없어 보였으니. 그러니까 며칠 전에도 그런 불안을 보였겠지.
“음…… 이런 건 어때요. 얼굴 좀 반반하게 생긴 놈이 주변에서 자꾸 챙겨주고, 잘해 주고. 일터라고 간 곳은 낯설어 죽겠는데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건 그놈뿐이고.”
“…….”
“그러다 보니까 계속 눈도 가고, 슬슬 마음도 가는 것 같고…… 이런 것일 수도…… 있겠죠.”
따뜻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오는 표현들은 하나같이 냉정한 것들 뿐이었다. 그녀가 입 안에 물고 있던 달콤한 막대사탕을 빼앗고는, 다시 저를 쳐다보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달게 느껴지는지 확인해보라고.
지호는 그의 말을 한 글자씩 되짚는 혜윤의 골똘한 표정을 바라봤다.
“……좋은 건 맞는데 남자로서 좋은 건지 확신은 없나 보다.”
“…….”
“그냥 많이 친해지고 싶은 건지…… 진짜 사랑하고 싶은 정도인지.”
“그런 것…… 같아요…….”
저 한 문장을 내뱉기 위해 얼마나 용기를 냈을까. 그는 휘청이는 마음마저도 제게 온전히 보여주는 혜윤이 더없이 예뻐 보였다.
삐뚤어진 잣대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지만, 여기서 그녀가 자신을 덜컥 사랑한다고 말했더라면.
아, 조금 아쉬웠을 것 같았다.
혜윤은 자신도 몰랐던 진심을 인정하고 나자 지호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힘들었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보다 바쁜 사람을 불러서 한 행동이란 게 겨우 칭얼거림과 어설픈 고백, 그리고 번복이라니.
자정이 코앞인 시간처럼, 하얀 얼굴 위로 어둠의 색이 번진다.
그에 비해 지호의 입가엔 가뿐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좋네요. 그럼 나 간 보면 되겠네.”
“……네?”
그리고 언젠가 그녀가 그랬듯, 지호 역시 혜윤이 스스로를 미워할 틈을 주지 않았다. 상상도 못 한 제안으로.
“진짜 한번 해봐요, 연인처럼. 남자로 대해보라고. ……그럼 알게 되겠죠. 그냥 지인으로 남고 싶은지, 내 옆에 오직 한 사람으로 두고 싶은지.”
“어떻게 그렇게…….”
그의 단순하고 명쾌한 말투는 혜윤의 우울함을 단숨에 앗아갔다. 지호는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그녀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그가 당겨 앉은 상체를 뒤로 젖히며 팔짱을 꼈다.
“음…… 어차피 세상 사람들이 다 연인인 줄 아는 마당에 더 쉽지 않나. 그 두 달짜리 명분 잘 이용해서 요목조목 따져봐요. 마음이든…… 몸이든.”
“모, 몸이요?”
“응. 그럼 편지 주고받으면서 속마음만 떠보려고?”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 동화 작가님이셨지.’라는 그의 농담 섞인 말에 혜윤이 놀리지 말라며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렇지. 그렇게 씩씩해야 장혜윤답지. 그 기운이 마음에 드는 지호는 혜윤을 향해 최종 결정권을 넘겨주었고.
“오늘까지만 배우랑 작가인 거고, 내일부터는 진짜 남자 대 여자로. ……어때요.”
은근한 눈빛으로 배려인 양 혜윤을 재촉하기도 했다. 말이 아니어도 어떤 식으로든 긍정을 보인다면, 자신은 다 읽어낼 수 있다는 듯이.
그리고 입술을 달싹이던 혜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요한 대답에 지호 역시 웃으며 그녀를 따라 했다. 잠시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이 다시 한 사람을 향한다.
“아…… 자정이 넘었구나. 그럼 지금부터.”
그의 짙은 눈동자가 느른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