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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넷, 다섯, 그리고 (32/110)


32. 넷, 다섯, 그리고
2022.09.18.



“응?”

 
지호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 쪽을 향하는 혜윤에게 의문 같은 인기척을 보냈다.


“우리 집은 2층.”

“아…….”

 
엘리베이터가 2층도 운행할 텐데 자연스럽게 계단을 고르는 모습이 평소의 습관 같았다. 지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

그리고 비상구 계단으로 들어선 순간. 그때부터 혜윤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적막만이 가득한 공간. 또 다른 우주에 오직 두 사람만 남겨진 기분이었다. 간간이 발을 멈출 때면 지호의 큰 손바닥이 제 등을 쓸어내리듯 살며시 눌러주었다. 뒤에 있다고, 걱정 말고 걸어가라고.

매일 오르내리던 계단이 새로운 세계 같았다.


“또 물어볼 거 없어요?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있으면 다 해요.”

 
공간을 지배하는 그의 목소리가 혜윤의 등 뒤에서 주문처럼 울렸다. 그는 느릿하게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걸음을 재촉 없이 기다려 줬다. 느린 걸음만큼이나 겨우 꺼낼 수 있는 부끄러운 질문 역시.


“……저번에 입 맞추는 씬이요. 원래 그런 식으로 촬영하는 거예요?”

“원래? 뭐가?”

“그러니까…… 상대 배우가 자꾸 NG 내면 대본에 없는데도 잡아당기거나…….”

 
지호가 혜윤의 붉어진 두 뺨을 볼 수 없는 것처럼, 혜윤 또한 지호의 씁쓸한 미소를 볼 수 없었다.


“설마. 그런 경우는 없어요.”

“그런데 왜…… 그랬어요?”

 
각자에게만 들리는 제 심장 소리가 그날의 기억과 함께 메아리처럼 웅웅거렸다.


“……못 참겠어서.”

“…….”

“자꾸 날 피하니까.”

 
말을 내뱉는 순간에도 그녀를 몰아세운 그때의 자신이 떠올랐는지, 지호의 한쪽 입매가 비틀어졌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혜윤의 어깨에 닿는다. 그 생경한 감각에 혜윤이 몸을 움츠리며 발을 멈췄다.

그러자 놀란 아이를 달래려는 큰 손바닥이 작은 등을 톡톡 천천히 두드렸다. 등을 두드리는 건지, 심장을 두드리는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혜윤은 더딘 걸음을 계단 위에 올렸다.

탁. 탁. 탁.

다시 이 세계에 남은 건 두 개의 발소리와 가느다란 숨소리뿐이다.


“전에 그랬잖아요. 나 만나고 싶어서…… 출연한 거라고.”

“네.”

“그거 진짜로…… 진짜예요?”

“네.”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대화였다. 흐릿한 질문과 선명한 대답.


“……그래서 어때요? 만나보니까.”

 
한 계단 위로 더 올라서자 혜윤의 눈엔 이 세계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은 계단은 3개 정도. 아쉬워서인지, 떨리는 감정 탓인지, 숨이 조금 가쁜 것 같았다.


“음…… 지금 생각은 그렇죠. 두 달 동안 잘해 줘야지 싶은?”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대답이 그녀의 등 뒤에 스며들었다. 그가 계속 주었던 선명한 답과는 아주 달라서 단숨에 뜻을 알기 힘들었다.


“응? 왜요? 못 해 준 적도 없으면서.”

 
마지막 계단에 오른 혜윤이 계단 밖으로 한 발을 더 떼려던 참이었다.


“……혹해서 내 옆으로 오게 하려고.”

 
그녀의 발 하나가 허공에 쩡 굳어버린다. 늘 입 안에 머금고 있었던 것처럼 곧장 대답하던 지호가, 처음으로 뜸 들이며 건넨 대답.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린 남자의 진심에 작은 발 하나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멈춘 걸음을 일깨워주려는 듯, 또다시 지호의 손바닥이 혜윤의 등에 닿으려 할 때였다. 그보다 조금 더 빠르게 그녀가 홱 뒤돌았다.

아주 잠깐만 머물다 사라질 확신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은 분명했다. 아직 마지막 계단 위에 올라서 있으니, 정말 아직은 원래의 현실이 아닌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만큼은 다음 생각 따위 하지 말자고.


“……응?”

 
계단 덕분에 한 뼘 남짓한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이 서로를 평평히 마주했다. 지호가 자신을 보는 혜윤을 뭉근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촉촉하게 물이 오른 눈동자가 일렁이나 싶은 순간, 그녀의 작은 두 손이 그의 얼굴로 향한다. 양 손바닥에 그의 귓불이 닿는 것만으로도 혜윤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제 입술을 그에게 가져갔다. 시선이 엉키지 않으면 죽는 사람들처럼, 입술이 닿기 직전까지 서로에게 집중했다.

먼저 눈을 감은 건 지호였다. 혜윤이 져줄 생각이 없어 보여서. 지호에게 마지막까지 제 눈빛을 남긴 혜윤도 그제야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그리고 그날을 떠올렸다. 코앞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을 참아내며 혜윤은 숫자를 셌다. 아무 움직임 없이 그저 입술을 꾹 누르는 것만으로도 손끝이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지호는 속으로 피어오르는 말랑말랑한 감정을 겨우 참고 있었다. 혜윤이 그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여린 입술을 맞대고 있다는 걸, 3초가 지날 때쯤부터 알 수 있었기에. 그저 고요히 받아줄 뿐이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넷, 다섯.’

 
원하는 다섯을 세고 그녀가 제 입술을 떼어냈다. 천천히 눈을 뜨자 검은 눈동자 안에 선명히 비추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입술에 남아 있는 감각과 그의 깊은 시선 때문에 몽롱한 기분이었다.


“……복수하는 거?”

 
밤을 닮은 낮은 목소리로, 지호가 옅은 장난이 서린 눈 속에 혜윤을 담았다. 그러자 그녀가 그의 얼굴을 잡아둔 작은 손을 천천히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붉게 물이 든 얼굴에 수줍음과 뿌듯함이 예쁘게 배어 있었다.


‘그래, 이 얼굴은 어떻게든 안 봤어야 했는데…….’

 
서로의 코끝이 점점 멀어지려는 순간에 지호가 결국 그녀의 목덜미를 감쌌다. 급히 삼키듯 입술이 겹쳐지고 그의 짙은 욕망이 그녀의 입술 새를 가른다. 여린 속살에 닿은 뜨거운 진심. 혜윤은 몸을 움찔거렸다.

혜윤이 세던 다섯만큼, 지호도 딱 그만큼만 욕심을 부렸다. 더 깊어지기 전에 자제한 그였지만, 떨어지는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듯이 놓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자 혜윤이 감추지 못한 떨림을 내뱉었다. 달아오른 숨결 탓에 가슴이 들썩이는 게 지호의 눈에도 확연했다.

어느 곳이든, 지금은 그녀에게 너무 오래 시선을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술 취한 여자는 건드리는 거 아니니까…… 여기까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어찌 보면 다짐 같은 지호의 말이 혜윤에게도 닿았다.

어떻게든 용기를 내던 그녀의 씩씩함도 여기까지가 한계인 모양이었다. 혜윤은 너무나 작은 끄덕임을 남기고는 뒤돌아 계단을 빠져나갔다. 뒷모습에도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손이 보이자 지호가 잠시 눈을 돌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제야 혜윤에게 다가선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더듬더듬 현관문 안으로 들어간 혜윤이 다시 그를 바라봤다. 용기를 모두 써서 남은 게 한 톨도 없는 건지, 눈이 마주치면 곧장 비스듬히 피하는 게 귀여웠다.


“나도 서운한 거 다 말해 줘서 고마워요. 잘 자요.”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 지호가 제 안에 꽃잎처럼 붉게 물든 얼굴을 아로새기며 문을 닫아도 좋다는 눈짓을 했다. 그런데 뻐끔뻐끔 자그마한 입으로 밤공기를 괴롭히기만 할 뿐, 문을 닫지 않았다.

눈빛에 며칠 전의 불안 같은 게 보였다. 이번엔 뭐 때문에 불안할까. 또 잘못은 자신이 했는데 눈치는 혜윤이 보는 것 같았다.


“큭큭. 얼른 들어가요. 잘 보여야 되는 사람…… 자꾸 힘들게 하지 말고.”

 
지호의 장난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얼굴로. 아마 그냥 보내도 되는 건지 걱정스러웠나 보다.

철커덕-

그리고 닫힌 문을 앞에 두고 몇 분을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



“혜윤아, 너 되게 신기하다.”

“응? 뭐가?”

 
이른 아침. 피곤함이 가득한 혜윤이 무거운 눈을 겨우 뜨며 민주를 바라봤다. 민주는 운전 틈틈이 그녀의 얼굴을 살핀 모양이었다.


“네 얼굴 말이야. 피곤해 보이는데 생기가 넘쳐흐르네? 뭐지?”

“아, 잠을 잘 못 잤어.”

“그러니까. 잠을 잘 못 잔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기분이 좋아?”

 
민주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흘깃 쳐다봤다. 원래 같았으면 졸려도 안 졸린 척 눈을 치켜뜨기라도 했을 텐데 그러기엔 잠이 너무 쏟아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서 세 시간도 못 잤으니.


“음…… 이틀 만에 민주 얼굴을 봐서?”

 
다시 눈을 감은 혜윤이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띤다. 그에 걸맞은 대답과 함께.


“오…… 조금도 와닿지 않는데?”

“큭큭. 아니야, 그거 맞아.”

 
감은 눈두덩이에도 행복이 가득한 건지,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어제 뭐 했어?”

 
그리고 행복을 온전히 누릴 틈도 없이 민주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냥 뭐…… 대본 수정도 하고…….”

 
거기까지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다음부터는 말을 하겠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콩콩 뛰었으니 말이다. 밖으로 나가지 못한 어젯밤 이야기들이 입 안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통에 두 뺨 밖으로 열이 올랐다.


“대본 수정이 그렇게 설레? 왜 얼굴이 빨개져?”

“에이, 빨개지기는.”

 
운전에 집중하며 슬쩍 힐끔거리는 게 전부일 텐데도 민주는 명료하게 혜윤의 감정을 읽었다.


“그런데 대본 수정을 왜 해? 결말 바뀌는 거야?”

“아니. ……전지나 씨가 특별 출연하기로 해서. 분량 더 만드느라.”

 
그리고 이제 마음속엔 온통 동그랗고 부드러운 장난감만 가득한 그녀인지라, 그 예쁜 이름도 예쁜 마음으로 입에 올릴 수 있었다.


“와, 미쳤다. 그럼 지금 헤어진 연인들이 연기한다는 거야?”

“아니야! 그런 거!”

 
물론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아, 깜짝이야.”

“미안…… 그런데 진짜…… 그런 거 아니야. 둘이 그런 사이 아니었대.”

“누가 그래?”

 
마침 신호에 걸린 차가 멈췄다. 기회가 주어졌으니 민주 역시 옆자리로 시선을 뻗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찬찬히 살펴본 그녀의 얼굴이 오늘따라 정말 아름다웠다.


“……지호 씨한테 들었어. 아니래.”

“우와, 대박! 당사자한테 물어봤다고?”

“응.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자. 지호 씨 속상할 테니까.”

 
오늘따라 유독 빛나 보이는 혜윤이, 그에 어울리게 예쁜 생각을 품은 것 같았다. 그래서 민주도 더는 엮지 않기로 했다. 오해받는 게 좋지 않다는 건 당연하니까. 다시 액셀에 발을 올리자 차가 움직였다.


“그럼 물어본 김에 그건 안 물어봤어?”

“뭐?”

“우준이 좋아하냐고.”

“…….”

“아니다. 안 물어보는 게 낫겠다. 진짜 그렇다고 하면 어떡해? 소개시켜 달라고 하면…… 어휴, 그것도 문제지. 큭큭.”

 
갑자기 뚝 끊긴 대답. 피곤해하더니만 잠이 들었나 싶어 민주가 곁눈질로 옆을 봤다. 잠이 들긴커녕 졸음이 싹 가신 표정이었다.


“김우준은 내가 조만간…… 죽일 거야.”

 
예쁜 생각만 하는 건 아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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