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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노력 (33/110)


33. 노력
2022.09.21.



“계속 어색하게 굴 거예요?”

 
점심시간을 30분쯤 앞두고 지호가 내내 참았던 말을 뱉었다. 카메라만 멈추면 수험생처럼 대본으로 코를 박아버리는 혜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뭘 읽겠다고.

마주보기 부끄럽다 이거지.


“……또 티가 났어요?”

 
고개를 드는 이 순간마저도 삐거덕대면서 무슨. 본인 딴에는 나름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나 보다. 귀엽게.


“아닌 척할 생각은 있었고?”

“큭큭. 아니요.”

“달라진 거 없어요. 똑같이 일하는 거니까 편하게 해요.”

 
앙다문 입매로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또 눈은 슬쩍 피한다. 어쩔 수 없이 지호도 웃음이 났다.

아침부터 이어지는 촬영 동안 두 사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지호는 곁에서 혜윤을 챙겨주었고, 혜윤이 눈을 조금 피했다 뿐이지 사이사이에 가벼운 대화는 있었으니까.

달라진 건 딱 하나, 바로 접촉이다. 민우의 컷 소리에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몸이 닿아 있었고, 위치를 잡아주려 가볍게 손목을 잡았던 지난주까지와는 다르게 지호는 어깨를 감싸 혜윤을 움직였다.

접촉의 농도가 미세하게 짙어졌다는 것. 달라진 점은 그것 하나였지만 그 하나가 혜윤에게는 너무나 컸다.


“그럼 점심 식사하고 이어서 갈게요! 2시까지 모여주세요!”

 
널려 있는 장비들을 대충 정리하는 손들이 날렵하다. 서둘러 하나둘 세트장을 빠져나가고 지호도 목을 늘리며 걸음을 옮기려던 참이었다. 카메라 밖에 선 민주에게 손짓과 입 모양을 전하는 혜윤을 보기 전까지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읽어보니 혜윤은 여기 남겠다는 뜻 같았다. 양 손바닥을 붙여 귀로 가져가는 모양이, 어린아이가 봐도 ‘나는 잘 거야.’로 보일 만했다.


“밥 먹으러 안 가요?”

“네. 피곤해서 조금 자려고.”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남은 두 명의 스태프들마저 몸을 움직이는 걸 지켜봤다.


“그럼…… 같이 소파 쪽으로 가요. 나는 대본 좀 볼 테니까.”

 
스태프 둘의 대화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다가 아예 문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사람들로 벅적대던 공간이 텅 비어버리는 건 금방이었다. 두 사람마저 말을 멈추면 그야말로 적막인 이곳.


“네? 지호 씨도 옆에 있겠다고요?”

“네. 혼자 있으면 무섭잖아.”

 
갈색 눈에 당황스러움이 비쳤지만 지호는 차분히 대답했다.


“에이, 지호 씨. 저 그런 거 안 무서워해요. 외동이라 혼자 있는 것도 엄청 익숙하고.”

 
혜윤이 조금 당당한 척 목소리를 높였다. 지호가 옆에 있으면 떨려서 잠을 못 잘 것 같았다. 금방 잠들면 되는데 무서운 것쯤이야. 조금 전 대답이 지호에게 한 건지, 결의를 다지기 위해 외친 건지 스스로도 헷갈리긴 했다.

그 깜찍한 비장함을 내려보던 지호도 비슷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이 나려는 걸 애써 참으면서.


“그렇구나…… 그럼 뭐.”

 
동의하던 고갯짓과 어울리는 대답을 하며 지호는 등을 돌렸다. 그제야 참았던 웃음을 살짝 내비쳤지만 혜윤은 볼 수 없었다. 문 쪽으로 한 걸음을 떼던 지호가 일부러 작은 혼잣말을 흘렸다.


“그런데 괜찮으려나…… 여기 뭐 있는 것 같다면서 다들 혼자 안 있으려고 하던데.”

 
사실 완전히 갈 생각은 아니었다. 머릿속엔 제 차 안에 있는 이불과 샌드위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잘 때 덮어주기도 해야겠고, 촬영이 남았으니 깨어나면 뭐라도 먹이고 싶어서.

그러니 돌아올 때까지 한번 버텨보라고. 10분 뒤에 와보면 얼마나 겁이 없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10분은커녕, 10초 만에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손목도 못 잡고 소매만 겨우 잡은 손이 유독 더 작아 보였다. 서둘러 입매를 가다듬은 지호가 덤덤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잠이 조금 달아났는지 또렷한 갈색 눈동자가 제게 집중하고 있었다.


“진짜…… 본 사람이 있대요?”

 
가다듬은 보람도 없이 저 표정엔 곧장 허물어지는 것도 문제였다. 표정이든 마음이든.


“안 무섭다더니.”

“그냥 궁금해서…….”

“장난이지. 쉬고 있어요. 이불만 금방 가져올 테니까.”

 
더 놀려주기엔 정말 겁을 낼 것 같아 지호는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리고 제 소매를 쥔 주먹을 슬쩍 내려주었다.


“아니요! 그냥 안 잘래요.”

 
한 손이 그의 소매를 놓치자 두 손으로 쥐어버리는 혜윤을 이길 순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두 사람은 곧장 거실 세트장에 놓인 소파로 함께 걸어갔다. 허비하는 시간 없이 10분이라도 더 재우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지호가 먼저 자리에 앉자 혜윤이 잠시 소파를 쭉 훑다가 결국 몇 뼘 떨어진 자리에 앉는다. 이렇게 마음도 몸도 불편한데 잠을 잘 수 있을까 싶었다.

폭-


“엇…….”

“그만 벌서고.”

 
그 뻣뻣함을 보던 지호가 팔을 뻗어 혜윤의 어깨를 바닥으로 내렸다. 제 다리에 머리를 눕히고 조금 전 챙겨온 교복 재킷을 덮어주는 건 꽤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놀란 마음을 내뱉기도 전에 그의 큰 손이 눈가를 덮어주었다.


“얼른 자요. 시간 계속 간다.”

 
혜윤의 눈앞에 원래대로라면 조명 빛이 어른대야 했지만, 그의 시원한 손이 만들어준 한낮의 밤은 빛이 닿지 않았다. 어떻게 잠들 수 있을까 싶던 몇 분 전의 고민도 지호의 손이 거둬내 준 듯했다.

그리고 5분 뒤. 완벽히 잠이 들기 직전, 그의 손이 사라진 건지 눈 위의 얇은 살갗을 뚫고 아련한 빛이 스몄다. 잠이 드는 데엔 문제 되지 않았지만 조금은 아쉽다 싶을 때, 그의 긴 손가락이 혜윤의 머릿결을 살금살금 어루만졌다.

느리고, 보드랍고, 아주 소중하게.

짧은 잠이라도 정말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



“이제 일어나요. 뭐라도 조금 먹어야지.”

 
곧장 귀로 내려앉는 목소리와 함께 큰 손이 혜윤의 등을 살포시 두드렸다.


“흐음…….”

 
비몽사몽 고개를 움직거리자 지호가 상체를 천천히 올리는 게 보였다. 목소리가 참 가깝다 싶었는데, 정말 귀에 대고 속삭여준 모양이었다. 혜윤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겨우 무거운 상체를 세웠다.


“여기 잠깐 있어요. 커피랑 먹을 것 좀 가져올 테니까.”

“아니…… 같이 갈래요…….”

 
잠결에도 잊지 못한 지호의 장난에, 다시 그의 소매를 붙잡는 손.


“음…… 외동치고는 혼자 있는 걸 엄청 낯설어하네.”

 
늘 자신이 한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그를 보며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힘을 완전히 내려놓은 채 말갛게 웃는 모습에 지호도 비슷하게 웃어줬다.

세트장을 빠져나온 혜윤의 발걸음은 조금 굼떴다. 아직도 한가득 남아 있는 졸음이 눈과 발을 붙잡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 얼마나 잤어요?”

“30분 정도?”

“지호 씨 다리 아팠겠다…… 발로 뻥 차지 그랬어요.”

“큭큭. 잠 덜 깼구나.”

 
작은 목소리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 취해 해롱해롱거렸다. 조금 더 재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들어, 지호가 조금 그윽하게 그녀를 내려봤다. 걸을 때마다 스치는 팔에도 힘이 축 빠진 것 같았다.

띠리링-

그때 혜윤의 재킷 주머니에서 경쾌한 알림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팔이 천천히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어쩌어찌 민우에게서 온 건 알겠는데 평소 그의 메시지와는 달리 글자가 빼곡했다.

졸린 눈이 긴 문장을 읽어내려니 굼뜬 발이 아예 똑 멈춰버린다. 지호 역시 그 속도를 함께했다.


[혜윤아, 혹시 괜찮으면 차도혁 씨한테 연락 한번 해 줘. 네 글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2주 넘게 매일 전화 오거든. 지겹다 지겨워. 자꾸 개인 연락처 알려달라고 사정을 해서 거절했더니 그럼 자기 번호라도 꼭 전해 달래. 그런데 시나리오를 엄청 자세히 읽어본 것 같아서 무시하기는 조금 아깝기도 해. 아무튼 전달은 한다. 번호는 010……]

‘차도혁이 누구더라…….’

 
혜윤이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5초 만에 얼핏 얼굴과 이름이 겹쳐지는 남자 배우가 있었다. 누군지 알겠는 걸 보니 유명한 배우구나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윗머리에 지호의 볼이 맞붙을 듯 가까워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요즘 인기 많죠, 차도혁 씨. 다음 주에 나랑 영화 개봉도 겹치고.”

 
바짝 붙은 두 몸 사이에 놓인 핸드폰이 두 사람의 집중력을 버겁게 받아냈다.


“아…… 저는 배우들은 잘 몰라서.”

“응.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네.”

 
지호는 혜윤의 말에 살짝 웃었지만 금세 메시지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혜윤은 모르겠지만 이미 봉기를 통해 손을 써둔 상태였다. 그녀를 찾는 모든 연락은 제 쪽에서 해결하기로. 그렇지만 그 공식적인 방법을 어기고 민우를 집요하게 파고들 거란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가까운 데 구멍이 있었구나…….”

“네?”

 
허를 찔린 지호가 낮은 혼잣말을 웅얼댔다. 당연히 그 뜻을 모르는 그녀가 되물었지만 그는 설명보다는 본능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래서, 연락할 거예요?”

 
짧은 문장이 주는 낯선 압박에 혜윤이 그를 올려봤다. 어른어른 피어오르는 불꽃 같은 눈빛. 혜윤은 정말이지 신기했다. 늘 지호가 자신을 볼 때 이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글자처럼 그의 감정이 읽히는 것이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우와…… 진짜 신기하다.”

“뭐가?”

“지호 씨 감정이 이렇게 쉽게 읽히는 거요.”

“음, 내가 어떤 것 같은데요?”

“진짜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이잖아요.”

 
잠이 덜 깬 눈에도 이렇게 또렷하게 보일 수 있다니. 백 점짜리 시험지를 내미는 아이처럼 그녀가 지호를 향해 뿌듯한 얼굴을 보였다.


“나름 관대한 척하려고 노력한 건데…… 들켰네.”

 
그리고 답을 맞힌 아이를 칭찬하는 얼굴로, 그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 이렇게나 노골적인데 어디가 노력을 했다는 건지 거짓말 같았지만 말이다.


“에이, 노력은 무슨.”

“진짜로.”

 
혜윤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못 믿겠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러자 긴 눈매에 얼비치던 그윽함이야말로 거짓말인 것처럼 사라져버린다.


“만약에 노력을 안 했더라면…… 처음부터 이랬겠죠?”

“네?”

 
순간 지호가 핸드폰을 쥐고 있는 혜윤의 오른손을 가뿐히 감싸며 민우의 메시지를 꾹 눌렀다.

삭제. 확인.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메시지.


“으아…….”

 
지호가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행동에 작은 입이 떡 벌어졌다. 사라진 메시지의 길이만큼이나 제법 길게 벌어진 입은 쉽게 닫힐 줄 몰랐다.

혜윤이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잔잔한 미소와 단호한 눈빛. 지호가 맞는데 지호가 아닌 것도 같았다. 다정한 목소리와 그렇지 못한 표현 역시.


“하지 마요. 딴 놈이랑 연락하는 거 난 싫으니까.”

 
그가 귀한 걸 다루듯이 혜윤의 턱을 조심히 올렸다. 입은 어찌 다물었지만 지호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에 잠이 확 달아난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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